
지난해 12월 할리우드 배우 알렉 볼드윈의 아내이자 팟캐스터 요가 강사인 힐라리아 볼드윈은 스페인어 억양을 쓴다는 이유로 ‘스페인 사람인 척한다’는 비판을 받았다. 힐라리아가 실제로는 미국에서 자란 ‘미국인’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국계 미국인 학생 아덴 염은 다른 생각을 갖고 있다. 소수 인종 이민자의 자녀들이 규정된 정체성이 아닌 완전히 다른 문화를 따르게 될 수도 있다고 말한다. 다만 힐라리아와 이민자 자녀 사이에는 아주 중요한 차이가 있다고 인정한다.
‘흑인 흉내’로 욕 먹는 백인 여성들 백인 여학생이 입은 치파오가 논란이 된 까닭 한 일본 코미디언의 ‘흑인 분장’에 비판이 쏟아지고 있다
내적 정체성
힐라리아에 대한 논란이 촉발된 것은 그가 오이의 영어 단어를 기억하지 못하며 강한 지중해식 억양을 사용하고 자녀들을 스페인식 표현으로 부르는 모습이 방송되면서였다. 그의 남편은 “아내가 스페인에서 왔다”고 말했다.
힐라리아가 스페인 사람이라고 많은 이들이 믿은 것도 이해할 수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힐라리아의 본명은 ‘힐러리 헤이워드-토마스’로 미국 메사추세츠주에서 자라 뉴욕에서 대학을 다닌 미국인이었다. 다만 힐라리아의 부모님은 스페인으로 종종 휴가를 갔고, 그가 20대 후반일 때 부모님은 은퇴 후 스페인에 정착했다.
12월 해프닝은 힐라리아를 큰 이슈거리이자 SNS의 농담거리로 만들었다.
코미디언 에이미 슈머는 “스페인에서 온 척하면 안되죠”라는 대사를 자신의 코미디 에피소드에 추가하기도 했다.
영화 ’30 락’에서 남편 알렉 볼드윈의 여자친구역을 맡은 살마 헤이넥은 “우리 모두 조금씩 거짓말을 하잖아요”라며 보다 동정 어린 시선을 표했다.
헤이넥은 본인은 멕시코인이지만 외가가 스페인계라며 힐라리아가 “스페인인이 되고 싶어하는 것은 현명한 선택이다. 난 괜찮다”고 말하기도 했다.
힐라리아는 논란이 불거지자 인스타그램에 “가정에서 두 문화를 모두 사용한다. 알렉과 나는 아이들을 2개 국어로 양육하고 있다. 내가 자란 환경처럼 말이다. 이건 나에게 아주 중요한 과제다. 내 이야기가 약간 다르다는 것은 알지만, 내 결정이고 매우 자랑스럽다”고 말했다.
https://www.instagram.com/p/CJTiwHiDX7X/
그는 이어 뉴욕타임스에 “자라면서 무슨 문화를 받아들이고 받아들이면 안 될지 누가 정해놓은 것이 있느냐”라며 정체성은 개인적인 것이라고 말했다.
나는 힐라리아가 내가 친구들과 자주 이야기해온 ‘인종 가면 증후군(Racial Imposter Syndrome)’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인종 가면 증후군
아덴의 이야기
인종 가면 증후군은 자신이 인지하는 정체성이 남들이 보는 정체성과 다를 때 오는 ‘자기 회의 현상(self-doubt)’을 뜻한다.
이는 나와 같이 소수 인종으로서 살아가는 이들에게 많이 찾아온다.
내 부모님은 한국계 미국인이시다. 그리고 나는 2002년 뉴욕에서 태어났다.
남동생과 나는 사람들로 북적이고 생기가 넘치는 맨해튼의 거리에서 자랐다.
이곳 공원에서 놀고, 근처 동네로 이사 다니면서 다양한 인종과 배경을 가진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다.
몇몇 지역은 특히 다양성이 두드러진다.
허드슨 강과 센트럴파크 사이에 있는 어퍼웨스트사이드는 조용하고 부유한 분위기를 가진 주거지다. 주민의 68%가 백인이며, ‘가십걸’이나 ‘섹스앤더시티’와 같은 매력적인 TV 프로그램의 배경을 생각하면 쉽다.
나는 백인이 다수인 학교에 다녔고, 대부분 학생들은 부유하고 특권 있는 아이들이었다.
그래서인지 어릴 적 집에 놀러 오는 친구들이 내가 먹는 한국 음식이나 TV에 틀어져 있는 한국 드라마에 관해서 물어볼 때마다 방어적으로 대한 경험이 있다.
그 아이들이 무례했다기보다 정체성이 아시아계로 규정지어지는 것을 내가 원치 않았기 때문이다.
미국 미디어 속 아시안계는 ‘클리셰(cliché·상투적인 모습)’로 도배돼 소비된다.
나는 디즈니 영화 속 뮬란을 보아도 그의 용맹함에 공감할 수 없었다.
공부에만 몰두하며 부끄럼을 많이 타는 특색 없는 ‘범생이’ 고등학생 역할도 많이 보았다. 수학을 잘하고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이들 말이다. 나는 이러한 1차원적 묘사를 싫어했다.
다들 내가 부끄러움 많은 아시아 여자아이라고 짐작했고, 그것은 나의 자기 실현적 예언이 됐다.
나는 실제로 수업 시간에 손을 들고 질문하거나, 새로운 친구들에게 다가가는 것을 두려워했다.
자신감이 곤두박질쳤다. 조용한 아이가 된 것이다.
그때 나는 아이들과 어울리기 위해 편견에서 벗어나 ‘백인 아이’ 같이 행동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내 안의 ‘아시아적인 모습’을 다 씻어내고 싶었다.
백인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한국인도 아니었다. 빠져나올 수 없는 림보에 갇힌 느낌이었다.
7학년 때는 한 중국계 미국인 친구가 농담 삼아 나를 ‘바나나’라고 부르기도 했다. 속은 하얗고, 겉은 노랗다는 뜻에서 말이다.
사기꾼이 된 느낌이었다. 한국에 가본 적도 없고, 한국어로 다섯 마디 이상도 하지도 못했다.
스스로 내가 ‘미국인’인지 ‘아시아인’인지 계속해서 묻고 의심했다.
하지만 15세가 되던 해 모든 것이 바뀌었다. 어머니의 미술관 일 때문에 가족들이 다 같이 홍콩에서 잠시 살게 됐기 때문이다.
새로운 도시의 국제학교에 다니면서 처음으로 아시아 사회에 적응하게 됐다.
중국, 싱가포르, 대만, 한국 등에서 온 아이들이 함께 학교에 다녔다.
비록 미국에서 왔지만, 외지인 같다는 느낌을 더는 받지 않았다.
점심시간 친구들과 계단에 앉아 화려한 색깔의 젓가락으로 아시아 음식이 담긴 도시락을 먹었다.
처음으로 인종적인 면을 신경 쓰지 않고 편하게 대화를 주고 받았다.
홍콩 남부의 해변에 가 놀다가 딤섬을 먹고 현지 밴드의 음악을 들었다.
뉴욕으로 돌아온 후 홍콩에서의 기억을 돌이켜봤다.
그리고는 아시아인들의 목소리를 그림, 글, 팟캐스트 등으로 담는 ‘피스 팩트(Peahce Pct)’라는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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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스 팩트는 2020년 3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팬데믹 이후 인스타그램을 통해 인기를 얻기 시작했고, 이를 토대로 독자들과 인종 가면 증후군에 관한 대화도 나눌 수 있었다.
이민자 가정에서 자란 많은 이들이 내적 자아와 외적 자아의 충돌에 공감하는 듯보였다.
미국에선 정체성을 부여하는 역사가 오래됐고, 이 때문에 유색 인종은 종종 혼란에 빠지기도 했다.
18세기 초 ‘블러드 퀀텀(blood quantum)’을 통해 아메리카 원주민 조상의 비율을 알아내고자 했던 것이 대표적인 예다.
미국 법에 따라 시민적 권리가 부여된 최초의 미국 원주민의 친척인 브랫 채프먼 검사는 미국이 당시 원주민 혈통이 차지하고 있는 정도를 알아내 권리를 제한했다고 말했다.
채프먼은 또 플로리다의 ‘미코수키 종족(Miccosukee tribe’) 등이 자신의 일원으로 50% 이상의 블러드 퀀텀 결과를 가진 이들만 받아들이는 등 이 기준이 원주민 사회 내에서도 통용되고 있다고 말했다.
채프먼은 아메리카 원주민의 자녀들 역시 이민자 자녀처럼 백인들의 사회에 적응하도록 강요 당한다고 말했다.
“인종 가면 증후군을 강요 받는 것이죠. 그들의 정체성을 바꾸고 부족으로부터 거리감을 느끼게 돼요.”
힐라리아 볼드윈의 내적 정체성도 외적 정체성과 충돌했을 수 있다.
정체성이란 유연하고 어느 인종이든 자신이 속하지 않은 다른 문화와 동질감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힐라리아의 경험은 미국 내 유색인종의 경험 혹은 나 같이 뉴욕에서 자란 아시아계 미국인의 경험과는 매우 다르다.
나는 특권을 가지고 자란 백인이 히스패닉의 정체성을 주장하는 것이 부적절하다고 느낀다.
힐라리아 볼드윈은 미국 내 히스패닉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멕시코인이나, 푸에르토리코인, 쿠바인보다는 스페인인이라고 주장하는 것이 확실하다. 퓨 리서치 센터에 의하면 이들 중 절반 이상은 차별을 경험했다고 말했다.
백인들은 히스패닉에게 차별 받을까 걱정하지 않는다.
우리 중 많은 이들이 백인성을 안전망으로 가지고 있지 않다.
인종 가면 증후군을 해결하는 방안은 우리 고유의 이야기와 경험을 공유할 수 있는 공간을 많이 만드는 일일테다.
이건 수학 천재이자 부끄럼을 많이 타는 아이라는 편견보다 훨씬 복잡한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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