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에서 가장 비싼 호화 요트 하나가 자욱한 안개를 뚫고 미 서부 샌디에이고만으로 입항하자 라디오에서 무전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응답하라, 응답하라 … 여기는 아마데아호다.”
화려한 모자이크로 장식된 이 요트의 수영장 위로는 성조기가 펄럭이고 있었다.
지금까지 그림같이 아름다운 지중해 항구를 다니던 3억2500만달러(약 4300억원)짜리 이 호화 요트는 이제 미국 당국의 통제하에 산업 항구 내 칙칙한 콘크리트 부두에 매여 있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의 말을 빌리자면, 이 요트는 러시아 올리가르히(신흥 재벌)가 “부정하게 얻은 이득”을 추적하기 위해 마련된 특별조사팀의 가장 번쩍거리는 트로피라고 할 수 있다.
BBC는 이 슈퍼 요트 압류를 둘러싼 수사에 대한 독점 취재 허가를 받았다.
![[출처: BBC] 피지로 향하는 아마데아호의 이동 경로](https://c.files.bbci.co.uk/72FB/production/_112953492__90021446_test_grey_line_new-nc.png)
그렇게 3월 12일 카리브해의 안티구아섬에서 출항한 아마데아호는 5일 뒤 파나마 운하를 통과해 멕시코에 잠시 머물다가 3월 25일 태평양 한가운데로 향했다.
바다에서 2주 이상을 지낸 뒤 피지에 도착한 아마데아호는 이후 48시간 안에 필리핀으로 향할 예정이었으나, 미 당국은 진짜 목적지가 러시아가 중국과 북한과 국경을 접하는 블라디보스토크 항구일 것으로 추정했다.
애덤스 국장에 따르면 아마데아호가 태평양을 항해하는 동안 미 수사관들은 압류하기 위한 “미끼”로 쓸 규정 위반 사항을 찾고 있었다고 한다.
미 당국은 케리모프가 아마데아호의 실소유주이며, 이 요트를 구입, 공급 또는 유지하는 데 미 달러가 사용됐음을 증명하고자 했다.
슈퍼 요트의 진짜 주인을 추적하려면 구글 검색 그 이상이 필요하다는 게 애덤스 국장의 설명이다.
“실소유주를 추적하는 작업은 매우 까다롭다”는 애덤스 국장은 “미국이 쉽게 접근할 수 없으며 정보가 매우 엄격하게 통제된 국가”에 기반을 둔 유령회사나 신탁 뒤에 숨겨져 있는 경우도 있다고 언급했다.
그러나 러시아가 전쟁을 일으키면서 기업의 소유권에 관한 정보가 “불투명하다고 지금까지 여겨졌던” 국가 등이 정보를 제공하면서 “정보의 붐”이 일어났다고 한다.
애덤스 국장에 따르면 실소유주를 파악하기 위해 요트 관련 재정 알고 있는 소식통을 인터뷰하고, 은행 명세서 및 기업 기록을 샅샅이 뒤지는 등 짧은 시간에 막대한 조사를 진행했다고 한다.
“부분적으론 우크라이나 지지 여론과 반러 제재를 가해야 한다는 공감대가 더욱 커졌기에 이러한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미국 법원 문서에 따르면 수사관들은 케리모프가 미국 재무부의 제재 명단에 오른 지 3년 후인 2021년 8월부터 아마데아호를 소유했다는 증거를 찾아냈다.
“첫째 케리모프가 아마데아호의 소유주라는 것, 둘째 케리모프가 수년간 미국의 제재를 위반하고 손에 넣은 달러로 요트를 샀다는 사실을 알아냈습니다.”
아마데아호가 피지에 정박하자 지역 당국이 수색을 시작했고, 곧 4개월 전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금융 거래 기록을 찾아냈다.
그로부터 몇 시간 뒤 이 새로운 정보를 습득한 FBI 요원들이 미국 판사에게 요트 압류 영장을 신청했다. FBI는 영장에 케리모프를 요트의 “실질 소유자”로 보는 여러 가지 근거를 열거했으나, 이후 공개된 사본에선 미국 정부의 요청으로 세부 사항 대부분이 비공개 처리됐다.
한편 케리모프의 측근들은 BBC와의 인터뷰에서 아마데아호의 소유주라는 의혹을 “부인하며 근거가 없다”고 말했다.
![[출처: BBC] (왼쪽 위에서 시계 방향으로) 아부다비, 하와이, 피지, 터키에서 목격된 아마데아호](https://c.files.bbci.co.uk/10F03/production/_127597396_2amadea-nc.jpg)
아마데아호가 피지에 도착한 지 일주일 뒤, 지역 변호인이 이 요트의 공식 소유주로 등록된 어느 기업을 대리해 영장 집행에 항소하면서 피지 대법원까지 가게 됐고 결국 법적 분쟁이 7주간 이어졌다.
이 변호인은 아마데아호가 범죄로 인한 수익임을 뒷받침할 증거가 없다면서 요트의 실소유주는 케리모프가 아닌 다른 러시아 올리가르히라고 주장했다.
그가 가리킨 인물은 예두아르트 후다이나토프로, 러시아 국영 석유 기업 ‘로스네프트’의 전 CEO이다.
지난 6월 EU는 후다이나토프가 현재 러시아에서 가장 큰 민간 석유 회사 중 하나를 소유하고 있다면서 제재 대상에 추가했다. 후다이나토프는 현재 미국의 제재 대상은 아니다.
이 변호인은 피지 법원에 후다이나토프가 아마데아호의 소유주라는 “부정할 수 없는 증거”가 있다고 주장했다.
한편 후다이나토프는 이탈리아 당국이 푸틴 대통령과 연관된 것으로 보고 동결한 7억달러짜리 요트의 소유주로도 등록된 인물이다. 그러나 미 당국은 후다이나토프는 해당 요트의 진짜 주인을 감추기 위한 “허수아비”인 것으로 본다.
애덤스 국장은 “그렇게 거물급도 아닌 기업가가 이런 초호화 요트를 몇 대씩 소유하고 있다는 건 믿기 힘들다”고 말했다.
후다이나토프는 이에 대해 아무런 답을 내놓지 않고 있다.
![[출처: Getty Images] 술레이만 케리모프 러시아 상원의원(왼쪽)은 아마데아호의 소유주가 아니라고 부인한다](https://c.files.bbci.co.uk/4E01/production/_127496991_gettyimages-1159959066-1.jpg)
아마데아호가 피지의 푸른 바다에 정박해 있던 5월 초, 결국 FBI 요원들이 들이닥쳤다. 뙤약볕 아래 하얀 폴로 셔츠를 입은 선원들이 갑판에서 기다리는 동안 어두운색의 정장을 입은 요원들이 아마데아호에 올라탔다.
애덤스 국장은 아마데아호가 “아주 단단히 정박해 있었다”고 덧붙였다.
요원들은 요트 안에서 샹들리에, 금장식품, 값비싼 예술품 등 온갖 사치품을 발견했다. 이러한 사치품의 총가치는 여전히 계산 중이며 유명 예술 작품의 진위 또한 아직 조사 중이다.
이 중에서도 아주 호화롭게 장식된 달걀모양 장식품이 단연코 눈에 띈다. 부와 권력의 상징으로 러시아 황실 일가만을 위해 수십 개 정도만 제작된 것으로 알려진 ‘파베르제의 달걀’을 닮았다.
이에 대해 애덤스 국장은 “진짜 파베르제의 달걀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면서 “시간이 지나면 알게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한편 아마데아호가 피지섬의 선적 컨테이너 옆에서 묶인 지 거의 2달이 흘렀을 무렵, 피지 대법원은 결국 미국의 편을 들어주며 배를 압류해갈 수 있게 했다.
국제 사회의 관심도 아마데아호에 쏠렸다.
대법원에서 지난 6월 판결이 나오자 피지 경찰청장은 아마데아호 갑판에서 미 대사관 관계자들과 함께 사진을 찍었다.
케이맨제도의 깃발이 펄럭거렸던 아마데아호엔 이제 미국의 성조기가 달렸다.
Successful collaboration efforts between
&
has seen authorities hand over the Superyacht Amadea to @USEmbassySuva officials this afternoon after a Supreme Court ruling gave the green light for the vessel to leave Fiji waters. pic.twitter.com/XtXpS9stM1
— Fiji Police Media (@fiji_force) June 7, 2022
미국으로 향하기 전 애덤스 국장은 아마데아호의 승무원을 교체하기로 결정했다. “믿을 수 있는” 사람들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3주간 항해한 끝에 6월 27일 아마데아호는 샌디에이고 만에 진입했고 미 본토에 도착했다.
클렙토캡처팀에겐 자랑스러운 순간이었지만, 이는 “향후 미국에서 전개될 상황의 시작점에 불과하다”는 게 애덤스 국장의 설명이다.
“아직 끝이 아닙니다.”
애덤스 국장은 “미 당국의 궁극적인 목표는 이 요트를 판매하는 것”이라면서 “우크라이나에 자금을 제공하기 위해서”라고 덧붙였다.
그러기 위해선 우선 케리모프가 요트의 실소유주이며, 요트 구입 과정에서 제재를 위반했음을 법원에 증명해야 한다.
증명 자료를 만들기 위해 조사관들은 은행 기록과 전자 통신 기록 등 “테라바이트 단위의” 데이터를 분석하는 한편, 러시아 언어학자들을 동원해 재무 문서를 조사하고 있다.
한편 특별조사팀의 감시망에 걸려든 슈퍼 요트는 아마데아호 뿐만이 아니다.
아마데아호가 피지에 도착하기 며칠 전 FBI 요원들은 스페인 경찰과 협력해 9000만달러짜리 ‘탱고(Tango)’호를 압류했다. 제재 대상인 또 다른 억만장자 빅토르 벡셀버그의 소유다.
현재 탱고호는 스페인 마요르카섬에 묶여 있지만, 애덤스 국장은 우크라이나 재건을 돕기 위한 자금 마련을 위해 이 또한 팔 수 있길 바란다.
한편 유럽의 전문가들은 탱고호와 아마데아호 관련 소식을 예의주시하고 있다. 유럽과 미국의 법 집행 방식 차이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사실 영국에 있는 한 대를 포함해 유럽에도 올리가르히와 연루된 슈퍼 요트 여러 척이 잡혀있다. 하지만 이들 요트는 압류보단 동결됐다고 보는 편이 맞다.
영국의 싱크탱크 ‘왕립연합서비스연구소’ 소속 ‘금융 범죄 및 보안연구센터’의 톰 키팅 소장은 “원칙적으로 자산을 동결하기만 한다면 언젠가는 소유주에게 돌아간다”면서 “(반면) 자산이 압류되면 소유주는 자산을 영원히 잃게 된다”고 설명했다.
미국엔 제재 회피를 막고 자산을 압류할 수 있는 법적 장치가 오랫동안 마련된 상태이나, 영국과 EU는 동결된 자산을 압류할 수 있는 “법적 메커니즘 마련을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다”는 게 키팅 소장의 설명이다.
한편 영국은 러시아의 침공 이후 올리가르히 120여 명을 포함해 1200명을 제재 대상에 올렸다. 이들의 순자산을 합하면 1300억파운드를 넘을 것으로 추산된다.
그러나 초점은 자산 동결 과정에 집중됐다.
지난 3월 그랜트 샵스 영국 전 교통장관은 3800만파운드짜리 슈퍼 요트 ‘파이(Phi)’호가 국가범죄청(NCA)에 억류되는 장면을 촬영한 영상을 공개했다.
샵스 전 장관은 “러시아에서 권력과 부를 상징하던 요트가 푸틴 대통령과 그의 측근을 겨냥한 분명하고도 엄중한 경고가 됐다”고 의미를 부여했다.
그런데 파이호 억류와 관련해 영국의 법은 다른 동맹국의 법보다 더 폭넓게 적용됐다.
파이호의 소유주인 세르게이 나우멘코는 그 어떤 국가의 제재 대상에도 이름을 올리고 있지 않다. 그러나 영국의 법은 단순히 러시아와 관련된 인물이 소유하거나 운영한다는 이유만으로도 선박을 묶어둘 수 있다고 명시한다.
한편 파이호의 선장인 가이 부스는 나우멘코는 “올리가르히가 아니”라면서 “알려진 것과 달리 푸틴 대통령과 가까운 친구도 아니”라고 말했다.
“만약 올리가르히의 요트였다면 4배는 더 커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부스 선장은 파이호 억류 작전이 여론 홍보를 위해 “꾸며진” 무대처럼 보였다면서, 샵스 장관이 “사자를 사냥한 사냥꾼처럼 포즈를 취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영국 교통부는 파이호 억류 결정은 옳았다면서 영국은 “러시아에 대한 경제적 압력을 높이고, 러시아 엘리트들의 삶을 힘들게 하도록 가능한 범위에서 계속 행동할 것”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부스 선장은 “언젠가 파이호는 템스강을 따라 항해할 수 있을 것”이라며 여전히 긍정적인 태도를 잃지 않았다.
한편 서방 국가들이 동결 자산을 압수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면서 애덤스 국장은 더 많은 국가가 미국처럼 “공격적으로” 압수에 나서길 기대하고 있다.
애덤스 국장은 “러시아에선 부패로 이득을 취하면서 동시에 서방 세계에서 사치스러운 삶을 즐길 수 있는 개인들이 도망치지 못하게 막고 싶다”고 밝혔다.
실제로 우크라이나 전쟁 전 아마데아호는 대부분 시간을 유럽에서 보냈다. 데이터 정보 업체인 ‘스파이어 글로벌’의 자료에 따르면 모나코, 마르세유, 몬테네그로 등에 머물렀다고 한다.
그러나 현재 아마데아호는 낡은 자동차 운송선들이 이용하는 분주한 화물 터미널에서도 구석에 정박해있다.
그 근처에 있는 시민 공원을 이용하던 지역 주민들은 SNS에 아마데아호 사진을 찍어 공유하기 시작했다.
어떤 시민은 “아마데아호를 지역 노숙자들에게 개방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우크라이나 난민들을 돕기 위해 팔았으면 좋겠다”는 의견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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