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 전에 등장한 “블루 스페이스(강이나 바다 같은 파란색 공간)”가 건강에 도움을 준다는 이론이 최근 정신 건강 분야에서 활발하게 활용되고 있다.
배는 바다 위 바위 사이를 매끄럽게 질주했다. 얼굴을 간지럽히는 바람과 멀리서 들려오는 갈매기 울음. 구명조끼를 입고 갑판에 나온 여섯 명은 “마음 챙김”을 시작하기 위해 눈을 감았다. 이들은 커다란 돛을 단 120피트(37m) 길이의 요트, 아이린호로 영국 콘월 해안을 순항 중이다.
최근 10년새 이 같은 마음 챙김 훈련이 널리 확산되고 있다. 보통 가정이나 심리치료사의 상담실에서 훈련을 진행하지만, 이처럼 바다 위에서 하는 프로그램도 등장했다.
아이린을 운영하는 영국 자선 단체 ‘시 생츄어리’는 마음 챙김 치료을 해양 활동과 함께 하면 정신 건강 측면에서 특별한 효과를 얻을 수 있다고 말한다. 그래서 이들은 지난 2006년부터 콘월 해안을 여행하는 프로그램을 통해 ‘블루 헬스’를 운영하고 있다. 블루 헬스란 강이나 호수, 바다 같은 블루 스페이스에 들어가거나 그 인근에서 건강을 증진하는 것을 말한다.
이 프로그램을 찾는 이용자 중 많은 이들은 불안과 우울증에 시달리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배 위에서 치료사의 치료를 받는 한편, 심리 상태를 관리하는 새로운 기술을 배우기 위해 프로그램에 등록한다. 자선단체나 사회복지사로부터 추천을 받기도 하고, 자발적으로 찾아오기도 한다.
전직 경찰관인 스티브 리홀스 역시 시 생츄어리의 항해 프로그램으로 PTSD(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와 불안감을 다스리고 있다.
그는 “절벽과 다리에서 자살하려는 사람들을 말리고 자동차 사고를 당한 사람들을 만나는 게 내 일이었다”고 말했다. “보고 싶지 않은 장면들을 봤습니다. 제 PTSD 대부분은 그 상황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무력감 때문에 생겼죠.”
리홀스는 지난 2014년 정신 건강 문제로 경찰 일을 그만뒀다. 그리고 지금은 주로 콘월 강이나 만에서 카누를 타며 시간을 보낸다. 그는 마음을 진정시키고 정신 건강을 회복시키는 데 바다가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말했다.
약 30만 년 전 호모사피엔스의 진화 당시, 인류는 호수와 강을 낀 초원과 숲에서 살았다. 대다수의 인류가 도시에 거주하게 된 것은 2007년에 이르러서다. 하지만 도시화가 확산되면서 자연을 접촉하는 일은 점점 줄어들고 있다.
인간과 자연의 상호 작용이 사라지는 것은 정신 건강 문제 증가와 관련이 있다. 인류의 정신적, 육체적 건강이 본질적으로 자연과 관련되어 있을 보여주는 증거가 점점 더 늘어나고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눈으로 자연을 보는 것만으로도 코르티솔 분비, 혈류, 혈압, 뇌 활동 측면에서 긍정적인 변화가 나타난다는 연구가 있다. 또한 자연 속 미생물과 접촉하면 면역 체계가 훈련된다. 피부와 기도 및 내장에 유익한 미생물 군집이 한층 강화되는 것이다.
그런데 최근 많은 전문가들이 호수와 강 같은 블루 스페이스가 녹지보다 훨씬 더 장점이 크다고 말하고 있다.
뉴질랜드 웰링턴 빅토리아 대학에서 건강 심리를 연구하는 케이트 캠벨은 “블루 스페이스는 일상의 번잡함에서 우리의 마음을 떼어내고 머리를 식혀준다”고 말했다. “부서지는 파도 소리, 공기의 짠 내, 발가락 아래에서 모래가 부서지는 소리… 몸으로 느껴지는 감각이 우리를 이완시키고 긴장을 끄게 해주죠.”
캠벨은 인류는 진화 과정에서 자신을 도와주었던 자연을 향한 “내재적 끌림”을 갖고 있다고 믿는다. 전근대 시대에 인간에게 음식과 편안함, 안전을 제공했던 자연이 오늘날 도시화된 세상에서도 비슷한 편안함을 줄 수 있다는 것이다. 캠벨은 블루 스페이스에서 시간을 보내는 것은 “집으로 돌아온” 것처럼 느껴질 수 있다고 말했다.
블루 헬스 개념은 약 10년 전 서식스 대학 연구팀이 2만 명을 대상으로 다양한 상황에서 생기는 감정을 연구한 것에서 나왔다. 연구팀은 100만 개 이상의 답변을 수집했다. 그랬더니 사람들은 블루 스페이스에 있을 때 가장 행복감을 느끼는 것으로 나타났다.
최근 글래스고 칼레도니언 대학(GCU) 연구팀도 블루 스페이스에 있으면 스트레스와 불안, 비만, 심혈관 질환, 조기 사망 가능성이 낮아진다고 발표했다.
이 연구의 공동 저자인 니암 스미스는 블루 스페이스에서 시간을 보내는 것이 정신 건강을 포함한 제반 건강에 영향을 미친다고 말했다. 구체적으로 체질량 지수와 사망 위험 감소와도 관련성을 보였다는 것이다.
스미스는 “사람들은 치유 효과를 가진 공간을 가치있게 평가한다”고 말했다. 물 흐르는 소리, 조용히 앉아서 생각할 수 있는 곳, 바쁜 일상에서 머릿속을 비울 수 있는 장소를 좋아한다는 것이다.
“블루 스페이스가 건강에 도움을 주는 방식은 네 가지입니다. 신체 활동을 높이고 스트레스 줄여줍니다. 사회화를 위한 공간을 제공하면서 정신 건강에 영향을 주는 환경적 요인가지 제공해 줍니다. 나무가 늘어선 강에서, 그늘을 즐길 수 있는 게 한 예입니다.”
블루 스페이스가 건강에 좋다는 것은 증거가 이미 많이 나오다 보니, 의사가 이를 처방에 활용하기도 한다.
블루 처방
웨스트 런던에 있는 자택에서 만난 하룬 아크타르는 “나는 주기적으로 우울증을 앓는다”고 말했다.
현재 스물일곱 살인 그는 약 10년 전 경계성 인격장애와 ADHD, 우울증, 불안 진단을 받았다.
그는 “우울한 감정이 시작되면, 그 상태를 벗어나는 데 3~4일 정도 걸린다”고 했다. “나는 잠만 자고 (사랑하는 가족이지만) 가족을 포함한 모든 사람을 무시하게 됩니다. 밥도 안 먹고, 사람들 앞에 거의 나타나지 않아요.”
수년간 아크타르는 다양한 치료를 받았다. 하지만 큰 효과를 보지 못했다. 그러다 지난 6월, 주치의로부터 ‘블루 처방 프로그램’을 추천 받았다. 자선단체인 ‘야생조류와 습지 신탁(WWF)’이 운영하는 프로그램이었다.
첫날에는 큰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하지만 두 번째 날 프로그램이 끝날 무렵, 아크타르는 다음 회차를 기다릴 수 없을 정도로 이 프로그램에 빠졌다.
편부모와 장기 코로나 환자, 만성 질환자, 정신 건강에 문제가 있는 이들이 WWT가 런던 습지 센터에서 운영하는 6주 프로그램의 주 대상이다.
참가자들은 일주일에 한 번씩 가이드와 함께 습지를 산책한다. 조류 관찰과 점토 빚기, 허브 차 시음, “향기나는 칵테일” 만들기 등 감각을 일깨우는 활동도 진행된다.
WWT의 파트너인 정신건강재단(MHF)에 따르면, 참여자 중 65%가 물에 가까이 있게 된 후로 정신 건강이 나아졌다고 답했다.
조나단 리브 WWT 연구원은 “사람들이 정신적으로 쉴 수 있는 환경을 찾을 때 블루 스페이스를 선호하는 것으로 나타났다”고 말했다. 리브는 물이 많은 환경은 삶의 숨가쁜 풍경과 소리보다 인지 측면의 부담이 적고, “쉽게 빠져들 수 있다”고 말했다. “멍하니 물결을 보고 있는 일은 굉장히 쉽잖아요.”
아크타르는 물가에 나온 뒤로 마음이 “풀어지고 쉴 수 있게” 됐다고 말했다. “이젠 우울할 때마다
한 걸음 물러서서 숨을 깊게 쉬게 됐어요. 침대에서 나흘씩 끙끙대던 게 하루나 이틀로 줄었죠. 놀라운 변화입니다.”
올해부터 엑시터 대학은 WWT 및 MHF의 블루 처방 팀과 협력해 특별한 타당성 조사를 시작했다. 의약품을 평가하는 방식으로 자연의 치료 효과를 평가하는 것이다. 이 조사를 성공하면, 엑시터 대학은 향후 몇 년간 자연 처방에 대한 전면적 임상 시험도 진행할 계획이다.
리브는 블루 스페이스를 의학적으로 조명하면, 여러 건강상의 문제를 예방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우리의 보건 시스템은 압도적으로 발생한 문제를 치료하는 것에만 편중되어 있다”고 말했다. “우리는 예방과 건강 증진에 더 많이 투자해야 합니다. 블루 스페이스를 늘리면 건강뿐만 아니라 기후 위기, 도시의 생존 가능성, 홍수, 수질, 생물 다양성, 지역 사회 응집력 등에서도 긍정적인 효과를 얻을 수 있죠.”
물 소리만으로도 스트레스를 완화할 수 있다.
인간의 집중에는 크게 두 종류가 있다. 하나는 우리가 차를 운전할 때 하는 것처럼 “의도된” 집중이다. 다른 하나는 먼 곳에서 일어난 소음이나 지나가는 구름을 보는 것처럼 “비자발적” 집중이다. 물 소리는 이러한 비자발적 집중을 부드럽게 끌어내 우리의 정신을 쉬게 해준다.
강물의 흐름과 해변을 씻어내는 파도 소리는 “핑크 노이즈”에 속한다. 핑크 노이즈는 백색 소음처럼 사람들이 귀로 들을 수 있는 주파수에 있지만, 그 소리는 크지 않다. 이러한 핑크 노이즈는 잠을 잘 오게 하고 기억력을 향상시켜주는 것으로 밝혀졌다.
일부 전문가들은 물에 들어가는 것도 치유 효과가 있다고 말한다. 수영이나 서핑 같은 몰입 활동이 자연 환경과 연결되어 있거나 자연의 일부라는 느낌을 준다는 것이다.
비영리 환경 재단 ‘마운틴 투 시 웰링톤’은 뉴질랜드 타푸테랑가 해양 보호구역에서는 마오리족 청년들을 대상으로 바다와 어우러지는 프로그램을 운영중이다.
보통 어린 자녀를 둔 가족들은 하루를 전쟁같은 보내며 살아간다. 그러다 보니 가족 단위의 바다 여행을 한 번도 못 가보는 경우도 많다. 하지만 이곳에서는 호기심어린 물고기 떼가 이리저리 헤엄치고, 해초와 바위 사이에 숨은 외계인 같은 생명체를 볼 수 있다. 햇빛이 해조류 밭에 닿아 굴절로 만들어진 무지개는 해초가 방출하는 거품에 반영된다. 그리고 수면 위로 올라오면 멀리 뉴질랜드 남섬의 우뚝 솟은 산맥이 한 눈에 들어온다.
니콜 밀러 타푸테랑가 해양 보존구역 회장은 “(이곳에선) 가재, 모습을 감춘 생물들, 다채로운 빛깔의 말미잘, 문어 등을 볼 수 있다”고 말했다. “풍부한 해양 생물을 가까이서 보는 건 특별한 일이죠. 스노클링을 하며 다양한 물 속 생물을 만나보면 삶이 달라질 수 있습니다.”
이런 식으로 바다에 들어가는 것은 타마리키(마오리 아이들)에게 자연 환경과 깊은 유대감 및 성취감, 자부심, 미래에 대한 희망을 심어준다.
처음 타푸테랑가 해양 보존 구역에서 스노클링을 경험한 한 학생은 밀러에게 “해양 보호 구역에서 수영을 하다가 많은 물고기와 전복, 가재를 봤다”며 “영혼이 치유되는 장소였다”고 말했다.
도시의 물
더 많은 사람들에게 블루 헬스를 주기 위해 전문가들 중에는 도시에서 물이 많은 공간을 재발견하거나 만드는 것에 관심을 두는 이들이 있다.
전 세계 인구의 약 40%에 해당하는 약 24억 명이 바다에서 100km 이내에 살고 있다. 강가나 호숫가에 사는 이들도 많다. 그러나 접근성이나 오염때문에, 사람들은 블루 스페이스의 장점을 누리지 못하고 있다.
그러던 중 2016년 유럽에서 ‘블루 헬스’라는 연구 프로그램이 시작됐다. 도시 공간에 ‘블루 인프라’가 있을 때 건강에 어떤 장점이 있는지를 연구하는 프로그램이다.
프로그램에는 전염병학자, 공중보건 전문가, 도시 계획가 등이 대거 참여해 다양한 실험을 진행했다. 영국 플리머스에서 진행된 프로젝트에선 낡은 도심 공간을 대중에게 개방된 블루 스페이스로 바꿨다. 강으로 이어지는 길을 만들거나 작은 부교나 앉을 곳을 설치하는 등의 작은 변화로도 지역 사회 분위기가 상당히 달라졌다. 지역 주민 및 방문객은 이러한 변화 이후 더 긍정적인 감정 상태를 갖게 됐고 삶의 만족도가 올라갔다고 답했다.
엑시터 대학 전염병학자인 제임스 그렐리어는 이러한 결과가 정책 입안자들에게 “중요한 메시지”를 던지리라 생각한다. 하지만 그는 블루 스페이스의 이점이 해당 공간의 질에 크게 달려있다고 말했다.
“블루 스페이스는 생태계의 건강뿐만 아니라 방문자들의 건강에 잠재적 영향을 미칩니다.” 하지만 버려진 쇼핑 카트로 가득 찬 적갈색 운하는 양질의 블루 스페이스와 같은 효과를 보여주지 못했다. 그렐리어는 “고급 주택단지에 마련돼 사람들의 접근을 막는 인공 호수도 효과가 없다”고 말했다.
그런데 최근 도시 거주자를 위한 대규모 블루 헬스 공간이 만들어졌다. 잉글랜드 남서부에서 가장 인구가 많은 브리스톨, 그 외곽에 있는 30헥타르 규모의 “웨이브 가든”은 내륙에서 서핑을 경험할 수 있는 특별한 곳이다.
이 인공 호수에서는 “완벽한 파도”가 차례로 밀려온다. 스릴을 즐기는 사람들을 위한 놀이터일 뿐만 아니라, 도시에 사는 어린이와 종교집단, 재향 군인 및 장애인 등 모두가 “서핑 테라피”를 즐길 수 있는 곳이다.
올해 웨이브 가든은 사회 공헌 단체 ‘오픈 마인드 액티브’와 협력해 영국 내 무슬림 여성 대상 6주간의 서핑 프로그램을 만들었다. 적절한 서핑 복장과 여성 강사, 남녀가 구분된 장소에서 진행되는 서핑 강습 등을 프로그램에 담은 것이다.
이 프로그램에 참여한 사라 아흐메드는 문화적 장벽에도 불구하고 서핑을 편하게 즐겼다고 했다. “머리에 두르는 스카프와 긴 드레스 때문에 서핑이 나에게 맞을까 걱정했는데, (서핑을 배운 건) 잘한 일인 것 같아요.”
아흐메드는 브리스톨 교외에 산다. 하지만 이제 그의 가족에겐 자연으로 나가는 것이 더할 나위 없이 중요해졌다.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호수는 항상 갈 수 없는 곳이었어요. 그 안에서 수영을 할 수 있다는 생각은 해보지도 않았고요. 하지만 이제는 아이들이 물을 즐길 수 있도록 더 많은 여행을 계획하고 있죠.”
블루 스페이스를 찾는 사람들이 늘면서, 공공 안전 측면에서 고려해야 할 것들이 있다. 수영을 잘하는 이들에게도 물은 항상 위험한 곳이다. 조수와 수온, 해류를 판단하는 게 까다롭기도 하다. 또한 영국에서는 수로 오염 문제도 점점 커지고 있다. 의회에서 최근 영국의 강을 슬러리와 농업 폐기물, 하수의 “칵테일”이라고 묘사했을 정도다. 실제로 2019년 조사에서 생태적으로 ‘좋다’는 평가를 받은 곳은 영국 내 강들 중 14%에 그쳤다.
그러나 다이빙을 하든 물가에서 휴식을 취하든, 블루 헬스 관련 연구들은 블루 스페이스가 우리의 몸과 마음에 유익한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계속해서 증명해내고 있다.
다시 콘월로 돌아가 보자. 앤디 손튼은 바다 생추어리 항해 자격을 갖춘 치료사다. 그는 항해 참여자들이 항해 중에 무엇을 얻고 어떤 것을 향후 스트레스 상황에 활용할 수 있는지를 연구하고 있다. 영국 건강관리국에서 30년 넘게 일했던 그는 자연에 초점을 둔 자선 단체의 “포괄적 접근 방식”이 기존 치료법보다 저렴하고 균형 잡힌 대안이라고 확신하고 있다.
그는 “바다의 색깔과 움직임, 경외심을 불러일으키는 그 규모에는 무엇인가가 있다”고 말했다. “사람들은 바다 위를 항해하는 동안 눈에 띄는 변화를 경험하고 그 변화를 집으로 가져갑니다. 정말 엄청난 일이죠.”
- 이집트의 ‘가장 유명한 수감자’ 알라 압둘 파타흐
- 매일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나는 영국의 ‘민치에르 군도’
- 9시부터 5시?… 생산성의 개념을 바꾸는 ‘비선형 업무 시간’
- 이태원 참사로 우리가 알게된 것들…’위기상황서 작은 도움도 큰 힘’
- 퀴즈: COP27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