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29일 발생한 이태원 참사로 158명(16일 기준)의 젊은이들이 사망했다.

이들 중에는 한국을 제외한 14개국 출신 26명의 외국인도 포함됐다.

이태원 일대는 평소에도 많은 외국인이 찾는다. 또 이국적인 음식점과 상점, 대사관, 종교 시설 등이 밀집해 있는 한국의 대표적인 다문화 지구다.

지난 이태원 참사는 당일 현장에 있었던 외국인뿐 아니라 이태원 일대에서 오랫동안 거주하거나, 장사나 공연 등으로 생업을 이어가는 외국인들에게도 큰 충격으로 남았다.

매년 즐기던 핼러윈, 올해 비극 상상도 못해

남아프리카 공화국 출신으로 서울에서 직장생활을 하고 있는 크리스(가명)에게 이태원 핼러윈 축제는 친구들과의 연례행사였다.

크리스는 친구들과 매년 핼러윈 주말에는 이태원역 앞 해밀톤 호텔에서 숙박하며 축제를 즐겼다고 한다.

그는 “친구들과 함께 핼러윈 의상을 입고 해밀톤 호텔이나 주변에서 함께 술을 마시기도 하고 일대를 걸으며 멋진 의상을 입은 다른 사람들의 사진을 찍기도 한다”며 “줄곧 이렇게 핼러윈을 기념해왔다”고 말했다.

사고 발생 당일, 그는 밤 10시가 되어갈 무렵 이태원역에 도착했다. 사람이 너무 많았지만 인파에 휩쓸려 겨우 호텔까지 갈 수 있었다. 호텔에서 친구들을 만난 그는 일행과 함께 다시 거리로 나왔다.

하지만 크리스 일행은 사고 발생 골목 부근에 이르러 무언가 잘못됐음을 알아차렸다.

크리스는 “사람들 틈에 끼여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 수 없었지만 일행 중 키가 정말 큰 미국인 친구가 우리 앞쪽에 심상치 않은 상황이 발생했다는 것을 볼 수 있었다”며 “그 친구가 나와 또 다른 내 친구를 사람들 틈에서 끄집어냈다”고 말했다.

크리스는 “바로 그때 쓰러진 사람들이 보였다”며 “상황이 점점 급박해지더니 경찰이 도착하고 사람들이 깔린 사람들을 끄집어내 CPR(심폐소생술)을 하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뒤늦게 찾아온 트라우마

그날 밤 크리스 일행은 호텔로 돌아와 지하철 첫차를 기다리며 밤새 TV로 사고 관련 뉴스를 봤다.

크리스는 “처음 뉴스에서는 사망자 수가 두 명이라고 했지만 우리 중 아무도 그 말을 믿지 않았다”며 “쓰러져 있는 사람들을 봤을 때 적어도 15명에서 30명은 넘을 것 같았다”고 말했다.

크리스 일행이 집으로 돌아간 사이 사망자 수는 150명에 이르렀다.

그는 “집으로 돌아왔을 때 아무런 느낌도 들지 않았다”면서 “마치 마취 상태에 있는 것 같이 어떤 감정도 느낄 수 없었고 너무 피곤했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스스로 괜찮은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며 “월요일(지난달 31일)부터 감정 상태가 불안정했다”고 말했다.

함께 사고 현장에 있었던 친구들도 사고 직후 며칠이 지나고 나서야 정신적 트라우마를 호소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크리스는 최근 “직장 동료와 커피숍에 가던 중 길 한복판에서 갑자기 크게 울음을 터뜨렸고 몸 전체가 떨렸다”고 말했다.

매일 출퇴근하던 길을 바꾼 사라

크리스처럼 직접 사고를 목격하지 않았더라도 이태원 일대에 거주하는 외국인들에게 이번 사고는 큰 충격으로 남았다.

튀니지 출신 사라(가명)는 이태원 사고 피해자들의 유실물을 보관했던 한남동 주민센터 인근에 거주하고 있다.

사고 발생 전 사라는 평소 출퇴근 시 가까운 이태원역을 이용했다. 하지만 사고 이후부터는 조금 더 돌아가더라도 6호선 한강진역을 이용하고 있다. 그는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일상으로 돌아가기에는 너무 큰 충격을 받았다”고 말했다.

사라는 사고가 발생 당일 저녁 6시께에도 이태원역을 이용했다. 그는 이날 애초 친구와 이태원에서 만나려 했지만 사람이 지나치게 많아 계획을 바꿨다.

사라는 사고 당일 밤 “친구와 시간을 보내고 집으로 돌아오던 길에 ‘해밀톤 호텔 근처에서 사고가 났다’는 문자 알림을 받게 됐는데 공교롭게도 막 이태원역에서 내리려던 참이었다”며 “문자를 보고 그 근처로 가면 안되겠다는 생각에 다음 역인 한강진역에서 내리게 됐다”고 말했다.

사라는 “집으로 돌아온 후 아침 6시까지는 쥐죽은 듯이 고요했지만 그 때부터 경찰 사이렌 소리, 병원 구급차 앰뷸런스 소리가 다 들려 아주 가까이에서 큰 사고가 났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며 “너무나 충격적이었다”고 말했다.

‘트라우마 서로 계속 이야기하며 극복해야’

이태원 사고 현장에 있었거나 일대에 거주하는 외국인들은 이번 사고로 인한 트라우마에 대해 “계속 서로 이야기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관련 주제에 대해 주변 사람들과 충분히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트라우마 극복에 도움이 된다는 것이다.

캐나다 출신으로 서울에서 배우로 활동하는 조쉬 뉴튼 역시 사고 당일 현장에서 끔찍한 상황을 목격했다.

그는 “나와 주변 사람들이 트라우마를 마주하는 과정에서 가장 걱정되는 부분이 이 트라우마가 표출되지 못하는 것”이라면서 “사람들이 감정을 안으로만 숨기면 우울증에 걸리거나 일생동안 지속될 수 있을 만큼의 부정적인 영향을 받을 수도 있을 것”이라고 우려를 전했다.

뉴튼은 학창시절부터 트라우마에 대해 공부하는 친구들과 관련 주제로 많은 대화를 했다며 “트라우마에 감정이 반응하는 방식은 사람마다 다르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혼자서 트라우마를 관리하는 것은 절대 좋은 생각이 아니라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사고 현장을 목격한 후 주변 사람들도 트라우마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장려하고 있다. 이를 위해 인스타그램을 통해 자신의 영상을 공유하기도 했다.

그는 “모르는 사람들이 인스타그램을 보고 도움을 요청하기도 했다”며 “친절하게 내 안부를 물어주는 사람들도 있어 힘이 됐다”고 말했다.

한편 그는 대한적십자회에 외국인들을 위해 영어로 진행되는 CPR 교육 과정 개설을 요청하기도 했다.

커피 판매와 공연으로 기부금 마련

해방촌 일대에 거주하는 외국인 커뮤니티 일원들은 사고 이후 각자의 방식으로 서로를 위로하고 트라우마를 극복해가고 있다.

커피 브랜드 사업을 하는 미국 텍사스 주 출신 조슈아 홀도 이태원 사고 당시 현장에 있었다.

그는 “군에 복무하며 대민 지원 업무를 담당했던 경험이 있기 때문에 이와 같은 상황에서 돕고 싶은 마음이 컸지만 합법적인 행동인지 알 수 없었고 현장에 있던 경찰이나 구급대원들에 방해가 될까 그냥 돌아와야 했다”면서 “집으로 돌아와 내가 도울 수 있는 방법에 대해 생각하다가 앞으로 몇 주 간은 커피 판매 수익 전부를 사고 희생자와 피해자들을 돕는 데 쓰기로 결정했다”고 말했다.

[출처: BBC] 지난 3일, 해방촌 팝업스토어에서 커피 판매로 이태원 사고 피해자를 돕기 위한 기부금 모금을 하고 있는 조슈아 홀
[출처: BBC] 지난 3일, 해방촌 팝업스토어에서 커피 판매로 이태원 사고 피해자를 돕기 위한 기부금 모금을 하고 있는 조슈아 홀

그는 “사고 이후 단골 고객들이 커피숍에 와 트라우마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한다”며 “우리 커피점이 전문 상담 혹은 치료기관은 아니지만 그와 비슷한 기능을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해방촌에 거주하는 미국 조지아 주 출신 헤일리 베커도 홀의 성금 모금을 적극 동참하고 있다. 그는 “이태원에는 2년 전 해방촌으로 아예 이사를 오기 전부터도 자주 놀러오곤 했다”며 “이태원은 고향에서 자라온 다양성 있는 분위기를 느끼게 해주는 곳이라 집처럼 느껴진다”고 말했다.

베커는 “사고 이후 너무 많은 뉴스들이 책임 공방에만 집중되어 있는 것 같아 안타깝다”며 “지역 커뮤니티 차원에서 피해 입은 사람들을 돕는 방안을 마련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그는 “(미국에서)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지역 커뮤니티 이웃들이 도와줬던 감사한 기억이 있다”며 “이번 (이태원) 사고로 소중한 사람을 잃은 사람들 역시 많은 도움이 필요할 텐데 장례식 비용과 같은 분은 필요한 여러 부분 중 하나에 지나지 않을 수 있다”고 말했다.

[출처: BBC] 지난 3일, 커피 판매로 이태원 사고 피해자를 돕기 위한 기부금 모금을 하고 있는 해방촌 상인 조슈아 홀의 팝업스토어 모습
[출처: BBC] 지난 3일, 커피 판매로 이태원 사고 피해자를 돕기 위한 기부금 모금을 하고 있는 해방촌 상인 조슈아 홀의 팝업스토어 모습

‘제2의 고향 이태원, 상처 극복할 수 있기를’

해방촌에 거주하며 코미디언으로 활동하고 있는 미국인 크리스틴 핌리(27)는 오는 18일 해방촌의 한 스튜디오에서 이태원 사고 희생자와 피해자들을 돕기 위한 자선 공연을 갖는다.

크리스틴은 이태원 사고에 대해 사람들이 “핼러윈이라는 기념일이나 행사 자체에 비극의 원인을 돌리지 않기를 바란다”며 이 비극이 “외국인들의 탓도 아니고, 기념일을 즐기고자 이태원에 갔던 사람들의 탓도 아니며 단지 제대로 된 준비와 시스템이 부족했던 것”이라고 말했다.

또 “나는 미국에서 9.11 테러의 아픔이 있던 시기 태어났고, 자라면서도 학교에서 일어나는 총기 사건이나 폭탄 테러 위협들을 목격했다”며, “같은 세대로서 내가 도울 수 있는 일을 하고 싶다”고 말했다.

오랫동안 많은 외국인들에게 이태원은 ‘제2의 고향’으로 자리했다.

크리스는 사고를 목격한 트라우마로 “언제 다시 이태원에 갈 수 있을지, 가더라도 이전처럼 즐겁게 있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밝혔다. 다만 “이태원이 이 사고로 무너지지는 않았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한남동에 사는 사라도 “이태원에는 이슬람 사원이나 영어로 운영하는 교회와 같이 외국인들을 위한 종교 시설도 모여 있고 고향의 맛이 그리울 때 갈 수 있는 식당도 있다”며 그 역시 고향 튀니지의 음식이 그리울 때 종종 가는 곳이 있다고 말했다.

이들은 이태원 사고 희생자들을 추모할 수 있는 공간이 필요하다고 강조하면서, 한국 다문화의 상징적인 장소인 이태원이 그 역사를 계속 이어가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홀은 해방촌 커뮤니티 일원들이 “서로 한 다리, 혹은 두 다리 건너 아는 사이일 정도로 끈끈하게 연결돼 있다”며 “모두가 서로 알고 지내기 때문에 더욱 서로 도우며 이번 사고 여파를 극복하려 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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