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Ghazal Farkhari] '스텔싱'이라는 용어를 들어본 적 없는 여성이 많을 수도 있지만, 영국에서 이는 불법 행위이다](https://c.files.bbci.co.uk/E221/production/_127898875_purpledictionary.png)
‘스텔싱’
배우 미케일라 코얼이 각본을 쓰고 제작에도 참여한 ‘아이 메이 디스트로이 유’는 2020년 방영 당시 비평가들로부터 좋은 평을 들었다.
성폭행당한 여성의 이후 삶을 그린 해당 드라마는 여러 시상식에서 좋은 성과를 거뒀을 뿐만 아니라, TV 화면 너머 12000마일(약 1만9312km) 떨어진 현실 세계에서도 파문을 일으켰다.
칠레의 여성 정치인인 마이테 오르시니(34) 하원의원은 특히 주인공 아라벨라가 성관계 중 상대 남성이 말없이 콘돔을 제거했음을 알게 되는 장면을 보고 큰 충격을 받았다.
오르시니 의원은 성관계 중 상대방의 동의 없이 콘돔을 사용하지 않거나 사용을 중단하거나 훼손하는 행위인 ‘스텔싱(stealthing)’이 영국, 독일, 캐나다, 미 캘리포니아주에선 강간으로 분류된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공공안전학과 대학원을 졸업한 변호사이기도 한 오르시니 의원은 “과거엔 스텔싱이 성폭력임을 인지하지 못했다”면서 “이 드라마에서 스텔싱을 묘사한 장면을 보고 나서야 비로소 왜 성폭력인지 이해했다”고 말했다.
칠레에서는 스텔싱이 범죄로 규정되지 않기에 관련 사건에 대한 공식적인 통계는 없었다.
그러나 오르시니 의원은 친구, 지인, 동료 등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이는 국경을 초월한 문제이며, 칠레의 스텔싱 피해자들은 법적 보호를 받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더욱 깨닫게 됐다.
이에 오르시니 의원은 스텔싱에 관한 법률 제정 필요성을 느껴 초안을 작성하기 시작했다.
“(칠레 국어인) 스페인어로 ‘스텔싱’을 어떻게 표현할지 오랜 논쟁을 벌였지만, 저는 (따로 단어를 만들기보단) ‘스텔싱’이라는 용어 자체를 사용하자고 주장했습니다. 왜냐하면 피해자들이 이 개념이 [영어권 등] 외부에서도 사용되고 있음을 알기 바랐을 뿐만 아니라 필요하다면 인터넷에서 관련 정보를 찾을 수 있길 바랐기 때문입니다.”
![[출처: Maite Orsini] 마이테 오르시니 의원이 발의한 스텔싱 법안은 칠레 하원에서 큰 표차로 통과됐다](https://c.files.bbci.co.uk/0FD5/production/_127835040_maiteorsini.png)
오르시니 의원이 발의한 스텔싱 법안은 올해 1월 칠레 하원을 통과해 이제 상원으로 넘어간 상태다. 해당 법안이 최종적으로 통과되면 스텔싱은 칠레에서 처벌가능한 성폭력, 즉 범죄로 규정되게 된다.
이에 대해 트란체스 박사는 여성들이 언어에 대한 힘을 되찾는 방식의 변화로 볼 수 있다고 설명했다.
“사전을 생각해보세요. 누가 편찬하나요? 역사적으로 남성이었습니다.”
“과거 여성은 작가도, 변호사도, 의사도 될 수 없었습니다. 지식이나 (단어의) 의미를 만드는 작업 등은 모두 남성의 특권이었던 거죠.”
오르시니 의원 또한 언어가 성적 학대 피해 여성들에게 중요하다는 점에 동의했다.
“이전엔 이름이 없던 행동에 이름을 붙여야 피해자들이 자신이 피해자임을 인식하는 데 도움이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범죄가 존재한다는 대중의 인식을 높이고 싶기에 스텔싱을 형법으로 금지하고 싶었습니다. 여성과 소녀들이 이러한 피해를 당했을 때 자신들이 범죄의 피해자임을 깨달을 수 있길 바랍니다. 불법으로 규정되면 비로소 신고할 수 있습니다.”
‘다운블라우싱’
![[출처: BBC] 북아일랜드에서 '다운블라우싱'은 최대 징역 2년의 처벌로도 이어질 수 있다](https://c.files.bbci.co.uk/110A5/production/_127879796_downblousng.png)
한편 북아일랜드의 나오미 롱 전 법무부 장관은 언어는 공공장소에서 점점 더 안전하지 않다고 느끼는 여성들의 상황을 포착한다고 설명한다.
지난 3월 롱 전 장관이 발의한 새로운 성범죄 법안이 공식 제정됐다.
해당 법에는 ‘다운블라우싱(downblousing)’ 등 여러 새로운 용어가 등장한다.
‘다운블라우싱’이란 본인의 동의 없이 위에서 바라보는 각도로 여성의 상체 부분에 대한 사진이나 동영상을 촬영하는 행위를 뜻한다.
롱 전 장관은 “이는 특정 종류의 괴롭힘”이라면서 “여성에게 굴욕감을 주고 모욕하고 두려움을 느끼게 하려는 시도”라고 설명했다.
그런데 이전엔 ‘다운블라우싱’이라는 범죄가 법률에 구체적으로 언급되지 않았었기에 피해자와 경찰 모두 사건 이후 어디까지 조치할 수 있는지 이해하기 어려웠다는 게 롱 전 장관의 설명이다.
“매우 괴로우며 불안감 혹은 굴욕감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런데 경찰서에 가서도 그것이 범죄인지 확신하지 못하는 상황인 거죠.”
![[출처: Neil Harrison ] 나오미 롱 전 장관이 발의한 법안은 지난 3월 국왕의 최종 동의를 받아 제정됐다](https://c.files.bbci.co.uk/15EC5/production/_127879798_e6ac6252-480b-4dc8-945c-72949f9ac7bc.png)
한편 롱 전 장관은 ‘다운블라우싱’이라는 용어는 물론 이 용어가 함축하고 있는 의미에 대해서도 논의했다고 밝혔다.
“‘블라우스’라는 용어 대신 ‘셔츠’나 ‘상의’와 같은 용어는 어떨지에 대해서도 논의했으며, 법률에 ‘여성의 가슴’ 혹은 ‘흉부’ 등을 언급할지에 대해서도 약간 논의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사람들이 셔츠를 입은 남성 위에서 사진을 찍으려 돌아다니지는 않는다는 점을 인지하는 게 중요하다고 느꼈습니다.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으니까요.”
한편 북아일랜드가 영국에서 최초로 ‘다운블라우싱’을 범죄로 구체적으로 정의하면서 ‘북아일랜드 법률 위원회’는 잉글랜드와 웨일스에도 동참해주길 요구했다.
“언어는 중요하다”는 롱 전 장관은 “우리가 이러한 행위를 어떻게 묘사하느냐는 중요한 문제”라고 설명했다.
“이를 통해 과거 우리 사회가 옳지 않다는 걸 알면서도 종종 그 이유를 명확히 설명하지 못했던 행위에 이름을 붙일 수 있을 것입니다.”
언어의 영향은?
어떻게 인간이 “이렇게까지 똑똑해지는지” 탐구하는 인지과학자 레라 보로디츠키 교수는 언어가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고 설명한다.
“언어는 우리의 필요에 맞게 바꿀 수 있는, 살아있는 존재”라는 보로디츠키 교수는 “언어가 어떻게 우리의 생각 방식을 형성하는지, 어떻게 우리가 사람들의 생각 방식을 바꾸기 위해 말하는 방식을 바꿀 수 있는지 등을 현실에서 생각해볼 수 있다”고 덧붙였다.
보로디츠키 교수는 사람의 마음, 언어, 현실 사이의 관계, 그중에서도 사회에서 어떻게 의미가 형성되는지 연구한다.
“사건이나 사고 등을 묘사하는 방식을 바꾸면 관련자를 비난하고 처벌하는 방식을 크게 바꿀 수 있다”는 게 보로디츠키 교수의 주장이다.
한편 보로디츠키 교수는 특정 개념에 붙이는 이름이나 용어가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 고려한다면 이러한 용어의 특수성에 대해서도 생각해봐야 한다고도 지적했다.
“예를 들어 과거 성폭행 피해자들은 법정에서 ‘그래서 그건 그가 당신에게 키스했을 때인가요?’와 같은 질문을 받곤 했습니다. (그런데) ‘키스’는 대부분 사람에게 기분 좋은 행위이지만, 낯선 이와 강제로 입술을 접촉해야 하는 행위는 기분이 좋은 일이 아니죠.”
“그래서 이를 ‘강제적인 구강 접촉’ 등의 용어로 바꿔 부른다면 배심원들은 전혀 다른 이미지를 떠올릴 것입니다. 즉 이러한 용어의 특수성은 더 친숙하고 일반적인 단어와는 전혀 다른 감정적 반응을 일으킵니다.”
![[출처: BBC] 여성들은 남편으로부터 성폭력을 당할 수도 있다](https://c.files.bbci.co.uk/E995/production/_127879795_maritalrape.png)
‘부부 강간’
‘뉴 위민 파운데이션’을 이끄는 람야 로프티는 매일 이집트 여성들의 성적 학대 피해 사례를 보고받는다. 부부 강간 사례도 있는데, 이는 신고조차 되지 않은 경우도 있다.
로프티는 “문제는 (피해) 여성들조차 이것이 폭력임을 깨닫지 못할 때도 있다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로프티는 피해 여성들을 위한 조정 세션에도 참석하며 필요할 경우 안전한 쉼터를 마련해주기도 한다.
실제로 세계보건기구(WHO)의 2018년 보고서에 따르면 기혼이거나 파트너가 있는 15~49세 사이의 이집트 여성의 30%가 남편 등의 파트너로부터 육체적, 성적 폭력을 당해본 적이 있다고 한다.
그러나 부부 강간의 피해자들은 대부분 이를 인지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그렇기에 “피해자들이 누구에게 무엇을 신고할 것인가?”라는 게 로프티의 질문이다.
이집트에서 강간으로 유죄 판결을 받으면 종신형 혹은 사형 선고까지 받을 수도 있지만, 이집트 형법은 부부 강간에 관해선 규정하고 있지 않다.
이에 ‘뉴 위민 파운데이션’은 부부 강간을 구체적으로 명명하는 법안의 초안 작성을 돕고 있다. 2차례 제안서를 의회에 제출했으며, 로프티는 원내에서 관련 논의를 시작하길 끈기 있게 기다리는 중이다.
로프티는 “강간은 사회에서 거부되고 처벌되는 행위이기에 부부관계에 ‘강간’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길 꺼리는 이들도 있다. ‘부부 강간’이라는 이름을 붙이면 남성에게 즉각적인 비난이 가해지기에 이 용어와 남성 간의 거리를 떨어뜨리려고 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출처: Lamya Lotfey] 람야 로프티는 여성들이 성폭력의 위험으로부터 안전할 수 있도록 노력한다](https://c.files.bbci.co.uk/03CA/production/_127907900_7f080b4a-954f-4c60-8d30-6f4153a82391.png)
한편 언어의 한계는 정책 결정을 넘어 일상 대화에까지 영향을 미친다는 게 로프티의 주장이다.
로프티는 이미 지난 80년대부터 이집트 인권운동가들이 ‘부부 강간’이라는 뜻의 이집트어인 ‘aghtesab zawgy’를 처음 쓰기 시작했지만, 여전히 이 용어를 사용하는 이는 소수라고 지적했다.
그러나 조금씩 상황이 변하고 있다. 로프티는 2020년 방영된 TV 시리즈 ‘뉴턴의 게임’을 그 계기로 꼽았다. 해당 드라마에는 아내가 남편에게 성폭행당하는 장면이 나온다.
“(해당 장면이 방영된 이후부터) 여성들은 제게 ‘저도 이런 일을 당했어요’라고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심지어 ‘aghtesab zawgy’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이들도 생겨났어요. 어떤 이들은 ‘내가 이런 일을 겪었다고 말하면 사람들이 날 진지하게 받아들여준다는 뜻일까요?”라고 물었습니다.”
“(하지만) 이전엔 마치 부부 강간이 존재하지 않는 일인 것처럼 입막음 당하거나 무시당했습니다.”
한편 트란체스 박사는 언어가 사람들 간 유대감 혹은 공동체 의식을 형성해준다고 언급했다.
“이러한 용어의 사용을 통해 여성들은 자신이 겪는 일이 혼자만의 문제가 아니라 많은 여성들에게 영향을 끼치는, 더 큰 사회 체계적인 문제임을 인지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름을 붙이면 다수가 공유하는 경험이라는 점이 더욱 잘 드러나게 됩니다.”
추가 보도 및 제작: 인마 길, 발레리아 페라소, 사라 아부 바크르
일러스트: 가잘 파르하리
![[출처: BBC]](https://c.files.bbci.co.uk/14F6A/production/_127866858_new100wlogo2022.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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