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베를린에서 펠레와 함께 찍은 사진

Fernando Duarte
‘펠레를 직접 보던 날이면 몇 날 며칠 꿈꾸는 듯했다. 언제나 동경하고 직접 만나길 꿈꿨던 어벤져스 영웅을 만난 듯한 기분이었다. ‘ (2006년 베를린에서 펠레와 함께 찍은 사진)

내가 마지막으로 펠레를 직접 봤던 2015년 3월, 그는 런던 중심부의 어느 서브웨이 매장의 카운터 맞은편에서 샌드위치 안에 내용물을 넣기 위해 애쓰고 있었다.

물론 브라질의 축구 전설이 생활고에 시달려 일하고 있던 건 아니었다.

고국에서 ‘킹 펠레’라고 불리는 펠레는 은퇴 후에도 꾸준히 광고계의 사랑을 받았고, 그날도 미국 패스트푸드 회사의 홍보 일환으로 방문한 것이었다.

사실 이전에도 펠레를 여러 번 만난 적 있다. 그 덕에 펠레는 기자들 사이에서 내가 보이면 활짝 웃어줬다.

펠레와 일대일 인터뷰를 할 수 있다는 점도 행운이었지만, 그날 오후 만난 당시 74세의 펠레가 건강해 보였다는 점이 날 가장 행복하게 했다.

“킹, 입원 소식에 모두 걱정했다”라고 말을 건네자 펠레는 “내가 트레스코라송스(포르투갈어로 ‘3개의 심장’이라는 뜻) 지역 출신인 걸 잊었나. ‘심장이 3개인’ 사람을 땅에 묻는 건 어렵다”며 웃었다.

‘어벤져스 영웅을 만난 것처럼’

1년 앞서 스위스 취리히의 FIFA 시상식에서 펠레를 만났다. 그런데 많이 약해진 모습에 다른 많은 브라질 기자들과 마찬가지로 나 또한 펠레를 진심으로 걱정했다.

알고 보니 펠레는 21년간 축구 생활 내내 겪은 거친 몸싸움으로 상태가 악화해 1970년대부터 이미 신장이 제 기능을 하지 못하며 투병 중이었다.

한편 펠레를 직접 보던 날이면 몇 날 며칠 꿈꾸는 듯했다. 언제나 동경하고 직접 만나길 꿈꿨던 어벤져스 영웅을 만난 듯한 기분이었다.

많은 축구팬들, 특히 브라질 국민들에게 펠레(본명 ‘이드송 아란치스 두나시멘투’)는 역대 가장 위대한 축구 선수이자 영웅 그 자체였다.

1958년 첫 월드컵 우승컵을 안고 눈물 흘리는 펠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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펠레는 아직도 FIFA 월드컵 우승컵을 3번이나 들어 올린 유일한 선수일 뿐만 아니라, 겨우 17세에 1958년 첫 우승컵을 품에 안았다.

존 레논이 만약 로큰롤을 다른 이름으로 바꿔야 한다면 ‘척 베리’라고 바꿔야 한다고 말한 것처럼, 축구의 다른 이름은 ‘펠레’였다고 생각한다.

펠레는 아직도 FIFA 월드컵 우승컵을 3번이나 들어 올린 유일한 선수일 뿐만 아니라, 겨우 17세에 1958년 첫 우승컵을 품에 안았다.

12년 뒤인 1970년에 열린 멕시코 월드컵에서도 펠레는 브라질을 승리로 이끌었다. 당시 브라질 국가대표팀은 아직도 역사상 가장 위대한 축구팀으로 언급된다.

당시 결승전에서 브라질과 맞붙은 이탈리아의 수비스 타르치시오 부르니치는 펠레의 활약에 대해 최고의 찬사를 전한 바 있다.

“저는 브라질과의 경기 전 스스로 ‘펠레 또한 다른 사람들처럼 살과 뼈로 된 인간’이라고 되뇌었습니다. 그러나 제가 틀렸습니다.”

펠레는 해당 결승전에서 1득점 2도움을 기록하며 팀을 승리로 이끌었다. 이때 넣은 골은 그가 현역 시절 넣은 1200여 골 중 하나로 기록됐다.

펠레 개인적으로도 브라질에도 통산 3번째 월드컵 우승의 순간이었다.

‘국보’의 자리

그렇게 축구 그 이상의 인상을 남긴 펠레는 지금은 고인이 된 미국의 예술가 앤디 워홀이 명성은 본질적으로 일시적이라는 유명한 발언을 수정하게 만든 인물이기도 했다.

워홀은 “펠레는 내 생각을 반박한 몇 안 되는 인물”이라며 “펠레의 명성은 15분이 아닌 15세기 동안 이어질 것”이라고 내다봤다.

내가 태어난 1973년에 펠레는 이미 국제 무대에서 은퇴한 상태였지만, 나는 브라질에서 그의 업적에 관한 이야기를 끊임없이 들으며 자랐다.

그러나 브라질을 세계 축구 최강국으로 이끌었다는 점 외에도 펠레는 흑인으로서도 중요한 업적을 남겼다.

바로 노예제도라는 부끄러운 과거와 오늘날까지도 일부 이어지는 인종차별의 유산을 지닌 나라에서 국보의 자리에 오른 것이다.

과거에도 그랬지만 펠레는 여전히 전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브라질인이다. 미 뉴욕에서 아프리카 사하라 사막 이남까지 여행한 모든 곳의 사람들은 내게 브라질 출신이라는 얘기를 듣자마자 펠레의 이름부터 언급하곤 했다.

펠레는 아직도 FIFA 월드컵 우승컵을 3번이나 들어 올린 유일한 선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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펠레는 아직도 FIFA 월드컵 우승컵을 3번이나 들어 올린 유일한 선수다

물론 펠레에 대한 비판도 있다. 1964~1985년까지 브라질을 철권 통치하며 국가대표팀의 성공을 이용하는 데 주저하지 않았던 군사 독재 정권에 대항하며 목소리를 내야 했다는 것이다.

당시 시대 상황을 외면한 듯한 축구 선수가 펠레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으나, 그만큼의 카리스마를 지닌 선수도 없었기 때문이다.

펠레 또한 작년 넷플릭스 다큐멘터리에 출연해 군정 시절 인권 유린 사태에 대해 “당시 축구인들이 변화를 만들어내지 않았다”며 사과하는 어조로 언급했다.

“제가 [인권 유린 상황에 대해 몰랐다고 말하는 건] 거짓말일 것입니다. 그러나 정말로 우리는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확실하게 알지 못했습니다.”

이후 펠레는 1974년 월드컵 출전을 권유받았으나, 군정에 반대해 국제 무대 은퇴 번복을 거부했다고 주장했다.

축구 해설가, 정치계, 광고

펠레는 현역 시절에도 은퇴 후에도 브라질 내 인종차별에 대해 좀 더 적극적으로 항의하는 모습을 보이진 않았다.

2014년에는 자신이 경기 중 겪은 인종차별 행위마다 항의했다면 “뛰었던 모든 경기를 도중에 중단시켜야 했을 것”이라며 브라질 축구 선수권 대회 중 발생한 인종차별적인 사건을 크게 문제 삼지 않는 듯한 발언으로 엄청나게 비난받기도 했다.

2002년 화이자 제약사의 홍보대사로 활동한 펠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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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화이자 제약사의 홍보대사로 활동한 펠레. 펠레는 감독직을 맡은 적은 없으며, 주로 TV 축구 해설 전문가로 활동했다

또한 사생활과 관련해 몇 번 논란이 일기도 했다. 아들 에드손이 마약 밀매에 연루돼 체포되는가 하면, 펠레 본인은 1960년 혼외 자식 딸 산드라를 인정하지 않으며 물의를 빚었다.

이에 펠레는 넷플릭스 다큐멘터리에서 “너무 바람을 많이 피워 자녀가 몇 명인지 모른다”고 인정하기도 했다.

펠레는 이후 불운하게도 폐지된 북미사커리그(NASL)로 이적해 활동하다 1977년 선수 생활 은퇴를 선언했다.

펠레는 감독직을 맡은 적은 없으며, 주로 TV 축구 해설 전문가로 활동했다. 1994년 미국 월드컵에서 브라질이 또 한 번 월드컵 우승컵을 쟁취했을 때 로스앤젤레스의 로즈보울 경기장 내 언론석에서 펠레가 헤드셋을 쓴 채 펄쩍 뛰는 장면을 볼 때마다 여전히 눈물이 난다.

또한 ‘이스케이프 투 빅토리’와 같은 영화나 TV 드라마에도 출연했으며, 1995~1998년엔 체육부 장관직으로 일하기도 했다.

한편 펠레는 수많은 국내외 기업의 광고에도 출연했는데, 2000년대 발기부전 치료제 광고 출연 등으로 조롱받기도 했다. 그러나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이는 용감한 선택이었다.

또한 펠레는 특유의 발언으로 국내외 언론에 자주 인용됐다. 펠레는 다른 유명 동료들의 반감을 살지라도 발언에 거침이 없었다.

1994년 월드컵 우승 당시 브라질 국가 대표팀이었던 호마리우는 “펠레는 그 입을 물고 있을 땐 때 시인”이라고 일갈하기도 했다.

한편 펠레는 빗나간 예상으로도 유명했다.

일례로 지난 1970년대, 펠레는 아프리카 팀이 “21세기 이전에 월드컵에서 우승할 것”이라고 예측했으나, 현재 기준으로 아프리카 팀은 아직 준결승에도 진출하지 못했다.

또한 1994년 FIFA 미국 월드컵에선 콜롬비아가 아르헨티나를 멋지게 꺾고 결국 최종 우승할 것이라고 예상했지만, 콜롬비아는 미국에 지며 조별 예선부터 일찌감치 탈락하고 말았다.

이에 브라질 언론에서 펠레의 ‘죽음의 키스’는 우스갯소리가 됐다.

‘축구계에서 내가 쓴 역사가 있기에 내 생각을 말할 권리가 있다’

하지만 펠레는 유연하게 대처했다.

2006년 독일 월드컵 당시 펠레는 내게 “축구계에서 내가 쓴 역사가 있기에 나는 내 생각을 말할 권리가 있다”고 말했다. 당시 여러 스태프들과 함께 나는 고급 호텔 스위트룸에서 잉글랜드와 에콰도르의 16강전을 펠레와 함께 시청했다.

그날 오후 펠레는 디에고 마라도나를 포함해 자신을 부당하게 비판한다고 생각하는 모든 이들을 향해 본격적으로 고함치며 불만을 쏟아냈다.

순금과도 같은 매력적인 기삿거리였지만, 결코 세상밖에 공개되지 않을 말이기도 했다. 앞서 킹은 이미 내게 “여기에 기자가 아닌, 친구로서 와 있는 것”이라고 분명히 말하기도 했다.

내가 어찌 감히 왕의 명령을 거스르겠는가? 그러나 당시 브라질이 8강전에서 만난 프랑스에 패한 이후 경기 결과에 대한 펠레의 유일한 신문 인터뷰는 진행할 수 있었다.

한편 리오넬 메시라는 엄청난 인물이 축구계에 등장하면서 이제 펠레는 세계 최고의 축구 선수가 아니라고 주장하고 싶어 하는 이들이 많다.

그러나 브라질 축구 전설의 의견은 다르다.

런던에서 만난 펠레는 “메시는 왼쪽을 훨씬 더 많이 사용하는 반면 나는 양발로 헤더와 킥을 할 수 있었다”면서 “메시가 (나를 넘으려면) 1000골 정도는 넣어야 한다”고 말했다.

이번에 우승하긴 했지만 아르헨티나가 브라질의 5회 우승 기록을 넘으려면 아직 우승컵을 3번이나 더 들어야 한다는 농담을 펠레에게 한 번 더 직접 말할 기회가 있길 바랐다.

이 말은 언제나 그를 웃게 했다. 축구황제의 그 웃음이 몹시 그리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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