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이 올해도 신년 축하카드를 선보였다.
노동당 기관지 노동신문은 “2023년을 맞아 축하장들이 나왔다”며 “새해를 맞는 인민들에게 승리의 신심과 희열, 낭만을 안겨주기 위해 축하장 도안들을 특색 있게 창작했다”고 보도했다.
신년 축하장에는 고층빌딩이 들어선 평양 거리, 최신 열차와 버스 등이 담겼는데 특히 산타 옷을 입고 눈싸움 하는 어린이들, 산타 모자 쓴 눈사람이 흥미롭다.
종교의 자유가 없고 크리스마스를 따로 기념하지 않는 북한에서도 산타 옷만큼은 널리 알려진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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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감도 알록달록, 다양한 색채가 사용됐는데 전체적으로 세련미는 없지만 뭔가 정겨운 느낌이다. 과거 우리네 8~90년대 정서랄까.
그런데 카드를 더 자세히 보면 ‘주체 112’, ‘세상에 부럼 없어라’ 등의 문구가 적힌 것을 알 수 있다.
‘주체 112’는 어떤 뜻이고 또 ‘세상에 부럼 없어라’ 이런 구호는 무엇을 의미할까? 새해 카드에 왜 이런 글귀가 담긴 것일까? 전문가들로부터 자세한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주체 112’는 김일성 탄생 112주년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는 김일성이 출생한 1912년을 원년(1년)으로 하는 북한의 공식 연도 표기 방식이다.
서기 2023년은 주체 112년으로, 올해가 김일성 주석이 태어난 지 112년이 된 해라는 의미다.
1997년부터 북한의 모든 출판, 문서, 우표, 보도물, 지폐, 달력 등에 국제적으로 통용되는 서력(2023년)과 함께 표기되고 있다.
이는 정권 자체가 수령 체제, 신정 체제인 북한에서 수령은 절대자, 곧 ‘신’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라는 것이 전문가들의 평가다.
북한연구소장을 지낸 정영태 동양대 석좌교수는 BBC에 “주체는 기본적으로 민족주의 개념이 강하다”며 “이 ‘주체’가 ‘주체주의’가 되고 향후 ‘김일성주의’로까지 변모한 것이 북한의 특색”이라고 설명했다.
또 “북한 주체주의는 김일성이 창안해 낸 이데올로기”라며 “북한의 역사 자체가 김일성을 중심으로 탄생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고 강조했다. 북한은 곧 ‘김일성 국가’로, 국가의 핵심이 곧 ‘주체주의’라는 얘기다.
정 교수는 이러한 주체주의가 더 나아가 신정주의, 폐쇄주의로 연결됐다고 분석했다. 이성적 합리적 형태의 지도자가 아닌, 종교적인 영역으로까지 나아가 김일성을 ‘신격화’ 했다는 것.
실제 북한은 지난 1996년 최고지도자들이 축지법을 사용했다는 내용의 가곡을 발표한 바 있다.
김일성 주석이 소싯적에 쓰던 축지법을 김정일 위원장이 사용하면 험산준령을 비켜서게 하고 번개가 뒤따라 천하를 쥐락펴락한다는 내용이다.
또 이보다 앞서 주민들 사이에서는 ‘김일성 주석이 보천보 전투에서 축지법을 쓰고 솔방울로 수류탄을 만들어 썼다’는 식의 과장된 내용이 회자되기도 했다고.
북측 주장에 따르면 보천보 전투는 지난 1937년 김일성이 이끈 부대가 함경남도 보천보를 습격해 일제를 몰아낸 사건으로, 북한은 이 전투를 김일성의 항일무장투쟁 중 가장 큰 성과로 선전하고 있다.
정 교수는 북한에서 ‘수령은 곧 신’이기 때문에 북한이 대북방송, 대북전단 등 외부 정부에 그렇게 예민하게 반응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따라서 북한은 자신들을 ‘한민족’이 아닌 ‘김일성 민족’으로 받아들인다며, 결국 북한식 사회주의 국가 시스템이 수령제를 유지하기 위한 하나의 수단이 된 셈이라고 말했다.
신년 카드에 등장한 ‘세상에 부럼 없어라’ 또는 ‘우리는 행복해요’ 등도 같은 맥락으로 풀이된다. 이러한 구호는 1960년대 유일사상체계 수립과 함께 등장했다.
북한 작가동맹 시인 출신의 최진이 ‘임진강’ 대표는 2019년 12월 숭실통일아카데미에서 “순종만이 각인되어 온 조직생활의 무기력함, 체질화된 언행불일치의 전형적인 상징”이라고 평가했다.
200만 명이 넘는 아사자가 발생한 것으로 전해지는 1990년대 중반 ‘고난의 행군’ 시기에도 북한 전역의 유치원, 탁아소 정문에 이런 구호들이 그대로 걸려있었다는 것이다.
최 대표는 “실제 삶은 굶어 죽기 일보 직전이면서도 북한 주민은 ‘우리는 행복해요’ 라고 딴청을 부리는 데 익숙해져 있다”고 전했다.
모두 집단이 개인보다 우선시되는 사회 체제 안에서 발생하는 ‘부조리’라는 설명이다.
이와 관련해 정영태 교수는 “문제는 북한 주민들이 이런 시스템에 순응했다는 점”이라며 “정권 자체가 집단이나 개인보다 우선시되기 때문에 주민들이 굶어 죽더라도 상위 집단들은 오히려 ‘그런 하위 분자들은 없어져야 된다’고 생각할 정도”라고 지적했다.
폐쇄주의가 ‘순 한글’ 사용에 영향
이렇듯 유일지배체계가 형성되고 ‘절대자’인 김일성을 중심으로 사회 전반적인 개조가 이뤄지면서 북한의 일상 언어 생활에도 상당한 영향을 주었다.
이대성 국립국어원 어문연구과 사전팀장은 “기본적으로 사회 체제가 언어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라고 설명했다.
특히 북한의 경우 관 주도적인 면이 있기 때문에 유일사상체계와 제도 아래에서 강제적 매커니즘으로 언어가 퍼지고 사용되고 있다는 얘기다.
실제로 북한은 지명에도 사회주의 색채를 포함시켰다.
통일부 자료에 따르면 함경북도 낙원군은 본래 ‘퇴조군’이었지만 1982년 ‘살기 좋은 사회주의 낙원으로 변화된 지역’이라는 의미로 개칭됐다.
은덕군 역시 ‘김일성∙김정일의 큰 은덕으로 나날이 변모해 가는 고장’이라 하여 은덕군이 됐다. 이 외에도 선군마을, 충성동, 천리마구역 등이 존재한다.
북한은 지난해 광복절을 앞두고 외래어 대신 ‘평양 표준어’를 쓰자고 촉구하기도 했다.
노동당 기관지 노동신문은 지난해 8월 14일 ‘고상하고 문명한 언어생활 기풍과 평양 문화어’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제국주의 사상 문화는 사람들의 건전한 정신을 마비시키고 사회주의의 기초를 무너뜨리는 위험한 독소”라며 이같이 보도했다.
그러면서 “온 사회에 고상하고 문명한 언어생활 기풍을 세워나가는 데서 평양 문화어를 적극 살려 쓰는 것이 매우 중요한 문제”라고 장려했다.
이 팀장은 “한국 사회는 개방적인 만큼 외래어를 많이 사용하고 익숙한 반면 북한이 외국어, 한자어보다 고유언어를 주로 사용하는 것은 결국 폐쇄성과도 관련이 있다”고 부연했다.
1990년대 동유럽 등 사회주의권 붕괴 이후 북한은 독자적 생존 능력을 강조하기 위한 맥락에서 고유 언어를 사용하기 시작했다는 평가도 나온다.
이우영 북한대학원대학교 교수는 “1990년대부터 북한 내 조선민족제일주의, 자립주의가 우선시되고 효심, 충성 등 과거의 가부장적 권위주의가 강화됐다”고 밝혔다.
또 평양 중심의 ‘문화어'(북한식 표준어)가 1960년대 만들어지면서 가능한 한글적 표현을 사용했는데 이는 주체, 자립갱생 등 자립주의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북한도 2000년대 들어 ‘김정은식 세계화’를 지향하고 있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이 교수는 “1960~70년대보다 표현이나 언어 사용 방식이 훨씬 융통성 있게 쓰인다”며 “이제는 ‘얼음보숭이’ 대신 ‘아이스크림’으로 통용된다”고 부연했다.
또한 어묵은 물고기떡, 도넛은 가락지빵, 네티즌은 망시민, 비밀번호는 통과암호, 정삼감형은 바른삼격형 등으로 통한다.
앞서 노동신문은 “김정은 시대 들어 평양 문화어가 말소리, 어휘, 문법 등 언어 구조의 모든 측면에서 민족적 특성이 높이 발양되고 인민대중의 자주적 의사와 요구에 맞게 문화적으로 세련되고 풍부하게 발전됐다”고 선전한 바 있다.
아울러 북한에서는 ‘평등주의’가 만연하기 때문에 한국보다는 존대어에 유연한 편이라고 이 교수는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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