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과거 다툼 후 화해할 때 성관계를 가진 적이 있던 연인 사이라도 한 쪽에서 일방적으로 성관계를 강제했다는 진술을 불신해선 안된다는 대법원 판결이 나왔다.
대법원 2부(주심 민유숙 대법관)는 지난달 15일, 강간 혐의를 받는 A씨에 대해 무죄를 선고한 원심을 깨고 사건을 서울고등법원으로 돌려보냈다.
A씨는 지난 2020년 4월 자택에서 전 여자친구 B씨를 강간한 혐의로 기소됐다. B씨는 헤어지려는 마음에 A씨 집에서 짐을 가지고 나오려던 중 A씨에 붙잡혀 성관계를 했다.
B씨는 A씨에게 성관계를 거부하는 의사를 표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고 일관되게 진술했다. B씨는 사건 이틀 후 A씨를 강간죄로 기소했다. B씨는 당시 상황을 증명하고자 피해 직후 사건 현장에서 A씨와의 대화 내용을 녹음한 녹음파일, 사건 이후 A씨와 주고 받은 휴대폰 문자메시지 대화 내용 등을 증거물로 제출했다.
제1심에서는 A씨에게 징역 3년의 유죄가 선고됐다. 하지만 항소심은 지난 2021년 10월 A씨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항소심에서 A씨는 ‘설령 B씨가 원치 않는 상태에서 성관계를 가졌다고 하더라도, 폭행이나 협박에 의해 B씨의 항거를 현저히 곤란하게 해 강간을 하지는 않았다’고 주장했다.
항소심은 B씨의 진술이 ▲B씨의 항거를 현저히 곤란하게 할 정도의 폭행 내지 협박 행위에 대한 구체적인 언급이나 묘사 등이 결여되어 있다는 점, ▲A씨가 B씨와 성관계를 갖는 것을 연인 사이에서 종전과 유사하게 다툼 후 화해하는 과정의 일환으로 생각하였을 가능성이 있다는 점 등을 근거로 피해자 진술의 신빙성이 떨어진다고 판단했다.
하지만 지난달 15일 대법원 판결로 이 원심은 다시 파기됐다. 대법원은 판결문에서 “피고인과 피해자가 연인관계였다거나, 이전에 다툼과 화해의 일환으로 관계를 가진 적이 있다는 사정을 들어 피해자가 이 사건 성관계를 용인하였거나 폭행⋅협박이 없었으리라는 막연한 추측 하에 피해자 진술 전체의 신빙성을 평가하여서는 아니 된다”고 적시했다.
그러면서 “피해자는 이 사건 범행 당시 명시적으로 피고인에게 성관계를 거부하는 의사를 표시하였고, 피고인도 이 사건 범행 당시의 성관계가 피해자의 의사에 반한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었다”고 덧붙였다.
계속 바뀌는 판결.. 재판부마다 판결 다른 이유는
연인 사이 헤어지는 과정에서 발생했던 이 강간 사건은 2년 8개월이 넘게 법원 심리가 진행되는 동안 판결 번복이 반복됐다.
강간 사건의 경우 이렇게 재판부마다 다른 판단을 내리는 사례가 자주 발생한다.
전문가들은 이에 대해 현행 강간죄와 관련된 기준이 상대방의 동의 여부가 아닌 폭행 또는 협박이 있었는지 여부로 규정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A씨와 B씨의 사례에서 B씨는 A씨에게 성관계를 갖지 않겠다는 거부의 의사를 전달했고 A씨도 이를 인지했다. 강간죄의 성립 요건이 동의 여부였더라면 A씨에게는 강간죄가 성립된다.
하지만 형법 297조 ‘강간죄’는 ‘폭행 또는 협박’을 강간죄 구성요건으로 두고 있다. A씨도 이 점을 들어 항소심에서 자신이 폭행이나 협박으로 B씨의 저항을 현저히 곤란하게 했다고는 볼 수 없다고 피력했다.
이렇게 ‘반항이 불가능하거나 현저히 곤란하게 할 정도의 폭력과 협박’을 기준으로 강간죄 등의 범위를 최대한 좁게 해석하는 것이 ‘최협의설’이다.
이 최협의설 조항은 70년 전인 1953년 형법 제정 당시로부터 단 한 번도 바뀌지 않았다.
지난 2018년 한국에서 미투 운동이 화력을 얻으면서 국회에서 여러 차례 강간죄 기준을 ‘비동의’ 여부로 바꾸는 개정안이 발의됐지만, 반대의 목소리가 이어져 아직까지 국회 문턱을 넘지 못했다.
‘폭력과 협박’ 판단 기준 제각각
강간죄 범위를 최대한 좁게 해석하는 것은 무고하게 고소 당해 피해 보는 사례를 막는다는 취지였지만 현실적으로 다양한 상황의 성폭력 상황을 포괄하지 못하는 등 부작용도 많았다.
폭행과 협박의 존재 여부를 입증하는 과정에서 피해자의 ‘적극적 저항 여부’를 따지게 되는데 체격, 체중 등 신체적 조건의 차이, 위계 관계나 심리적 위협에 따른 위축 등으로 피해자가 저항 의사를 표하기 어려운 경우도 많다.
다만 최근 대법원은 이 저항의 여부를 판단할 때 실질적인 저항이 없었더라도 저항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는지를 판단하는 방향으로 판결을 내리고 있다.
앞서 A씨와 B씨의 사례에서도 대법원은 “피고인(A씨)은 184cm, 70kg이고, 피해자(B씨)는 165cm, 43kg로서 피해자는, 피고인이 신체조건의 차이를 이용하여 피해자를 밀어 침대 위로 넘어뜨린 후 몸부림치는 피해자의 양팔을 붙잡아 옷을 벗기고 피해자의 몸 위에서 누르는 방법으로 제압하였다고 일관된 진술을 하였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한국형사정책연구원의 장임다혜 연구원은 “폭력과 협박을 최협의로 해석한다는 기준 자체가 바뀐 것은 아니지만 저항 행위를 판단할 때의 상황에 대해 몸무게나 몸집 차이, 당시 주변 상황 등 객관적 조건들을 보게 된 것”이라며 “예를 들어, 피해자가 고립되어 있다거나 도움을 요청할 수 있는 사람이 없다거나 이런 상황들에서는 저항을 하는 게 더 위험한 상황이 될 수도 있다”고 말했다.
장임 연구원은 이전까지 강간 사건 재판에서는 저항 행위가 실제 있었는지를 입증할 수 있는지 여부에 초점이 맞춰졌다면 현재는 저항이 어려운 상황이었음을 입증할 수 있는지 여부에 보다 중점을 두게 됐다고 설명했다.
그는 이러한 변화에 대해 “강간이 일어나는 당시에 도망을 친다거나 소리를 쳐서 도움을 요청하지 않았다고 해서 가장 좁은 의미의 폭행과 협박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단정해서는 안된다는 취지의 대법원 판례가 2005년 있었다”면서 “이후부터 대법원은 이에 부합하는 일관된 판결 경향을 보여왔다”고 말했다.
장임 연구원은 다만 대법원 판결의 일관된 추세에도 불구하고 강간 사건에 대한 하급 재판부의 판결이 계속 갈리는 상황에 대해 “대법원 판결 흐름이 변한 것이 법리상 명시된 기준에 따른 것은 아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1·2심 등 하급심에서 여전히 당시 소리를 쳐서 도움을 요청한다거나 도망을 치려고 시도한다거나 하는 식의 저항의 흔적 여부를 최협의 폭행 협박 여부를 판단하는 기준으로 삼는 경우가 있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여러 번 재판 과정이 2차 피해 되기도.. 비동의 기준으로 개정 필요’
장임 연구원은 “지금까지처럼 최협의설을 강간죄 성립의 요건으로 유지할 경우, 강간 피해자들이 재판을 3심, 4심까지 가야만 가해자에 대한 유죄 판결을 이끌어 낼 수 있다”고 지적한다.
그는 “이렇게 중간 과정에서 가해자에 대해 무죄 판결이 나면서 재판 과정 전체가 길어지는 경우, 피해자가 피해를 입은 상황에도 법적 보호를 받지 못하는 상황에 처한다”고 말했다.
재판이 길어지는 과정에서 피해자가 겪는 심리적 고통이 2차 피해로 작용할 수도 있다.
그는 “결국 법률 자체에 있어 강간죄 성립 요건을 동의, 비동의 여부로 가는 것이 필요하다”며 “이렇게 되면 피해자가 동의를 할 수 있는 조건과 상태에 있는지 확인하면 되기 때문에 법원 판단의 비일관성이 보다 해소될 수 있다”고 말했다.
장임 연구원은 또 이런 비동의 기준으로의 전환이 특히 준강간죄의 성립 여부를 판단하는 데 있어서도 중요하다고 말한다.
준강간이란 사람의 심신상실 또는 항거불능의 상태를 이용하여 간음 또는 추행을 함으로써 성립하는 범죄다.
준강간 피해의 경우, 피해자가 술이나 약물 등으로 제대로 된 판단을 할 수 없는 상황에서 발생하는 경우가 빈번하다.
장임 연구원은 “강간과 준강간 모두 비동의 여부를 기준으로 판단하게 되면 굳이 두 범죄를 구분할 필요가 없다”며 “비동의 여부를 기준으로 두게 되면 피해자가 기억할 수 없는 상황에서 이루어진 성관계에 대해서는 동의 자체가 이뤄질 수 없는 상황으로 판단되는 등 범죄 성립의 기준도 명확해진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현행법은 심신상실 또는 그에 준하는 정도로 저항이 불가능한 상황이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기 때문에 피해자가 목소리를 낼 수 있다거나 뭔가 물어봤을 때 대답을 할 수 있었다거나 하면 본인이 기억할 수 없는 상황이라고 해도 저항할 수 없는 상황이라고 보지 않는 경우도 있어 문제”라고 덧붙였다.
한편, 한국 정부에 ‘비동의 간음죄’를 도입하라는 유엔의 권고도 계속되고 있다.
2021년 강간에 관한 UN 특별보고서는 강간 정의에 있어 ‘동의 없음(lack of consent)’이 핵심이 되어야 한다고 밝히고 있다. 이는 국제형사재판소, 유럽인권재판소 등에서도 적용되는 세계적인 추세다.
영국은 2003년, 스웨덴은 2018년, 또 독일은 2016년 동의 여부나 자발적 참여 등을 기준으로 강간죄를 규정하는 방향으로 형법을 개정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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