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에라 마드레 산맥

Virma Simonette/BBC
필리핀 루손섬을 태풍으로부터 보호해주는 시에라 마드레 산맥

프란시스코 엘의 머릿속엔 언제나 구하지 못했던 아이들의 얼굴이 맴돈다.

그래서 엘은 매일 어깨에 묘목을 한가득 담은 고리버들 가방을 무겁게 짊어지고 광활한 시에라 마드레 산맥을 오른다. 산맥 깊숙한 곳 울창한 열대 우림이 펼쳐진다.

마른 체구의 엘은 구부정하게 숙이며 나무와 수풀 사이 희미하게 난 길을 따라간다. 안경이 코끝까지 내려와 아슬아슬하게 매달려 있지만 엘은 최근 자신이 나무를 심고 있는 장소로 향하는 발걸음을 낮추지 않는다. 다행히도 노출된 나무뿌리에 걸려 넘어지지 않았다.

엘을 뒤따라가는 건 쉽지 않았다. 특히 구름이 산비탈까지 내려와 나뭇가지 끝마다 안개비가 내려앉은 날씨에선 더욱 그랬다.

엘은 과거 시에라 마드레 산맥에서 수 세기 동안 자란 이 나무들을 베어내며 생계를 유지했다.

그런데 이제 어느덧 50대가 된 엘은 “자연의 복수”를 눈앞에서 목격한 후 불법 벌목꾼에서 산림 경비원으로 전향하게 됐다고 고백했다.

때는 2004년 12월, 엘이 살던 마을을 포함해 인근 지역에 산사태가 발생해 1000명 이상이 목숨을 잃었다.

“민가가 죄다 파괴되고 축 늘어져 생명의 불꽃이 꺼진 아이들이 거리에 줄지어 누워있었다”는 엘은 “멀쩡한 집이 없었다. 내 집도 그때 사라졌다. 그때를 생각하면 무력감을 느낀다”고 말했다.

엘은 바쁘게 움직이던 손을 멈추고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과거에 대해 죄책감을 느끼는 것일까.

눈물을 흘리며 고개를 돌리던 엘은 몇 분 후 “나는 스스로를 탓한다. 내가 나무를 자르지 않았다면,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고 답했다.

시에라 마드레 구하기

필리핀 사람들에게 시에라 마드레는 어떤 존재일까.

필리핀에서 가장 큰 섬인 루손섬의 척추라는 대답이 돌아올 것이다. 심지어 자신들의 어머니이자 수호자라고 답하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말 그대로 척추처럼 남북으로 500km 정도 뻗어있는 시에라 마드레는 울퉁불퉁하고 험준한 봉우리들로 이뤄져 있다. 덕분에 수도 마닐라 등 루손섬 주민 6400만 명은 태평양에서 불어오는 최악의 태풍으로부터 보호받을 수 있다.

프란시스코 엘

Virma Simonette/BBC
과거 불법 벌목꾼이었던 프란시스코 엘은 이제 산림을 구하기 위해 애쓰고 있다

하지만 불법 벌목, 채석 및 채굴 등으로 현재 울창했던 열대 우림의 90%가 사라진 상태다.

뿌리로 토양을 안정적으로 잡아주는 나무와 폭우도 흡수할 수 있는 광대한 숲이 사라지면서 산사태 및 갑작스러운 홍수 피해가 더 흔해지고 있다. 게다가 태풍의 빈도와 크기도 증가하고 있다.

한편 주택 등 건설 프로젝트에 불법으로 목재를 납품한다는 50대 중반의 마크는 “사람들은 불법 벌목이 자연 파괴라고 주장하지만, (산림은) 신이 우리에게 사용할 수 있도록 준 것”이라고 주장했다.

마크는 7년 전 키우던 소를 팔고 산 쇠톱이라며 자랑스럽게 내보였다. 이곳에서 쇠톱은 마치 총처럼 등록할 수 있는 소중한 소유물이다.

마크는 산림 보호 당국이 “영원히 자신을 잡지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 마크와 아내 그레이스는 깊은 숲속에서 중력을 거스르는 듯한 골판지 철제 지붕을 얹은, 대나무를 엮어 만든 작은 오두막에 살고 있다. 이들은 코코넛 나무로 둘러싸인 경사진 언덕 위에 집을 지었다.

지난 3월 큰 주문이 들어왔다고 했다. 마크 부부는 다른 이의 도움까지 얻어가며 약 한 달간 벌목에 매달렸고, 그렇게 1만6500페소(약 35만원)를 벌었다.

보통 이러한 주문은 중개인을 통해 전달되는데, 그렇게 벌목한 나무를 이들에게 전달하는 과정이 까다롭다고 한다.

“경찰과 산림 경비원의 눈을 피해 보통 자정 이후에 거래합니다. 그렇게 물건을 전달한 뒤 일주일 뒤 돈을 받습니다.”

이렇듯 여러 위험 요소가 있지만, 필리핀 내 최저 소득층 중엔 벌목만이 유일한 수입원인 경우가 있다.

마크는 “우리라고 이 일이 정말 하고 싶어서 하는 건 아니기에, 우리에게 화내지 말라는 말을 하고 싶다”고 언급했다.

“우리는 기본적인 생필품만 겨우 살 수 있을 형편입니다. 다른 이들은 다른 생계 수단이 있기에 벌목꾼에게 화를 낼 여유가 있지만, 우리는 가진 게 없습니다.”

불법 벌목꾼

Virma Simonette/BBC
불법 벌목꾼인 마크와 아내는 벌목만이 생계를 유지할 유일한 방법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엘은 그럼에도 이젠 벌목의 파괴적인 영향을 직면할 때라는 사실은 바뀌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저는 제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몰랐고, 마땅히 다른 생계 수단이 없었기에 매일 먹을 것을 살 돈을 구하는 데만 신경 썼습니다. 심지어 자른 나무의 뿌리까지도 파냈죠. 근처에 큰 나무가 남지 않을 때까지 모든 나무를 베어버리곤 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엘은 “나무 한 그루를 베어내는 일은… 자연에 저지를 수 있는 가장 큰 죄악 중 하나”라고 믿는다.

흐르는 시냇물 근처에 도착한 엘은 무거운 묘목 가방을 내려놨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15kg에 달하는 묘목 가방을 메고 여기까지 올라온 ‘하리본 재단’ 소속 자원봉사자 십여 명에게 할 일을 알려주기 시작했다.

슬리퍼 차림인 봉사자도 있었지만, 진흙탕을 헤치고 가파른 둑을 기어오른 것을 보니 괜찮은 듯했다.

엘은 우거진 열대 우림의 그늘에서 “역사가 반복되지 않도록” 계속 노력하겠다고 맹세한다.

“우리가 맞서야 할 적은 갑작스러운 홍수”라는 엘은 “자식들에게도 나무를 심으라고, 벌목꾼의 뒤를 따르지 말라고 가르친다”고 말했다.

구름이 약간 더 낮게 내려오면서 빗방울이 나뭇잎 위로 하나둘 떨어지기 시작했지만, 봉사자들은 동요하지 않고 계속 나무를 심어나갔다.

이들이 심는 ‘나라(narra) 나무’는 빠른 성장 속도를 자랑하는 자단향 품종으로, 필리핀의 공식 국가 상징이기도 하다.

엘과 봉사자들은 앞으로 10년간 나무가 울창하게 자라 이 지역을 다시 덮을 수 있길 꿈꾸고 있다.

치열한 갈등과 목숨을 건 사람들

한편 시에라 마드레에 나무를 심는 건 시간도 오래 걸리고 어려우며, 심지어 위험하기까지 한 일이다.

다른 모든 열대우림과 마찬가지로, 이곳에서도 생계를 위해 필사적인 사람들과 자연을 필사적으로 보전하려는 사람들의 의견이 치열하게 맞붙는다.

그리고 때론 이러한 갈등은 목숨을 위협하기도 한다.

국제 비영리 기구 ‘글로벌 위트니스’의 보고서에 따르면 전 세계에서 필리핀은 환경 운동가 또는 토지 권리 운동가에게 가장 위험한 지역 중 하나다.

필리핀 환경 운동가들이 2021년 11월 마닐라에서 기후 정의 행진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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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핀에서 환경 운동가들은 특히 여러 위협에 노출된다

엘 또한 “한번은 우리가 벌목꾼에게 벌목을 중단하라고 했더니, 살해 협박이 돌아왔다”고 설명했다.

“그래서 싸움을 걸려는 것이 아니라, 계속 벌목한다면 결국 우리 모두에게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설명하고자 이 자리에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당시엔 다행히 솔직한 대화 끝에 평화롭게 각자 갈 길을 가는 것으로 끝났다.

하지만 언제나 모든 다툼이 좋게 끝나는 것은 아니다.

지난 10년간 이 시에라 마드레 열대 우림을 지키려다 적어도 270명이 목숨을 잃었다.

작년 시에라 마드레 산맥 남쪽의 마순기 지오레세브 지역에서 일하던 산림 경비대원 2명이 총에 맞아 부상을 입어 경비대원들이 긴급 보호를 요청하는 일이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지난 몇 년간 필리핀 ‘환경 및 천연자원부(DENR)’는 산림 경비원들에게 무장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하지만 무장한 벌목꾼들이 경비원만 노리는 것은 아니다. 필리핀에서 살해된 환경 운동가 중 114명은 원주민 공동체 출신이었다.

DENR에 따르면 필리핀에선 매년 열대 우림 약 4만7000헥타르(4억7000만㎡)가 사라지고 있는데, 이는 축구장 8만7700개에 달하는 엄청난 크기다.

또한 전 세계에서 멸종위기종이 가장 많이 서식하는 지역으로도 추정된다.

한편 많은 생물종이 벌목으로 사라졌지만, 현 상황은 단순히 목재를 둘러싼 갈등만은 아니다.

기후변화 vs 경제 성장

이 광대한 시에라 마드레 산맥엔 구리, 금, 니켈, 크롬철광, 석회석 등의 매장량 또한 풍부하다.

그리고 지난 3년간 코로나19 팬데믹으로 큰 타격을 입은 경제를 재건하려는 개발도상국 필리핀에 이는 엄청난 사업이다.

작년까지만 해도 신규 노천 채굴 사업을 일시적으로 중단했으나, 인근 토지에 대한 장기간 사용을 허가받은 기업들도 있다.

마닐라 기상청 소속 토니 라 비나 기후 정책 및 국제 관계 부국장은 “광산업과 관련해 부여된 모든 허가권을 포괄적으로 재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설명했다.

“정치인과 광산 기업이 서로 관계가 있다는 증거가 많습니다. 벌목과 채굴을 통해 많은 지역 및 중앙 정부 정치인들이 자신의 정치 커리어를 키워 나갔죠. 바로 이 유착 관계를 끊어야 합니다.”

시에라 마드레 산맥이 거치는 지방 10곳의 모든 광산 프로젝트 규모를 제대로 파악하기란 쉽지 않지만, BBC는 각 지방의 공무원들에게 연락해 지난 5년간 얼마나 많은 허가증을 발급했는지 파악하고자 했다.

그 결과 ‘리잘’이라는 지방 한 곳의 담당자들만 응답했다.

이들에 따르면 “광물 채취”에 관해 통과된 허가는 3건이지만, 토지 소유자들이 보호 구역에서 채굴할 수 있는 “우선권”을 지니고 있다고 한다.

시에라 마드레 산맥 채굴장

BBC
채굴 및 채석으로 인해 시에라 마드레 산맥이 가장자리부터 침식되고 있다

채굴이나 채석 허가증을 발급하는 DENR은 아직 BBC의 질문에 응답하지 않고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DENR은 시에라 마드레를 보호하는 산림 경비원 수백 명을 고용하는 부서이기도 하다.

기후 변화에 맞서 싸우는 과정에서 개발도상국들이 직면하는 모순이 잘 드러난다.

실제로 개발도상국에선 인구 증가로 집, 도로, 일자리가 필요하지만, 이러한 기반 시설 및 산업 건설은 종종 국민들의 미래를 위협하는 삼림 벌채 및 홍수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이에 개발도상국들은 부국의 도움을 원하고 있다. 일례로 전 세계 열대우림의 52%를 차지하는 콩고민주공화국, 인도네시아, 브라질은 “벌채 감소를 위한 대가”를 얻어내기 위해 협력하겠다고 밝혔다.

필리핀은 메트로 마닐라, 리잘, 케손 등 도시의 증가하는 물 수요를 맞출 수 있는 거대한 댐을 건설하고자 중국으로 눈을 돌렸다.

당국은 댐 건설 이점이 환경 파괴보다 더 크다고 주장하지만, 귀중한 동식물종을 더욱 파괴할 뿐만 아니라 또 다른 개발 및 공사를 시작할 수 있는 발판이 될 수도 있다는 우려도 있다.

한편 엄청난 폭풍이 루손섬을 위협할 때면 우선순위는 빠르게 바뀐다. 지난해 9월 초대형 태풍 ‘노루’가 필리핀에 상륙하자 ‘#시에라마드레보호’가 트위터를 뜨겁게 달궜다. TV에는 전문가들이 속속 등장해 시에라 마드레가 루손섬을 보호하고 있다며 칭찬을 늘어놨다.

라 비나 부국장은 “시에라 마드레의 쓰임이 단 하나뿐인 건 아니지만, 지금은 우선순위를 정해야 할 시기”라면서 “시에라 마드레를 완전히 파괴할 수도 있는 인프라를 건설해선 안 된다. 여기엔 걸린 게 훨씬 많다”고 지적했다.

수도 마닐라 번화가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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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 마닐라와 같은 도시에선 에너지와 기반 시설 수요가 증가하고 있다

시에라 마드레가 품은 자원을 노린 경쟁이 불붙고 있는 지금은 그 어느 때보다 어머니와도 같은 대자연의 보호가 필요한 시기이기도 하다.

필리핀은 세계에서 가장 재난에 취약한 나라 중 하나이며, 현재는 기후 변화에 가장 취약한 나라로도 손꼽힌다.

이에 대해 “숲을 보호하기 위해 열심히 일하는 사람이 많다”는 라 비나 부국장은 희망적인 목소리로 “그리고 (산림 보호에 대한) 인식이 개선되고 있다. 계속 앞으로 나아간다면, 꼭 성과가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산림 파괴의 최전선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마음은 다르다.

밀라 라가스는 강가 근처 대나무 오두막 몇 채로 이뤄진 고향 마을이 홍수로 물에 잠기면서 현재 리잘 지역 채석장 옆에 살고 있다. 라가스는 자신과 자녀들의 소중한 물건은 가방 안에 넣어 보관하는 습관이 생겼다.

라가스는 강 위의 가파른 산허리를 가리키며 “여기서 태어났다. 저 위쪽의 산들은 괜찮았다. 내가 어릴 적엔 홍수가 없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주변 산 일부는 잘려 나가 푸른빛을 잃었다. 그 자리엔 회색의 채석장이 들어섰다.

라가스는 이젠 빗물을 흡수할 나무가 없는 상황에서 강이 불어나면 “전혀” 막을 수 없다고 걱정했다.

“모두가 다가올 미래를 우려합니다. 우리는 아무것도 할 수 없고, 다가올 일을 막을 힘도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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