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란 외교부가 18일 이란 주재 한국 대사를 초치해 “아랍에미리트(UAE)의 적은 이란”이라는 윤석열 대통령의 최근 발언에 강력 항의했다.
이에 한국 외교부는 19일 한국 주재 이란 대사를 초치해 해당 발언이 “UAE에서 임무 수행 중인 한국 장병들에 대한 격려 차원의 말”이었다는 기존 입장을 거듭 강조했다.
앞서 윤석열 대통령은 지난 15일 UAE에 파견된 한국 육군의 아크부대를 방문한 자리에서 “우리(한국)와 UAE가 매우 유사한 입장에 있다”며 “아랍에미리트의 적은, 가장 위협적인 국가는 이란이고 우리 적은 북한”이라고 발언했다.
이란의 공식 국영 매체 IRNA에 따르면, 이란 정부는 한국 대사를 초치한 자리에서 “이란은 대부분의 페르시아만(Persian Gulf) 국가들과 깊고 우호적인 유대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는 입장을 밝히며 “윤 대통령의 발언이 내정 간섭에 해당하며 역내 평화와 안정에 저촉된다”고 강하게 항의했다.
한국 외교부가 윤 대통령의 발언이 “한-이란 관계 등 이란의 국제관계와는 전혀 무관하다”며 진화에 나섰지만, 두 나라 외교 당국이 차례로 상대국 대사를 초치하면서 오히려 해당 사안이 외교 문제로 비화한 형국이다.
‘이란과 UAE, 적국 아닌 공생 관계’
전문가들은 UAE가 이란과 ‘적국 관계’에 있지 않다고 명확하게 말한다. 이란과 사우디아라비아가 대립각을 세워온 가운데, UAE가 사우디아라비아와 보다 우호적인 관계를 맺고 있지만 동시에 이란과도 경제적으로 우호적 관계를 맺고 있어 ‘공생 관계’로 봐야 한다는 지적이다.
중동문제 연구가인 서강대 유로메나연구소의 박현도 대우교수는 “UAE 최대도시인 두바이 덕분에 이란이 국제사회의 경제 제재 가운데 그나마 ‘숨통이 좀 트인다’는 말이 있을 정도의 상황”이라며 “페르시아만 국가들은 이쪽 지역에서 전쟁이나 무력 충돌이 일어나면 서로가 공멸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최대한 데탕트에 가깝게 갈 수 있는 방향을 만들려고 한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윤 대통령은 왜 ‘이란이 UAE의 적국’이라는 발언을 했을까?
박 교수는 현재 페르시아만 국가들 간 복잡미묘한 긴장 관계를 이해하기 위해 1979년 이란의 이슬람 혁명 성공과 이후 이란이 이슬람 혁명을 주변 국가들로 확산하려 하면서 생겨난 주변 국가들과의 세력 싸움에 주목해야 한다고 설명한다.
이란은 1979년 이슬람 혁명으로 미국과 영국 등 서방 세력의 지원을 받는 왕조가 무너지고 이슬람 공화국이 되었다. 이후 이란은 이슬람 혁명을 주변 국가들로 확산하려 하는 과정에서 서방 세력에 반대하는 무장 단체들을 지원하는 등 ‘반미 세력’의 주축이 된다.
박 교수는 “이란의 이러한 움직임에 특히 걱정이 많았던 나라가 사우디아라비아”라며 “사우디아라비아를 중심으로 한 친미 블록(block)과 이란을 중심으로 한 반미 블록의 대립 구조가 계속되어 왔다고 볼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이런 프록시전(대리전) 가운데 UAE는 사우디아라비아와 함께 친미 노선을 걸었지만 그러면서도 이란과 경제 관계를 이어왔기 때문에 그 관계를 복합적인 각도로 봐야 한다”고 덧붙였다.
‘테헤란로’와 ‘서울로’… 한국과 이란의 오랜 외교 관계
전문가들은 UAE가 사우디아라비아의 우방국으로서 이란과 공식적으로 우호적 관계를 맺기 어려운 것처럼, 한국 역시 미국의 우방국으로서 이란과 거리를 둘 수 밖에 없다고 설명한다.
하지만 그런 상황에서도 한국과 이란은 경제 협력을 바탕으로 친선 관계를 유지하려고 하고 있다. 이런 노력에는 양 국간 오랜 경제 협력의 역사가 있다.
한국과 이란은 한국의 군사정권 집권 시기 양국 간 활발한 민간 경제 교류를 바탕으로 좋은 관계를 유지했다.
1970년대 한국과 이란 모두 개발독재를 통한 급진적 근대화를 추진하고 있었는데 당시 2만 명 이상의 한국 근로자들이 이란에 일하러 가기도 했다.
서울 강남의 ‘테헤란로’와 테헤란의 ‘서울로’ 역시 1977년 6월, 이란의 수도 테헤란 시장이 서울을 방문한 것을 기념해 명명되었다.
1979년 이란의 이슬람 혁명 이후 이란이 기존의 친서방 왕조 국가에서 반미 이슬람 공화국으로 전환하면서 한국과 이란의 관계는 상대적으로 소원해질 수밖에 없었지만 교역과 경제 협력은 이어졌다.
하지만 미국의 도널드 대통령이 집권하면서 미국은 우방국에 대이란 정책을 협력을 한층 강하게 요청하며 강도 높은 이란 제재를 가했다. 2018년 미국의 대이란 제재 복원으로 한국에는 현재 70억 달러가량의 이란 자금이 원화로 동결되어 있는데, 이는 이란의 해외 동결 자산 가운데 최대 규모로 알려져 있다.
한편, 한국은 이란 외 사우디아라비아나 아랍에미리트 등 다른 중동 국가들과도 경제 협력 관계를 꾸준히 발전시켜 오고 있다.
지난 16일 윤석열 대통령과 무함마드 빈 자이드 알 나흐얀 UAE 대통령은 정상회담을 계기로 UAE의 ‘300억 달러(약 37조200억 원) 한국 투자’가 명기된 공동 성명을 채택했다.
이에 앞서 지난해 11월에는 사우디아라비아의 실권자 무함마드 빈 살만 왕세자 겸 총리가 한국을 방문해 윤석열 대통령과 정상급 회담을 갖고 이를 계기로 한국과 26건, 300억 달러 규모의 투자 계약을 체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