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달 초 싱가포르에 사는 17세 소녀 조 가브리엘은 아버지로부터 선물 받은 가방을 자랑하며 자신의 틱톡 계정에 “내 첫 명품 가방”이라고 적었다. 가브리엘이 올린 가방은 싱가포르 패션 브랜드 ‘찰스앤키스’사의 79.9싱가포르달러(약 7만원)짜리 토트백이었다.

해당 게시물은 이후 엄청난 화제가 되며 현재 조회수 2000만 회를 기록했으며, 이후 올린 게시물 또한 조회수 수천만 회를 기록 중이다.

그뿐만 아니라 가브리엘의 이 게시물은 이제 싱가포르 사회 내 계층과 사회 불평등에 대한 더 폭넓은 논쟁으로 이어졌다.

부유한 도시 국가 싱가포르 정부는 최근 심화하는 계층화 조짐을 경계하고 있다.

‘찰스앤키스’사는 중국과 대만에선 ‘리틀 CK(캘빈클블라인)’으로도 불리는 중급 브랜드로, 인도와 태국 등에서도 인기 있다.

그러나 명품매장이 즐비한 화려한 쇼핑몰이 가득하며 사회적 지위에 민감한 싱가포르에선 이를 명품으로 취급하지 않는다.

이에 싱가포르 네티즌들이 가브리엘의 게시물에 몰려들어 그게 무슨 명품이냐며 댓글로 비웃기 시작했다.

“이 가방을 명품이라고 부르는 건 패스트푸드점을 고급 식당이라고 부르는 것과 같다”며 비웃는 이도 있었다.

이에 가브리엘은 “(그 가방은 명품이 아니란 걸) 누가 좀 말해줄래? (웃는 이모티콘)”라는 댓글에 대해 차분히 답하는 영상을 찍어 올렸다.

조회수 600만 회 이상을 기록 중인 해당 게시물에서 가브리엘은 “나는 어릴 적부터 가진 게 많지 않았다. 우리 가족은 형편이 그리 좋지 않았다. 당신에게 80달러짜리 가방은 명품이 아닐 수 있지만 나와 내 가족에겐 너무나도 큰 액수”라고 설명했다.

해당 게시물에 대한 반응은 달랐다. 긍정적인 댓글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해당 영상 이후 가브리엘의 틱톡 계정 팔로워 수는 20만 명 이상 급증했으며, 찰스앤키스 등 여러 브랜드로부터 선물 공세가 이어졌다.

지난 2010년 가족과 함께 필리핀에서 싱가포르로 이주한 가브리엘은 BBC와의 인터뷰에서 온라인상에 자신을 응원해주는 사람들에게 감동했다면서도 기계 기술자인 아버지를 비난하는 여러 댓글이 “너무하다고 느꼈고 이에 슬펐다”고 털어놨다. (가브리엘은 이러한 비난 댓글을 삭제했다.)

그러면서 “사람들이 왜 [이 가방이] 내게 감정적으로도, 금전적으로도 무척 큰 의미라는 걸 받아들이는 데 어려워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고 덧붙였다.

한편 차기 총리로 예정된 로렌스 웡 현 싱가포르 부총리 및 재무장관이 국민들에게 사회적 지위나 명망에 지나치게 집착하지 말아 달라고 촉구하는 연설에서 이번 일을 넌지시 암시하기도 했다. 가브리엘의 가방이 촉발한 논쟁에 고위 정치인들도 주목하기 시작한 것이다.

계층 문제

과거 인종 폭동을 경험하기도 했던 다민족 및 다문화 국가인 싱가포르는 역사적으로 인종 및 종교적 조화 유지에 무척 예민하다.

실제로 인종이나 종교적인 감정을 건드려 갈등을 일으킬 경우 징역형 등 엄격한 처벌을 받기도 한다.

그러나 지난 2018년 인종적 화합을 추구하는 싱가포르 내 기관 ‘원피플.sg’에서 의뢰한 연구 결과 계층 문제야말로 싱가포르 사회에서 가장 분열을 초래할 수 있는 요소로 지목됐다.

싱가포르의 유명 싱크탱크인 ‘정책연구소’도 바로 그 전 해 같은 결론을 내린 바 있다.

세계에서 장관직 연봉이 가장 높은 국가이기도 한 싱가포르에선 고급스러운 아파트와 우뚝 솟은 고층 건물 바로 앞엔 자리한 노인 및 노동자 계층이 거주하는 원룸 임대 아파트 등 때로 극도로 대조적인 모습이 연출된다.

이처럼 영화 ‘크레이지 리치 아시안’에서 보여준 화려한 모습과 달리 실제 모든 싱가포르 국민이 찰스앤키스 가방을 살 여유가 되는 것도 아니다.

싱가포르 공공 주택

Getty Images
싱가포르 국민 대부분은 공공 주택에 산다

지난해 싱가포르 국립대학의 연구에 따르면 20~30대 나이의 대졸자의 중위 소득은 월 4200싱가포르달러(약 390만원)로, 고졸 이하 학력 소지자의 2배가 넘는다.

1570~2210싱가포르달러 정도로 예상되는 청소 노동자의 연 수입과 대조적이다.

게다가 우크라이나 전쟁과 인건비 및 원자재 비용 상승으로 인해 고물가 문제 또한 수면 위로 떠 올랐다.

최근 싱가포르에선 상품 및 서비스세(GST)가 1% 인상되면서 논란이 됐으나, 내년에 한 차례 더 인상될 예정이다. 이에 따라 계란과 채소 등 생활필수품의 가격이 상승했다.

게다가 부동산 가격까지 폭등하면서 사회 불평등에 대한 우려가 더욱 커지고 있다. 일례로 선호 지역 내 공공 아파트는 재판매 시장에서 100만달러까지 치솟기도 한다.

중산층 국가?

한편 변호사 아드리안 탄(55)은 “크레이지(미친 듯이) 부자”와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있음에도 싱가포르 국민들은 싱가포르가 대부분 중산층으로 이뤄져 있다고 생각한다는 점이 아이러니하다고 지적했다. 이는 국민의 거의 80%가 고품질의 공공 주택에 거주하며, 질 좋은 광대역 통신 서비스나 교육 제도 등에 쉽게 접근할 수 있다는 점에 기반하고 있다. 탄 변호사는 SNS에 자신의 가난했던 과거에 대한 글을 올린다. 정부의 초기 공공 주택 개발 프로젝트 일환으로 지어진 “작은 아파트”에 살았으며, 전화기나 TV도 없었다고 한다. 탄 변호사는 BBC와의 인터뷰에서 “싱가포르 국민들은 개인별 미세한 경제적 지위 차이에 예민하게 반응하고, 부의 축적 수준에 따라 서로를 판단한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자신들이 생각하는 명품에 대한 “일반적인 합의”에 대해 가브리엘이 “무지하다”고 느꼈기에 일부 사람들이 조롱하는 댓글을 단 것이라고 덧붙였다. “찰스앤키스 가방 정도를 살 여유가 있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특별히 부유하거나 특권층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한편 전략 정책 자문 기업 ‘바우어 그룹 아시아’의 니디아 니야오 이사는 싱가포르의 그 유명한 ‘5C’ 기준을 넌지시 언급하며 “특히 최근 몇 년간 부유해진 싱가포르만을 경험한 청년 세대가 이러한 태도를 바꾸긴 어려울 것”이라고 내다봤다. ‘5C’란 1990년대 싱가포르에서 생겨난 새로운 성공 기준으로, 재산(cash), 좋은 직장(career), 승용차(car), 신용카드(credit card), 아파트(condominium) 등을 뜻한다. 가브리엘의 이후 게시물에 긍정적인 댓글이 달리기 시작한 이유에 대해 니야오 이사는 사회적 평등에 대한 논의가 청년 세대에서 점점 더 공감을 불러일으키고 있다는 점을 꼽았다.

싱가포르의 샤넬 매장

Getty Images
각종 명품 브랜드로 넘쳐나는 싱가포르 쇼핑몰

한편 탄 변호사는 싱가포르 국민들이 빈곤층의 어려움엔 “빠르게 반응”하면서도 최저임금과 같은 사회구조적 개혁에는 관심이 적다고 지적했다.

“싱가포르 국민들은 전반적으로 자신들이 만든 사회에 만족하기에 ‘깨지지 않았다면 개혁하려 들지 말라’는 태도가 자리 잡고 있다”는 설명이다.

그러나 당국은 사회적 불평등 완화를 위한 개입에 열을 올리고 있다.

지난 2018년 리셴룽 현 총리는 성적이 최상위권인 학생들만 입학가능한 엘리트 학교들이 “(사회) 폐쇄 회로로 영구화할” 위험이 있다고 경고했으며, 옹예쿵 교육부 장관은 계층 이동 등의 사회적 이동성이 떨어졌다고 언급했다.

옹 장관은 “현재 정부가 더 강력하고 발전된 지원책을 제공하고 있음에도 여전히 계층 상승을 이룰 수 없는 사람들의 상황은 과거 빈곤층의 상황보다 더 암울하고 힘들다”고 설명했다.

이미 싱가포르 정부는 이미 연간 예산의 3분의 1 이상을 교육, 의료, 주택 지원에 지출하고 있다. 또한 코로나19 팬데믹 기간엔 노동자, 기업, 가계를 지원하기 위해 거의 590억싱가포르달러에 달하는 자금을 쏟아부었다.

또한 사회적 불평등 완화 조치 일환으로, 최근 인상된 상품 및 서비스세(GST)의 충격을 상쇄하고자 식료품 구입 및 생활비로 사용 가능한 수백 달러 치 바우처를 가정에 공급했다.

이뿐만 아니라 웡 부총리 및 재무장관은 앞으로 부유층이 더 많은 세금을 내야 한다면서 부유세 관련 아이디어를 제시하기도 했다.

한편 가브리엘은 SNS에서 벌어진 폭풍과 그 여파에 대해 여전히 낙관적이다.

“싱가포르에 사는 게 좋다”는 가브리엘은 “(이번 사건이) 싱가포르에 대한 내 감정에 영향을 끼치진 않았다고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이번 사건을 통해 내 의견에 반대하는 사람도 언제나 있을 수도 있다는 점을 다시 한번 배웠고, 모두를 기쁘게 할 순 없다는 걸 느꼈습니다.”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1
0
+1
0
+1
0
+1
0
+1
0

랭킹 뉴스

실시간 급상승 뉴스 베스트 클릭

금주 BEST 인기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