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벽 가까이 최대한 붙어 갑니다. 신속히 움직이세요. 한 줄로. 한 번에 몇 명씩만.”
우크라이나 동부 바흐무트에서 BBC 취재진을 호위하는 우크라이나 군은 마치 스타카토 음처럼 짧게 지시했다.
한때 스파클링 와인으로 유명했던 바흐무트는 이제 전쟁으로 상처가 가득하다.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이 “우리의 요새”라고 묘사한 이곳 바흐무트를 점령하고자 지난 6개월간 러시아군은 집요하게 굴고 있다. 우크라이나군은 러시아가 전쟁 1주년을 앞두고 이 도시를 무너뜨리고자 한층 더 공세를 강화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우리는 맑고 푸른 하늘 아래 건물 잔해가 나뒹구는 차가운 거리를 신속히 이동했다. 러시아 드론이 날기엔 최적의 화창한 날씨였다.
우리가 길을 건너자마자 맞은편에서 러시아 포탄 2발이 우리 뒤로 쾅쾅 내리쳤다. 몸을 돌려 검은 연기가 피어오르는 모습을 보다가 이내 다시 곧장 달렸다.
과연 무작위 공격이었을까, 아니면 우리를 겨냥한 것일까. 확신할 수 없지만 바흐무트에선 군인이든 민간인이든 움직이는 모든 존재는 목표물이 된다.
몇 시간 동안 서로를 향한 포격이 쉴 틈 없이 이어졌다. 머리 위에선 러시아 전투기 한 대가 으르렁거린다. 불과 2km밖엔 러시아군이 진을 치고 있다.
일부 지역에선 시가전이 벌어지기도 하지만 여전히 우크라이나군은 영하로 떨어지는 혹독한 날씨와 탄약 부족 상황에도 바흐무트를 잃지 않았다.
93 기계화 여단의 미하일로 대위는 “모든 종류의 탄약, 특히 포탄이 부족하다. 서방 동맹국의 암호화된 통신 장치와 병력 이동용 장갑차가 필요한 상황”이라면서도 “그래도 우크라이나 군은 잘 해내고 있다. 이번 전쟁의 주요 교훈 중 하나는 제한된 자원으로도 싸워내는 법”이라고 설명했다.
우크라이나 군이 러시아 진지를 목표로 60mm 박격포를 쐈다. 첫 번째 박격포는 요란한 쾅 소리와 함께 날아갔다. 그러나 두 번째 포는 발사되지 않았다. 우크라이나군의 탄약 부족 문제를 느낄 수 있는 순간이었다.
쉭쉭 거리는 연기와 함께 “불발”되면서 박격포 부대는 엄호하고자 애썼다. 탄약은 해외에서 온 오래된 재고품이라고 했다.
바흐무트를 두고 벌어지고 있는 전투는 이번 전쟁에서의 전쟁이라고 할 수 있다. 이번 전쟁 중 가장 치열한 전투 일부가 이곳에서 현재 러시아군은 아주 조금씩 세력을 넓혀가고 있다.
악명 높은 민간 용병회사 ‘바그너 그룹’ 소속 용병들도 속속 바흐무트에 도착했다. 러시아 시신으로 가득 찬 땅도 있다는 보도도 있었다.
이제 바흐무트 도시로 들어가는 주요 도로 2곳은 실질적으로 러시아 손에 넘어갔으며, 가느다란 보급 통로 하나만 후방 이동 경로로 남아있다.
93여단의 공보관 이리나는 “러시아군은 지난해 7월부터 바흐무트를 점령하려고 자 노력하고 있다”면서 “그리고 현재 조금씩 러시아가 이기고 있다. 러시아 쪽 자원이 더 많기에 전투가 길어진다면 저들이 이길 것이다. 얼마나 걸릴지 알 수 없는 상황”이라고 설명했다.
“러시아군의 자원도 언젠가 고갈되겠죠. 정말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우리는 은밀히 숨겨진 사격 진지에서 벙커로 이동했다. 벙커는 윙윙거리는 발전기의 소리와 난로의 따뜻함으로 가득했다. 그러나 우크라이나 군은 난로 연기를 감추고자 애썼다. 위치가 발각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한편 바흐무트에선 절대 멈추지 않겠다며 결연하게 다짐하는 군인을 만나볼 수 있었다.
위장복을 입은 지휘관 이호르는 전쟁으로 단련된 단호한 목소리로 “저들은 우리가 바흐무트를 떠나게 하려고 포위하려고 한다. 그러나 소용없다”면서 “지금 이곳은 우리가 지키고 있다. 지속적인 포격에도 불구하고 물자 수송도 가능하다. 물론 우리 쪽도 손실이 있지만 버티고 있다. 우리에겐 계속 승리를 향해 나아가는 선택지 하나뿐”이라고 말했다.

물론 우크라이나군에겐 더 늦기 전에 바흐무트에서 철수하는 또 다른 선택지도 있다. 그러나 현장에서 만난 군인들은 퇴각엔 별 흥미가 없어 보였다.
미하일로 대위는 “만약 본부에서 그런 명령이 내려진다면, 명령은 명령이니 (따를 것)”이라면서도 “철수한다면 지난 몇 달간 우리가 이곳에서 버틴 건 무슨 의미가 있나? 우리는 철수하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바흐무트를 위해 목숨을 바친 이들에 대해 “조국을 사랑했던 훌륭하고 용감한 사람들”이라고 기억했다.
만약 바흐무트에서 우크라이나군이 물러나면 러시아군은 크라마토르스크나 슬로비얀스크와 같은 우크라이나 동부의 더 큰 도시를 향해 더 수월하게 진격할 수 있게 된다.
러시아가 동부 돈바스 지역과 남부의 다른 최전방 지역에서 공세를 강화한 가운데 우크라이나 측은 러시아가 새롭게 공세가 이미 시작됐다고 말했다.
전쟁 1주년이 될 이번 달 24일을 앞두고 러시아군은 시간을 재고 있다. 미하일로 대위 또한 “저들은 소위 ‘승리의 날’을 선언하는 데 혈안이 돼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벙커에서 만난 키가 크고 마른 체형의 지휘관 빅토르는 바흐무트에서의 소모전으로 러시아군이 지치게 될 수도 있다고 설명했다.
벙커 선반에서 러시아 잡지를 집어 든 빅토르 지휘관은 “현재 러시아군은 방어하지 않는다. 공격만 한다”면서 “계속해서 몇 미터씩 점령지를 넓혀가고 있지만 우리 군은 가능한 한 빼앗기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있다. 적군을 이곳에 붙잡아두고 지치게 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의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
한편 어디서 찾을지만 안다면 바흐무트엔 여전히 소수의 주민이 살고 있다.
기부받은 식료품이 담긴 상자를 지나 문을 열고 ‘무적의 중심지’라고 불리는 곳에 들어가면 후끈한 열기와 빛을 만날 수 있다.
한 때 복싱장이었던 이곳은 지역 주민들이 휴대전화를 충전하고, 뜨거운 음식을 먹고, 전우애를 다지는 등 잠시 쉬어가는 공간으로 변했다.

우리가 방문했을 때 그곳은 이미 사람으로 가득 차 있었다. 나이 든 여성들은 난로 주위에 모여 있었고, 어린아이 2명이 권투 링에 앉아 TV 화면에 달라붙어 전쟁 게임을 하고 있었다.
민간인 5000여 명이 여전히 수도도 전기도 끊긴 바흐무트에 남아있다. 대부분 고령이거나 넉넉하지 않은 형편이다. 또한 한 우크라이나인에 따르면 “친러시아 성향인 자들도 있다. 러시아군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라고 한다.
이곳 쉼터에서 어린 남동생과 여동생을 지켜보던 심리학자 테티아나(23)는 바흐무트에선 모두가 자신만의 싸움을 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테티아나는 거동이 불편한 86세의 할머니가 있어 떠나지 못했다.
“주민 대부분이 신에게 기도하며 이겨내고자 한다”는 테티아나는 “신앙이 도움이 된다. 어떤 이들은 자신이 인간이라는 사실을 잊고 공격성을 보인다. 동물보다도 못한 행동을 보이기도 한다”고 말했다.
우리는 그렇게 폐허가 된 도시에서 울려 퍼지는 포탄 소리와 전투를 뒤로한 채 바흐무트를 빠져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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