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튀르키예(터키)에 세워진 텐트가 시리아-튀르키예 국경지역에 세워진 벽에 닿을 것처럼 가까웠다.
국경 건너 시리아에 사는 사람들은 10년 이상 지속된 시리아 내전으로 난민이 됐을 수도 있다. 그와 동시에 지진의 피해자일 수도 있다. 시리아의 고난은 그렇게 반복됐다.
이번 지진은 국경과 상관없이 두 나라 모두에 큰 피해를 입혔다. 그러나 국제적 구호의 손길은 국경 검문소를 넘어가지 못했다.
튀르키예 남부 지역에서는 무거운 장비를 든 수천 명의 구조 대원, 구급 대원, 탐지견이 거리를 가득 메웠고 여전히 생존자를 찾기 위해 노력 중이다. 하지만 반군이 장악한 시리아 북서부 국경지역은 상황이 다르다.
기자는 튀르키예 안타키아 지역에서 4일을 보낸 뒤 막 국경을 넘었다. 안타키아에서는 밤새도록 구급차 사이렌이 울리고 하루 종일 콘크리트를 부수는 요란한 굴착음이 뒤섞여 구호 활동만으로도 불협화음 합주곡이 울려 퍼지는 중이었다.
한편, 시리아 이들리브 지방 브사니아 마을의 올리브 나무 숲은 대부분 침묵에 싸여있었다. 이 국경지역 마을에는 한때 새로 지은 집들이 가득했다. 이제는 100채 이상이 무너지고 폐허로 변해, 하얀 먼지 돌풍만이 유령처럼 농지 위를 가로질렀다. 흰모래로 뒤덮인 마을 잔해를 오르던 중 폐허 사이에서 틈이 보였다. 그 안쪽으로 온전하게 보존된 욕실의 분홍색 타일이 보였다.
지진은 아부 알라의 집을 집어삼켰고 두 자녀의 목숨을 앗아갔다.

그가 잔해 더미를 가리키며 “침실이 저기 있다. 저게 우리 집이다”라고 말했다.
“아내, 딸과 함께 여기서 자고 있었습니다. 15살 난 왈라는 방 가장자리 발코니 쪽에 있었어요. 불도저가 아이를 찾아내서 제가 데려와 묻었습니다.”
아부 알라는 여진이 산비탈을 뒤흔들 때 어둠 속에서 아내와 함께 올리브 나무에 매달렸다.
시리아 반군 점령 지역에서 작전을 수행하는 ‘하얀 헬멧'(시리아 민방위군)은 곡괭이와 지렛대로 할 수 있는 일을 했다. 영국 정부가 구조대에게 자금을 지원하지만, 현대적인 구조 장비가 부족한 상황이다.
아부 알라는 실종된 13세 아들 알라를 수색하던 과정을 설명하면서 무너져내렸다.
“다음 날 저녁까지 계속 땅을 팠습니다. 신께서 구조대에게 힘을 주시길 바랍니다. 그들은 제 아들을 파내려 지옥을 견뎌야 했습니다.”
아부 알라는 소년을 누이 옆에 묻었다.
브사니아는 작았지만, 돌아갈 집이었다. 현대적인 아파트 건물이 늘어섰고, 발코니는 시리아 시골에서 튀르키예로 향하는 길을 마주 보고 있었다. 아부 알라는 브사니아가 활기찬 마을이었다고 말한다. “좋은 이웃과 좋은 사람들이 모였습니다. 이제는 세상에 없군요.”
신실했던 그는 상실감에 빠졌다. “이제 뭘 하면 좋을까요? 텐트도, 원조도, 아무것도 없습니다. 신의 긍휼 외에는 받은 것이 없습니다. 그저 거리를 배회하기 위해 여기 남아 있습니다.”
기자가 떠날 때, 아부 알라가 텐트를 갖고 있는지 물었다. 하지만 그에게 줄 수 있는 것이 없었다.
‘하얀 헬멧’을 만나러 가던 중에는 그들이 생존자를 찾고 있을 것으로 기대했다. 하지만 너무 늦었던 모양이다. 수많은 노력 끝에 지쳐버린 이스마일 알 압둘라는 시리아 국민을 도외시하는 세계의 시선을 묘사했다. 그는 국제사회에도 책임이 있다고 말했다.
“우리는 120시간 이상이 지난 후에 생존자 찾기를 중단했다”며 “사람들을 구하려고 최선을 다했지만 구하지 못했다. 아무도 우리 목소리를 듣지 않았다”라고 말했다.
” 처음부터 긴급 조치와 도움을 요청했지만, 아무도 응답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우리는 여러분 곁에 있습니다’라고 말할 뿐 아무것도 없더군요. 우리는 장비가 필요하다고 했지만, 아무도 응답하지 않았어요.”

스페인 의사 몇 명을 제외하고 이 지역에 도착한 국제 구호팀은 없다. 이곳은 바샤르 알아사드 시리아 대통령의 통치에 저항하는 지역이다.
튀르키예의 보호 아래, 한때 알카에다에 협력했던 이슬람 단체 ‘하야트 타흐리르 알샴'(HTS)가 통제하고 있다. HTS는 이제 알카에다와의 연결을 끊었지만, 대부분의 국가 정부가 HTS와 관계를 형성하지 않았다. 시리아에 있는 내내, 촬영을 원하지 않는 무장 남성들이 기자를 따라다니며 멀찍이 서 있었다.
시리아 내전이 중단된 지 10년이 넘었지만, 이 지역에 거주하는 주민 170만 명은 계속해서 아사드 대통령의 통치에 반대하고 있다. 그들은 임시 캠프와 새로 지은 대피소에서 산다. 대부분 한 번 이상 난민 생활을 겪은 만큼, 지진 전에도 이곳의 삶은 매우 힘들었다.
여기까지 도달하는 국제적 지원은 미미한 수준이다. 많은 지진 희생자가 시리아계 미국인 의료 협회(SAMS)가 지원하는 ‘밥 아르하와’ 병원으로 이송됐다. 일반외과 의사 파루크 알 오마르에 의하면, 한 대뿐인 초음파 장치로 지진 직후 환자 350명을 치료했다.
그에게 국제 원조에 대해 묻자 고개를 저으며 웃었다. “이 주제에 대해 더 이야기하긴 힘들군요. 이미 같은 내용을 몇 번이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죠. 평소에도 의료진이 부족했던 곳입니다. 지진 이후의 참상이 어떨지 상상해 보세요.”
복도 끝 인큐베이터에 작은 아기가 누워 있다. 모하마드 가야트 라자브의 멍든 머리에는 붕대가 감겨 있다. 작은 가슴팍이 인공호흡기에 의지해 위아래로 움직인다. 의사들은 아기를 생후 3개월 정도로 추정했다. 부모는 모두 지진으로 사망했고, 이웃이 어두운 잔해 속에서 울던 아기를 발견했다.
의사는 시리아 사람들이 여러 번 버림받았고 무시당하는 데 익숙해졌다고 말했다. 그러나 지원의 손길이 없다는 사실에 여전히 분노하고 있었다.
하렘 마을의 파델 가답은 이모와 사촌을 잃었다.
그는 유엔(UN)이 보낸 구호품이 어떻게 트럭 14대 분량에 그칠 수 있느냐고 물으며 “우리는 여기서 아무것도 받지 못했다. 사람들은 거리에 방치됐다”고 말했다.
이후 시리아에 추가 원조가 도착했지만 규모는 너무 작았고 시기는 너무 늦었다.
국제 구조 팀이 없는 하렘에서는 아이들이 잔해를 옮긴다. 한 남성과 소년 두 명이 자동차 잭을 사용해 무너진 건물 잔해를 부수고 동물을 구조해 사료를 조심스럽게 담요 위에 올려놓았다. 시리아에 산다고 해서 목숨이 더 가벼워지는 것은 아니련만, 더 위태로워지는 것은 사실이다.
하루가 저물고 기자는 떠나야 했다. 다시 국경을 넘어 튀르키예로 돌아가 교통 체증이나 구급차, 건설 장비에 가로막혀 국내 및 국제 구호 사이의 불협화음을 마주할 것이다.
튀르키예 구조 대원이 잔해에 묻힌 지 132시간 만에 한 여성의 생존을 확인했다는 소식이 전화를 울렸다. 등 뒤로 멀어지는 시리아에서는 어둠이 내리자 침묵만이 맴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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