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상위로 투사되는 초록빛 레이저

PHILIPPINE COAST GUARD
필리핀은 중국이 자국 선박에 레이저를 투사했다며 비난했으나, 중국 측은 이를 부인했다

이번 주 중국은 유난히 바쁘고 또 기이한 시간을 보냈다.

소위 ‘스파이 풍선’을 둘러싼 논쟁이 11일째로 접어든 지난 13일(현지시간) 중국과 필리핀 사이에선 새로운 논쟁거리가 벌어졌다.

이번엔 레이저가 그 중심에 있다.

필리핀 당국이 중국이 필리핀 해안 경비정에 “군용급” 레이저를 투사했다며 비난하고 나선 것이다.

지난 6일 필리핀 해군이 남중국해 전초기지로 사용하는 시에라 마드레호에 보급품을 실어 나르려고 하던 참에 중국 선박이 필리핀 해안 경비정의 길을 막더니 레이저 장치를 사용해 일시적으로 선원들이 앞을 볼 수 없게 방해했다는 주장이다.

중국 측이 사용한 장비의 종류 및 강도에 대해선 정확히 밝혀진 바 없지만, 시력 손상을 위한 고안된 레이저 무기는 유엔(UN) 협약에 따라 금지돼 있다.

이에 미국, 호주, 일본, 독일 등 여러 나라가 즉각 비난하고 나섰다.

중국은 자국의 “주권”을 보호하기 위해 레이저를 사용할 권리가 있다고 주장하는 한편 신체에 무해한 “휴대용 레이저 속도 감지기와 휴대용 녹색등 포인터”를 사용한 것이며, 필리핀 선원 쪽으론 불빛을 겨누지 않았다며 부인했다.

한편 이번 갈등을 이해하기 위해선 물에 잠겨 있는 어느 암초 하나를 알아야 한다.

지난 2014년 BBC 취재진은 남중국해의 시에라 마드레호를 방문했다. 바다를 가로질러 태양이 떠올라도 수평선 어디에도 우리가 찾는 시에라 마드레호는 보이지 않았다.

이에 우리를 태운 선박의 선장은 엔진 소리 너머 “걱정하지 말라”면서 “이 길을 잘 안다. 저기 암초 위에 있다”고 설명했다.

선장이 가리키는 북쪽을 방향의 아침 안개가 걷히자 녹슨 회색빛 배 한 척이 보였다. 몇 피트 정도 물에 잠긴 거대한 암초 위에 좌초된 듯한 모습이었다.

사실 시에라 마드레호는 현역 시절에도 특별히 웅장한 군함은 아니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 탱크 상륙함으로 건조됐으며, 미 해군은 베트남 전쟁에서 이 배를 사용했다.

그러던 1970년 남베트남 해군에 넘어갔다가, 1975년 사이공 함락 이후 필리핀으로 넘어갔다.

그리고 1999년 필리핀 당국은 자국 해안에서 160km 떨어진 이 암초에 의도적으로 시에라 마드레 호를 올려 뒀다.

낡은 시에라 마드레호의 모습

BBC
세컨드 토마스 암초 지역에 있는 시에라 마드레 호

우리가 탄 작은 어선과의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선체를 뒤덮은 녹슨 큰 구멍이 눈에 띄었다. 다음번에 태풍이라도 분다면 당장 사라질 것 같은 모양새였다.

그렇지만 거의 10년이 지난 지금 시에라 마드레호는 더욱 녹슬었지만, 어찌 된 일인지 강철보다도 더 단단하게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그리고 그 불안한 선상엔 필리핀 해병대가 소수지만 여전히 머물고 있다.

한편 필리핀 선박을 가로막는 중국 해안경비대의 행동 또한 국제법 위반 사항일 수 있다. 중국 당국의 입장이 무엇이든 시에라 마드레 호 주변 수역은 중국의 소유가 아니기 때문이다.

중국과 필리핀 간 분쟁에 대해 지난 2016년 네덜란드 헤이그의 ‘상설중재재판소(PCA)’가 내린 판결은 명확했다. 중국이 남중국해 주변을 따라 그은 U자 형태의 ‘남해구단선’은 국제법상 그 근거가 없다는 것이다.

물론 남중국해 영유권 문제는 그리 간단하지 않다.

이곳 남중국해의 섬, 암초, 수역에 대해선 여러 주장과 또 반론이 난무한다.

그리고 그중에서도 중국은 가장 넓은 지역에 대해 영유권을 주장하고 있으며, 필리핀, 베트남, 대만, 말레이시아 모두 각자 서로 다른 주장을 펼치고 있다. 이러한 주장도 대부분 국제법상 근거가 미약하다.

필리핀의 녹슨 시에라 마드레호가 자리한 곳은 세컨드 토마스 암초로 필리핀에선 ‘아융인’, 중국에선 ‘런아이자오’로 부른다.

그러나 이 물에 잠겨있는 암초는 육지가 아니기에 국제법상 어떠한 국가도 암초에 대해선 영해를 주장할 수 없으며, 이를 바탕으로 배타적 경제수역(EEZ)의 확대를 주장할 수도 없다.

사실 남중국해에는 육지가 거의 없다. 남중국해 남부 해상에 있으며 가장 치열한 분쟁 지역인 스프래틀리 군도 또한 소수의 작은 암초로 이뤄졌다.

가장 큰 섬인 타이핑다오도 길이 1000m, 폭 400m에 불과하다. 역사적으로 어찌하다 보니 현재 이 섬은 대만이 실효 지배 중이다.

스프래틀리 군도에서 2번째로 큰 섬인 파가사섬은 30분 안에 한 바퀴를 돌 수 있는 크기로, 1971년 강력한 태풍을 피해 주둔하던 대만군이 철수한 이후 필리핀이 실효 지배 중이다.

베트남 또한 스프래틀리 군도에 속한 몇몇 산호섬을 실효 지배 중이다.

그러나 60년대와 70년대 문화대혁명 등 내부적으로 혼란했던 탓에 중국은 한발 늦었고 결국 이곳에 땅을 확보하지 못했다.

그래서 중국은 직접 땅 만들기에 나섰다.

남중국해상의 영토권 분쟁

BBC
중국이 주장하는 구단선(붉은색)과 유엔해양법협약(UNCLOS) 상의 배타적 경제수역 구분선(푸른색 점선)

소수의 필리핀 해병대가 시에라 마드레 호에 계속 머물던 지난 2014년 중국은 이로부터 40km 떨어진 미스치프 암초에서 대규모 간척 사업을 시작했다.

세계에서 가장 큰 해양 준설 선박을 동원해 자갈과 모래 수백만 톤을 암초 꼭대기로 퍼 올려 거대한 인공 섬을 만든 것이다.

이렇게 중국이 미스치프 암초에 새로 만든 인공섬은 국제사회가 인정하는 필리핀의 배타적 경제수역(EEZ, 자국의 연안으로부터 200해리(320km) 범위 내) 한참 안에 있다.

중국의 새로 만든 이 인공섬은 국제법상 인정되지 않기에 중국은 이 섬을 기반으로 한 영해(영토로부터 12해리 범위 내)를 주장할 수 없다.

그러나 중국은 대규모 해안 경비대와 해상 민병대 함대를 동원해 이러한 주장을 이어 나가는 한편 필리핀 어부들을 몰아내고 필리핀 해안 경비선에 싸움을 걸고 있다.

중국이 이렇듯 인공섬을 새로 건설한 점에 대해 추상적이며 법적인 내용과는 별개로 군사전략 용어로는 ‘현실을 기반한 사실’로 표현할 수 있다.

한편 필리핀은 중국의 이러한 야망이 미스치프 암초에서 그치지 않으리라는 점을 우려하고 있다. 낡디낡은 시에라 마드레가 상징적으로 중요한 존재인 이유다.

페르디난트 ‘봉봉’ 마르코스 주니어 대통령 정권이 30년 만에 미국에 자국 내 기지 사용을 허가하며 문을 열어 준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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