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의 계속된 핵실험으로 함경도 풍계리 핵 실험장 인근 지역의 주민 수십 만 명이 방사능 오염에 노출됐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한국의 인권 조사기록 단체 ‘전환기정의워킹그룹’은 21일 공개한 ‘북한 풍계리 핵 실험장 방사성 물질의 지하수 오염 위험과 영향 매핑’이라는 제목의 특별보고서를 통해 이같이 밝혔다.
4년 간 이 문제를 추적해온 전환기정의워킹그룹은 북한이 2006년부터 2017년까지 함경북도 길주군 풍계리에서 6차례 핵실험을 진행하면서 일대로 흘러간 지하수를 지역 주민들이 식수로 활용했을 것이라는 점에 주목했다.
특히 “핵 실험장 방사성 물질의 지하수 오염은 인근 지역에 거주하는 수십 만 명의 주민뿐만 아니라 농수산물과 특산물의 밀수와 유통으로 주변국 국민의 생명권과 건강권까지 위협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지하수를 통한 방사능 물질 유출과 확산
먼저 핵 실험장 반경 40km 이내 혹은 만탑산에서 장흥천, 남대천 수계를 따라 영향 받을 수 있는 범위는 함경북도와 함경남도, 량강도의 9개 시군(길주군, 화대군, 김책시, 명간군, 명천군, 어랑군, 단천시, 백암군)이다.
북한의 2008년 인구조사 결과, 이 지역의 인구는 약 108만 명에 달하는 것으로 추산된다. 특히 우려되는 부분은 주민들의 물 이용 실태다.
보고서는 북한이 지난 1990년 발간한 ‘조선지리전서’를 인용해 “풍계리 핵 실험장이 위치한 만탑산의 지하수가 장흥천으로 유입되고 있다”고 분석했다.
이어 2008년 인구조사 결과를 바탕으로 길주군이 포함된 함경북도의 여섯 가구 당 거의 한 가구(15.5%)가 지하수와 우물, 공동수도, 샘물 등을 식수로 사용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수도 시설이 열악한 북측 사정상, 식수를 지하수에 의존할 가능성이 크다는 얘기다.
그럴 경우 이 지역 주민 약 108만 명 가운데 영향을 받는 주민을 절반으로 가정하면 약 54만 명, 25%로 가정하면 약 27만 명이다. 이들이 방사능 물질이 포함된 지하수를 식수로 음용했을 것이라는 추정이 가능하다.
보고서는 “2006년 첫 핵실험 개시 이후 17년 넘는 기간의 사망자를 고려하면 영향 받은 주민은 더 많을 수 있다”고 진단했다.
이에 대해 최경희 샌드연구소 대표는 BBC에 “실질적으로 북한 지하수가 방사능에 오염됐다면 산맥이나 지하수 경로를 따라서 남쪽으로까지 확산될 가능성이 크다”며 “단순히 북한에 국한된 문제가 아니라 환경 차원에서도 남북한 모두의 문제”라고 강조했다.
오염 농수산물 한국 유통?
보고서는 또 해당 지역에서 자란 농산물과 송이버섯 등 특산물의 유통으로 한국과 중국, 일본 등 인접 국가 국민들도 위험할 수 있다고 전했다.
북한산 송이버섯은 특히 유명한데 중국산으로 둔갑해 한국 내 유통됐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는 것이다.
송이버섯은 북한의 수익성 높은 비밀 외화벌이 수단으로, 다른 지역이나 해외로 유통되는 것으로 전해졌는데 특히 칠보산 일대를 비롯해 풍계리 핵실험장 반경 40km 내 산과 들에서도 많이 자란다고 한다.
길주군과 백암군 출신 탈북민들은 “핵 실험장이 생기기 전에는 주민들이 만탑산 일대에서 송이버섯을 채취했고, 핵 실험장이 생긴 후로는 출입금지 구역 주변 산에서 채취가 계속됐다”고 진술한 것으로 알려졌다.
실제 지난 2015년 중국산으로 둔갑해 한국에 밀수된 북한산 농산물에서 방사능 물질이 검출됐다는 한국 정부의 발표가 있었다.
보고서는 “2015년 한국 당국은 중국산으로 둔갑해 북한으로부터 수입된 능이버섯에서 기준치의 9배 이상의 방사성 세슘 동위원소를 검출했지만 북한 내 원산 지역은 확인할 수 없다고 밝혔다”면서 “한국 정부가 2018년 문재인 대통령이 김정은 위원장으로부터 선물 받은 송이버섯을 방사능 검사 없이 이산가족 4000여 명에게 나눠주기도 했다”고 지적했다.
한편 일본 당국 역시 일본 내 친북단체인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조총련) 간부들을 송이버섯 밀수 관여로 체포, 기소한 바 있다.
중국산으로 둔갑한 북한의 송이버섯은 일본 송이버섯의 1/10 가격에 수요가 상당한 것으로 알려졌다.
보고서는 “풍계리 핵 실험장 방사성 물질의 확산에 대해 한국은 물론 유엔이나 국제원자력기구(IAEA)에서 북측에 공동조사를 제안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인근 거주 탈북민이 피폭됐을 가능성
지난해 12월까지 한국에 온 탈북민은 총 3만3882명이다.
이 가운데 2006년 북한의 1차 핵실험 후 그리고 탈북 전에 풍계리 인근의 함경북도, 함경남도, 량강도의 8개 시∙군(길주군, 화대군, 김책시, 명간군, 명천군, 어랑군, 단천시, 백암군)에 거주했던 사람은 모두 881명 그리고 2017년 9월 6차 핵실험 이후의 탈북민은 20명으로 확인됐다.
보고서는 “북한산 농수산물을 찾아 검사하고 원산 지역을 확인하는 것도 의미 있지만 역학적으로 더 직접적이고 효과적인 방법은 풍계리 핵실험장 인근 지역에 살았던 탈북민을 면담 조사를 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앞서 처음 관련 문제 제기를 한 사람은 샌드연구소의 최경희 대표다.
그는 탈북민 연구를 하던 중 길주 출신 탈북민들이 건강 이상 증세를 호소하는 것을 발견, 2016년 7월 북한의 1~3차 핵실험 이후 수 년간 길주군에 거주한 탈북민 13명의 대상으로 심층 인터뷰를 진행했다.
그들은 모두 원인 모를 두통과 체중 감소, 감각기능 저하 등 신체 이상을 호소하고 있었다.
최 대표는 이후 길주군 출신 탈북민 10명을 추가로 인터뷰한 뒤 그 중 5명에 대한 피폭 검사를 한국원자력의학원에 의뢰했다. 그리고 2016년 11월, 염색체 변이가 심각하다는 검사 결과를 받았다.
그러자 한국 통일부와 한국원자력의학원도 2017년, 2018년 길주군 일대 출신 탈북민들에게 방사선 피폭 검사를 실시했다.
하지만 피검자 수는 2017년 30명, 2018년 10명으로 모두 40명에 불과했는데 이 중에서도 “2017년 4명, 2018년 5명, 즉 9명(22.5%)이 우려할만한 수준의 염색체 이상을 보인 검사 결과가 나왔음에도 통일부가 북한의 반발을 의식한 듯 이를 공론화하는 것에 미온적이었다”고 보고서는 밝혔다.
통일부는 당시 일부에게서 피폭을 의심할 수 있는 검사 결과가 나왔지만 핵실험 영향으로 단정할 수는 없다고 밝힌 바 있다.
보고서는 아울러 “당시 통일부가 후속 검사도 이유 없이 중단했고 2023년 2월 현재까지 재개되지 않고 있다”며 “풍계리 핵 실험장 일대에서 1~2차 핵실험 시기에 있었던 사람들보다 3~6차 핵실험 시기까지 있었던 사람들에게 염색체 이상이 더 많고 방사선량도 높은 경향이 있다”면서 추가 검사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최경희 대표는 “후쿠시마 원전 문제가 시끄럽지만 사실상 풍계리 길주군이 한국과 더 가깝다”면서 “비판만 하지 말고 그것을 관리할 준비가 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또 “국제사회가 그렇게 핵과 인권에 대해 논하면서 핵 실험장 인근에 사람이 살고 있다는 데 대해선 관심을 갖지 않는다는 데 대해 충격을 받았다”며 “생명권을 외면하지 말고 피폭 탈북민에 대한 정부 차원의 전수 조사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와 관련해 통일부는 “향후 탈북민 중 방사능 피폭 관련 건강 이상증세를 호소하거나 검진 등 도움을 요청하는 사례가 발생하는 경우 유관기관과 협력해 관련 조사 재개 등을 검토하겠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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