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의 키를 잡고 있는 푸틴 대통령

RUSSIAN GOVERNMENT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은 지난 20여 년간 러시아를 이끌었다

3년 전 러시아 국영 방송에서 본 내용이 아직도 생각난다.

당시 러시아에선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향후 16년간 더 권력을 유지하기 위한 헌법 개정을 지지해야 하는 분위기였다.

국영 TV 뉴스 진행자는 푸틴 대통령을 세계적인 불안의 폭풍우 속에서 러시아라는 좋은 배를 이끄는 선장으로 묘사하며 대중을 설득하고자 했다.

“러시아는 안정적인 오아시스이자 안전한 항구”라는 이 앵커는 “푸틴이 아니었다면 우리는 어떻게 됐겠는가”라고 덧붙였다.

이제 안정적이고 안전한 오아시스는 물 건너간 듯하다.

지난해 2월 24일, 크렘린궁의 선장은 자신이 만든 폭풍 속에서 출항을 감행했다. 그리고 곧장 빙산으로 돌격했다.

푸틴의 침공은 이웃국 우크라이나를 죽음과 파괴의 길로 내몰았다.

그러나 이번 정쟁으로 러시아 또한 엄청난 군 사상자를 냈다. 일부에선 숨진 러시아 군인이 수만 명대일 것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러시아 국민 수십만 명이 징집됐으며 러시아 당국은 (살인으로 유죄 판결받은 범죄자를 포함한) 죄수들 또한 우크라이나 전쟁터에 내보내고 있다.

또한 이번 전쟁은 전 세계 에너지 및 식량 가격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쳐 유럽은 물론 전 세계 안보를 지속해서 위협하고 있다.

하나같이 굵직굵직한 문제다.

그렇다면 왜 푸틴은 전쟁과 영토 정복의 길을 택했을까.

기념식에 참석한 푸틴 대통령

EPA
지난 23일 조국 수호의 날을 맞아 군사 기념식에 참석한 푸틴 대통령

이에 대해 러시아 정치학자 에카테리나 슐만은 “2024년 러시아 대통령 선거가 다가오고 있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대선을 치르기 2년 전인 2022년 푸틴 측은 무언가 승리를 거둘 사건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목표를 달성하기로 마음을 먹었습니다.”

“2023년 올해 러시아 당국은 국민들의 마음속에 험난한 물살을 헤치고 이끌어줄 뿐만 아니라 자신들을 새롭고 더 부유한 해안으로 이끌어 줄 선장이 있어 얼마나 행운인지를 주입할 것입니다. 그리고 2024년 국민들은 투표장으로 향하겠죠. 생각해보세요, 계획대로 흘러가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이 계획이 잘못된 가정과 계산에 근거했다면 어긋날 가능성도 충분하다.

러시아 당국은 이번 ‘특별 군사 작전’이 번개같이 빨리 끝나리라 예상했다. 침공 몇 주 안에 우크라이나 행정부가 무너져 러시아의 위성국으로 전락할 것이라는 가정이었다.

푸틴은 우크라이나의 저항 및 반격 능력과 이를 지지하는 서방 세계의 결의를 매우 과소평가했다.

그러나 푸틴은 우크라이나 침공이 실수라는 점을 아직 인정하지 않고 있다. 오히려 판을 키우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2가지 중요한 질문을 던지게 된다. 푸틴은 앞으로 1년 뒤 상황에 대해 어떻게 내다보고 있으며, 또 우크라이나에서의 푸틴의 다음 수는 무엇일까.

이번 주 푸틴의 행보를 통해 우린 몇 가지 단서를 얻을 수 있었다.

푸틴의 국정 연설은 서방 세계를 향한 분노로 가득 차 있었다. 푸틴은 지속해서 우크라이나 전쟁은 미국과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탓이라며 비난의 화살을 돌렸다. 물론 러시아를 무고한 입장으로 표현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게다가 미국과 유일하게 남은 핵무기 마지막 남은 핵무기 통제조약인 ‘신전략무기감축협정(뉴스타트)’ 참여 중단도 선언했다.

이는 우크라이나에서 철수하거나 서방과의 교착상태를 끝낼 의사가 없음을 보여준다.

다음날인 22일 수도 모스크바의 축구 경기장에서 푸틴 대통령은 최전방에서 돌아온 러시아 군인들을 맞았다. 잘 짜인 친정부 집회에 나타난 푸틴 대통령은 대중을 향해 “지금 (러시아의) 역사적 국경에서 전투가 벌어지고 있다”며 러시아의 “용기 있는 전사들”을 칭찬했다.

이를 통해 내릴 수 있는 결론은 하나다. 러시아는 유턴하지 않는다. 이 러시아 대통령은 행동을 되돌릴 생각이 없다.

관중 앞으로 입장하는 푸틴 대통령

Reuters
푸틴 대통령은 22일 축구 경기장에서 열린 집회에서 국기를 흔드는 대중을 향해 연설했다

푸틴 대통령의 경제 보좌관 출신인 안드레이 일라리오노프 또한 “푸틴은 저항에 직면하지 않는 이상 갈 수 있는데까지 갈 것”이라면서 “군사적 제지 외에는 푸틴을 막을 방법은 없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탱크가 왔다 갔다 하는 지금, 푸틴 대통령은 평화 협상에 응할까.

이에 대해 일라리오노프 전 보좌관은 “가능하다”면서도 “우리는 푸틴과 함께 협상 자리에 앉아 여러 번 합의해봤다”고 언급했다.

“푸틴은 이 모든 합의안을 어겼습니다. ‘독립국가연합’ 창설에 관한 협정, 우크라이나와의 양자 조약, 국제사회가 인정한 우크라이나와의 국경 관련 조약, 유엔(UN) 헌장, ‘1975년 헬싱키 협정’, ‘부다페스트 안전 보장 각서’ 등 푸틴이 파기하지 않을 합의는 없습니다.”

물론 러시아는 서방이야말로 번번이 약속을 어겼다며 앙심을 품고 있다. 그중에서도 러시아가 가장 이를 갈고 있는 건 NATO 관련 약속이다. 서방이 1990년대에 NATO는 동진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어겼다는 것이다.

그러나 푸틴은 집권 초만 해도 NATO를 별로 위협적인 존재로 생각하지 않는 듯했다. 심지어 2000년엔 러시아의 가입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기도 했다.

그로부터 2년 후 우크라이나의 NATO 가입 추진 의도와 관련해서도 푸틴은 “우크라이나는 주권 국가이며, 자국의 안보를 보장하는 방법을 스스로 선택할 권리가 있다…”고 답하면서 이번 사안이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간 관계를 방해하지 않을 것이라고 언급한 바 있다.

연설하는 푸틴 대통령

Getty Images
지난 22일 연례 국정 연설 중인 푸틴 대통령

그러나 2023년의 푸틴은 매우 다른 사람이다.

“집단적 서방 세계”에 대한 분노로 이를 가는 푸틴은 자신을 러시아를 파괴하려는 적에게 포위된 요새의 지도자로 보고 있다.

또한 여러 연설이나 논평에서 표트르 대제나 예카테리나 2세와 같은 제정 러시아 시대 통치자를 언급하는 것으로 보아 자신이 어떤 형태로든 러시아 제국을 재현할 운명이라고 믿는 듯하다.

하지만 이로 인해 러시아가 치러야 할 대가는 무엇일까.

한때 푸틴은 러시아를 안정시킨 지도자로 인기를 끌었다.

그러나 갈수록 증가하는 군 사상자, 동원령, 경제 제재 속 푸틴의 인기는 사라졌다. 러시아인 수십만 명이 고국을 떠났다. 그런데 이렇게 떠난 이들 중엔 젊고, 숙련되고, 교육받은 이들이 많다. 그리고 이는 러시아 경제에 훨씬 더 큰 타격을 입힐 두뇌 유출로 이어진다.

게다가 이번 전쟁으로 갑자기 푸틴 주변엔 ‘바그너 그룹’과 같은 민간 용병단체 나 지역 대대 등 총을 든 인물들이 많아졌다. 이들과 러시아 정규군과의 관계는 전혀 원만하지 않다.

러시아 국방부와 바그너 그룹간의 갈등은 이러한 지도층 내부의 분열을 잘 보여주는 좋은 예시다.

내부 불안정과 사병 조직은 위험한 조합이다.

이에 대해 러시아 일간지 ‘네자비시마야 가제타’의 소유주이자 편집장인 콘스탄틴 렘추코프는 “향후 10년 안에 내전이 러시아를 뒤덮을 것 같다’고 내다봤다. “기존의 부와 권력을 흔들고 재배치할 기회라는 걸 잘 아는 이익 집단이 너무나도 많다”는 것이다.

“내전을 피할 진정한 기회는 푸틴 이후 즉시 적절한 인물이 집권하는 길뿐입니다. 지도층보다 큰 권위와 이러한 상황을 이용하고자 하는 사람들을 내몰 결단력을 지닌 인물이어야 합니다.”

콘스탄틴 렘추코프의 모습

BBC
러시아 언론인 콘스탄틴 렘추코프는 러시아에 내전이 발발할 수 있다며 우려했다

렘추코프 편집장에게 “러시아 지도부에선 누가 적절한 인물일지 논의하고 있나”고 물었다.

“조용히 눈에 띄지 않게 논의하고 있습니다. 나중에 목소리를 낼 것입니다.”

“그러면 푸틴은 이러한 논의에 대해 알고 있습니까?”

“알고 있습니다. 푸틴은 모든 것을 알고 있는 듯합니다.”

한편 이번 주 러시아 하원의장은 “푸틴이 있는 한 러시아가 있다”고 발언했다.

이는 충성심을 보여주기 위한 발언일 뿐 사실이 아니다.

푸틴 이후에도 러시아는 살아남을 것이다. 러시아는 지난 수 세기 간 살아남았다.

그러나 푸틴의 운명은 이제 우크라이나 전쟁의 결과와 돌이킬 수 없을 만큼 단단히 얽혀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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