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스퍼드 대학 설립 500여 년 전, 인도의 날란다 대학은 900만 권의 장서를 보유하고 전 세계에서 1만 명의 학생들이 찾아오는 지식의 보고였다.

겨울 아침은 짙은 안개에 쌓여 있었다. 우리가 탄 차는 빠르게 달리는 마차를 지나쳐 방향을 바꿨다. 말과 터번을 두른 마부는 진주처럼 하얀 안개 속에서 유령처럼 흔들렸다. 이곳 인도 동부 비하르 주 시골에서는 마차가 여전히 운송 수단으로 많이 쓰이고 있었다.

나는 고대부터 이어진 정착지 보드가야 마을에서 하룻밤을 보냈다. 부처가 깨달음을 얻었다고 전해지는 곳이다. 그리고 날이 밝자마자 날란다로 떠났다. 날란다는 고대 세계에서 위대한 학문의 중심지 중 하나였다. 하지만 현재는 붉은 벽돌 유적만 남아있다.

날란다는 서기 427년에 설립된 세계 최초의 기숙형 대학이다. 900여만 권의 장서를 보유하고 동아시아와 중앙 아시아 전역에서 찾아온 학생들까지 합하면, 약 1만 명 학생들이 다니던 대학이다. 이른바 ‘중세의 아이비리그 교육기관’. 학생들은 의학과 논리학, 수학, 무엇보다 당대 가장 존경받는 학자들에게 불교의 원리를 배우고자 이곳에 모였다. 이곳을 두고 달라이 라마는 “우리가 가진 모든 (불교) 지식의 원천은 날란다에서 왔다”고 말하기도 했다.

날란다는 약 700여 년간 번영을 누렸다. 수도원 형태의 이 대학은 옥스퍼드 대학은 물론,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대학인 볼로냐 대학보다 500년 이상 앞서 문을 열었다. 철학과 종교에 대한 날란다의 계몽적 학문은 대학이 사라진 훨씬 후에도 아시아의 문화에 녹아들었다.

흥미롭게도, 불교 수도원 대학을 설립한 굽타 제국의 왕들은 독실한 힌두교도였다. 하지만 그들은 불교와 점점 커지던 당대 불교의 학문적 열정 및 철학적 저술을 호의적으로 수용했다. 그들의 통치 하에서 자유로운 문화 및 종교 전통이 진화했고, 날란다는 지식을 기반으로 한 불교와 다른 분야에서 발전된 지식을 혼합해 다양한 학문 체계를 만들었다.

자연 기반 치유에 뿌리를 둔 고대 인도의 아유르베다의 의학도 날란다에서 널리 가르쳐졌다. 그리고 동문들을 통해 인도 내 다른 지역으로 퍼져나갔다. 넓은 마당을 강의실과 기도실로 둘러싸는 캠퍼스 디자인은 다른 불교 시설에도 영향을 미쳤다. 그리고 이곳에서 나온 스투코(건축의 천정, 벽면, 기둥 등을 덮어 칠한 화장도료) 장식은 태국의 사원 예술에 영향을 미쳤고, 금속 예술은 티베트와 말레이 반도로 전파됐다.

그러나 날란다의 유산 중 가장 심오하면서 여전히 영향력을 발휘하는 유산은 수학과 천문학 업적일 것이다.

‘인도 수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아리아바타는 서기 6세기에 이 대학을 이끌었다고 알려져 있다. 콜카타에서 수학을 가르치는 교수인 아누라드하 미트라는 “0을 숫자로 보는 혁명적인 개념을 통해 수학 계산이 단순해지고, 대수학과 미적분 같은 보다 복잡한 수학의 길이 열리게 됐다”며 “우리는 0을 숫자로 본 최초의 인물이 아리아바타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녀는 또 “0이 없었다면, 컴퓨터도 나올 수 없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그는 제곱근과 세제곱근을 추출하고, 삼각함수를 구면기하학에 적용하는 등 많은 선구적인 수학 업적도 남겼습니다. 달이 빛나는 게 햇빛을 반사하기 때문이라고 처음 주장한 것도 아리아바타였어요.”

이러한 연구들은 인도 남부 및 아라비아 반도 전역에서 수학과 천문학이 발전하는 데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대학은 불교의 가르침과 철학을 전파하기 위해 중국과 한국, 일본, 인도네시아, 스리랑카 등에 정기적으로 최고의 학자와 교수를 보냈다. 고대의 이러한 ‘문화 교류 프로그램’은 아시아 전역에 불교를 전파하는 데 기여했다.

날란다 유적은 현재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됐다. 이 대학은 1190년대에 바흐티야르 킬지가 이끄는 투르코-아프간 군의 침략으로 파괴됐다. 킬지는 인도 북부와 동부를 정복하면서, 불교 지식의 정수를 파괴하려 했다고 알려져 있다. 그런데 당시 대학 교정이 너무다 넓다 보니, 침략자들이 놓은 불이 학교를 다 태우는 데 석 달이 걸렸다고 한다. 그렇게 소실됐던 대학에서 오늘날 23만 제곱미터 규모의 유적지가 발굴됐다. 아마도 원래의 대학 교정 중 일부에 불과할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유적지에 남은 수도원과 사원들을 거닐다 보면, 이 전설적인 공간에서 공부를 한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를 어렴풋이 알게 된다.

나는 수도원의 현관과 사당이 있던 곳을 돌아봤다. 붉은 벽돌을 높게 쌓은 복도 벽을 미끄러지듯 지나자. 수도원의 안쪽 뜰이 나왔다. 휑뎅그렁한 직사각형 공간에 지면에서 약간 높게 쌓인 석조 플랫폼 하나만 우두커니 있었다. 내게 이곳을 안내해준 현지 가이드 캄라 싱은 “이 곳이 학생 300명이 수업을 듣던 강의실이었다”며 “플랫폼은 교수들이 수업하던 강단”이라고 말했다. 뜰 주위로 늘어선 작은 방들 중 한 곳에 들어가봤다. 아프가니스탄처럼 먼곳에서 찾아온 유학생들의 거처였다고 한다. 서로 마주보고 있는 두 개의 벽감(벽면을 우묵하게 들어가게 해서 만든 공간)은 석유 램프와 개인 소지품을 두는 곳이라 했다. 싱은 방 입구에 작고 네모난 형태로 움푹 파인 곳은 학생들의 개인 편지함 역할을 했다고 설명했다.

오늘날의 명문 대학처럼, 날란다도 입학이 어려웠다. 이곳에 지원하는 학생들은 내로라하는 날란다 교수진과 엄격한 구두 면접을 치러야 했다. 운 좋게 입학한 학생들은 인도 각처에서 온 교수들로부터 다방면으로 가르침을 받았다. 또한 다르마팔라, 실라브하드라 같은 당대 가장 존경 받는 불교 지도자들 밑에서 집단적으로 육성됐다.

이곳 도서관에는 종려잎에 필사된 900만 권의 장서가 있었다. 때문에 이곳은 세계에서 불교 지식이 가장 풍부한 곳으로 꼽혔다. 티베트 불교 학자 타라나타는 이 도서관의 건물 3동 중 하나를 “구름 속으로 솟아오른” 9층 건물이라고 묘사했다. 하지만 종려잎과 목판본으로 된 이곳의 소장 도서중 극히 일부만 침략을 피해 대학을 빠져나가던 승려들의 손에 들려 잿더미가 되는 것을 피했다. 그 자료는 현재 미국 LA 카운티 박물관과 티베트 야룰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중국의 불교 승려이자 여행가였던 현장은 날란다에서 수학하고 강의도 했다. 서기 645년 그는 날란다에서 가져온 657개의 불교 경전을 마차에 싣고 중국으로 돌아갔다. 현장은 세계적으로 영향력 있는 불교 학자가 됐고, 이들 책의 일부를 중국어로 번역해 일생동안 탐구했다. 그 탐구의 중심을 이룬 생각은 ‘온 세상은 마음의 표현’이라는 것이었다. 그의 일본인 제자인 도쇼는 훗날 이 교리를 일본에 소개했고, 그것이 중국과 일본으로 확산됐다. 현장이 ‘동방으로 불교를 가져온 승려’로 불리는 것은 이 때문이다.

현장은 날란다를 묘사하며, 부처의 주요 제자 중 한 명을 추모하기 위해 만들어진 ‘위대한 사리탑’을 언급한 적이 있다. 나는 팔각뿔 모양의 웅장한 구조물의 흔적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개방형 벽돌 계단이 ‘위대한 기념비’라고도 불리는 이 건물을 꼭대기까지 휘감고 있었다. 아름다운 치장 벽토로 외벽을 장식한 30m 높이의 사원 주변으로 잘 닦인 테라스에는 수많은 작은 사당과 봉헌탑이 있었다.

그곳에서 만난 뭄바이 출신의 역사 교사 안잘리 나이르는 “위대한 사리탑은 사실 이 대학보다 먼저인 기원 후 3세기 경 아소카 황제가 세운 것”이라며 “8세기에 걸쳐 여러 차례 재건되고 보수됐다”고 말했다. “이 봉헌탑들에는 이곳에서 살며 이 대학에 일생을 바친 승려들의 유골이 봉헌됐습니다.”

소실 이후 8세기 정도 지났을 무렵, 일부 학자들은 킬지의 부대가 날란다의 가르침이 이슬람과 경쟁한다는 생각에 날란다를 파괴했다는 이론에 이의를 제기했다. 인도의 선구적인 고고학자 중 한 명인 HD 산칼리야는 1934년에 쓴 저서 ‘날란다 대학’에서 불교를 뿌리뽑는 게 공격의 주된 동기가 되었을 수도 있지만 대학의 요새와 같은 모습과 그 안에 들어있는 부유함도 침략자들로 하여금 대학을 공격 목표로 삼기에 충분한 이유였다고 썼다.

현장 박물관 책임자인 샨카르 샤르마는 “침략이 일어난 결정적 이유를 콕 짚는 것은 어렵다”고 말했다. 박물관은 날란다 발굴 과정에서 나온 1만3000여 점의 유물 중 청동으로 조각된 부처상과 상아와 뼛조각 등 350점의 인공품을 선별적으로 전시하고 있었다.

유적을 함께 거닐던 샤르마는 “하지만 그게 날란다에 대한 첫 번째 공격은 아니었다”고 말했다. “날란다는 5세기에 미히르쿨라 휘하의 훈족에게 공격을 받았고, 8세기에는 벵골 가우다 왕의 침략으로 또다시 심각한 피해를 입었습니다.”

훈족들은 약탈을 목적으로 왔지만, 벵골 왕의 침공 원인은 단정하기 어렵다. 그들이 갖고 있던 시바 힌두 종파와 당시 불교도들 사이에서 적대감이 커져 생긴 결과라고 확정지을 수 없다는 것이다. 다만 두 번의 침략 이후 건물은 복구됐고, 통치자들의 후원으로 시설이 더 확장됐다.

샤르마는 “힐지가 이 신성한 학문의 성전을 침략했을 때는 인도에서는 불교가 전반적으로 쇠퇴하고 있었다”고 말했다. “불교를 믿으며 8세기부터 이 대학을 후원해온 팔라 왕조의 쇠퇴와 내부적 퇴보가 맞물리던 시기라, 세 번째 침략은 치명적이었습니다.”

이후 6세기 동안, 날란다는 점차 잊혀져갔다. 이후 묻혀있던 대학을 다시 발굴해낸 것은 1812년 스코틀랜드 측량사 프랜시스 뷰캐넌-해밀턴이었다. 그리고 1861년 알렉산더 커닝엄 경은 이 곳이 고대의 날란다 대학이라는 것을 알아냈다.

나는 작은 탑 주위에 서서, 진홍색 승복을 입은 젊은 승려 무리가 과거 사원으로 쓰였던 터를 둘러보는 것을 지켜봤다. 사원을 돌던 승려들은 단상으로 올라가 정좌를 했다. 자세를 고쳐 앉은 그들의 시선이 과거의 영광을 아로 새긴 ‘위대한 기념비’에 조용히 닿았다.

*‘세상을 바꾼 장소들’은 세계사에 중대한 영향을 미친 공간들을 다루는 BBC 트래블의 시리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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