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지컬 100'에 출연해 배를 끌고 있는 레슬링 선수 장은실과 팀원들

Courtesy Netflix
‘피지컬 100’에 출연해 배를 끌고 있는 레슬링 선수 장은실과 팀원들

여자 레슬링 선수 장은실이 격앙된 팀원들에게 “다시!”라고 외쳤다.

모래밭에서 무게 1.5톤짜리 나무배를 언덕 위로 끌어올려야 하는 상황. 배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장은실은 본인의 팀이 체급이나 상황상 가장 불리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이후, 장은실의 외침에 맞춰 배가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어진 8분 동안, 신음과 외침과 눈물 속에 배를 정박지까지 끌어올리는 데 성공했다. 지친 참가자들이 땀에 흠뻑 젖어 삐걱대는 몸으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이 프로그램을 아직 시청하지 않은 분들께 설명하자면, 이 장면이 넷플릭스 최신 블록버스터 ‘피지컬 100’에서 기자가 가장 좋아하는 순간이다. 이 서바이벌 방송은 다양한 배경을 가진 대한민국 최고의 운동꾼 100명을 모아 누구의 신체가 가장 뛰어난지 겨룬다. 올림픽 출전 선수, 피트니스 인플루언서, 소방관, 교도관 등이 참가했다. 남녀가 함께 경쟁하는 것도 아주 신선하다.

현실판 오징어 게임과 다름없다. 아무도 죽지 않는다는 스포일러가 있지만, 촬영 중에 갈비뼈가 부러진 참가자도 있다.

‘피지컬 100’은 넷플릭스 차트에 이변을 가져왔다.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이 시청한 비영어권 방송 1위를 차지했는데, 리얼리티 쇼가 이 자리에 올라온 것은 처음이다. 현재 영국에서도 3번째로 인기 있는 넷플릭스 방송이다.

케이팝과 한국 드라마의 영향력을 감안하면, 이러한 성공이 당연해 보일 수 있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한국에서 ‘버라이어티 방송’이라고 부르는 리얼리티 쇼는 자국에서 수십 년 동안 인기를 끌었지만 해외에서 큰 성공을 거둔 적은 없다.

넷플릭스는 예상보다 훨씬 큰 인기에 놀라며 이달 초 서울 팬미팅을 위해 출연자 50명을 급히 불러 모았다.

큰 몸집의 자동차 딜러 조진형(41)은 50kg의 바위를 어깨에 짊어지고 2시간 넘게 버텨내 최종 5인에 포함됐다. 그는 “인기 있을 줄은 알았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며 웃었다.

그는 “인생에서 가장 힘든 일 중 하나였다”며 “온몸이 마비되는 것 같았고, 인생의 주마등이 눈앞으로 지나갔다. 그냥, 놓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질 수 없었다”고 말했다.

피지컬 100 참가자들이 지난 주말 서울에서 열린 팬미팅에서 포즈를 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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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지컬 100 참가자들이 지난 주말 서울에서 열린 팬미팅에서 포즈를 취했다

레슬링 선수 장은실은 조진형 씨 같은 참가자와 경쟁할 수 있다는 점에 매료되어 참가를 마음먹었다. 그는 “남성과 여성이 함께 경쟁한다는 점이 참신했다”고 말했다.

출연진은 오후 내내 팬들에게 즐거움을 선사했다. 공중제비를 선보이고 웃통을 벗거나 이두박근을 과시했다. 시청자의 성향을 파악한 것이다.

하리(25) 씨는 “몸이 멋진 사람들이 많아서 방송을 본다”고 말했다. 친구 다현 씨도 “나도, 그 이유가 크다”며 웃었다. 그러나 멋진 몸 이외에 프로그램의 세계적 성공에도 들떠 있었다.

그들은 “이제 다들 한국을 알잖아요. 정말 멋져요. 케이팝 외에도 한국의 또 다른 면모를 보여줬어요”라며 한목소리를 냈다.

해외 팬들은 출연진의 동료애에 매료됐다. 마지막까지 남은 2명은 끝이 없어 보이는 밧줄을 잡아당기는 혹독한 순간, 언젠가부터 서로의 원동력이 됐다.

장은실 선수는 “해외 팬분들이 이런 순간들을 멋지게 봐주신 것 같다”고 말했다. 조진형 씨는 “한국다운 방식”이라고 말했다.

한국 가정에서는 오래전부터 부모, 자녀, 심지어 조부모까지 하나가 되어 버라이어티 방송을 시청했다. 방송국들은 가장 독특하고 재미있는 방송을 만들기 위해 치열하게 경쟁하며 계속해서 신선한 아이디어를 쏟아냈다.

게임 쇼, 재능 대결, 사람들의 삶을 파고드는 기발한 장르들이 많다. 가벼운 마음으로 볼 수 있으며, 유명인이 등장하고, 가끔은 고집 세지만 재치 있는 게스트도 출연한다. “미운우리새끼”에서는 유명인의 어머니가 아들의 일상을 관찰하고 화자가 됐다.

이 방송은 대놓고 한국 시청자를 위해 만들어졌다. 다양한 수상 경력을 가진 허항 PD는 이런 방송이 종종 “너무 한국적”이라고 말한다. 대화도 많고 화면에는 글자도 많아서 번역이나 이해가 어려울 정도다.

허항 PD는 10년 동안 이어진 히트작 ‘나 혼자 산다’의 촬영 현장에 기자를 초대했다. 이 방송은 하루 동안 혼자 사는 유명인의 일상을 따라간다. 나중에는 유명인들이 스튜디오에 모여 촬영된 영상을 보고 저마다의 감상을 더한다.

BBC는 또 다른 인기 K-리얼리티쇼 '나 혼자 산다'의 촬영 현장에 초대받았다

BBC
BBC는 또 다른 인기 K-리얼리티쇼 ‘나 혼자 산다’의 촬영 현장에 초대받았다

이날 배우 이장우는 베트남 음식을 요리하며 하루를 보냈다. 샤이니의 키를 비롯해 여러 스타가 이 영상을 함께 감상했다. 이장우는 준비 중에 갑자기 케이크를 꺼냈는데, 그 안에는 고기만 가득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재밌었다. 출연진과 제작진은 폭소했다.

허 PD는 “연예인의 일상도 우리와 별반 다르지 않다는 걸 확인할 수 있어서 우리 방송이 인기가 많다. 대본도 없어서 매우 리얼하다”고 설명했다.

이 방송은 1인 가구가 3분의 1 이상을 차지하는 한국 고유의 특징을 십분 활용했다. 허 PD는 “외국인들은 방송 속 일상에 공감하기 어려울 수도 있다”고 덧붙였다.

방송 자체는 번역으로 전달하기 어렵더라도, 아이디어는 잘 전달됐다. 한국 기업은 수년 동안 해외 리메이크 판권을 판매해 왔다. 유명인이 정체를 숨기고 공연하는 미국 히트작 ‘더 마스크드 싱어’는 한국의 ‘복면가왕’ 포맷을 수입한 것이다. ‘복면가왕’ 제작사는 50개국 이상에 판권을 수출했다.

넷플릭스는 이전 성공 사례와 달리 ‘피지컬 100’의 한국어판 방송에 투자했다.

넷플릭스는 시청자들이 한국에 대해 더 많이 알고 싶어하고 매력을 느낀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작년에는 전체 넷플릭스 가입자 중 무려 60%가 한국 방송을 시청했다.

스트리밍 플랫폼에는 TV 방송국이 따라 하기 힘든 장점도 있다. 촬영한 각 회차에 자막과 더빙을 추가해 각국 시청자에게 동시 공개함으로써 세계적으로 화제를 모으는 것이다.

한국 넷플릭스에서 무대본 형식의 콘텐츠를 관리하는 유지환 매니저는 한국 리얼리티쇼가 “차세대 K-콘텐츠로 부상하는 중”이라고 말한다.

대한민국 연예계도 상황을 흥미진진하게 지켜보고 있다. 한때 방송국에서는 넷플릭스나 다른 스트리밍 플랫폼을 경쟁자로 생각했지만 이제는 잠재적인 파트너가 됐다.

지난주 ‘아마존 프라임’은 첫 번째 K-리얼리티 쇼로 ‘서진이네’를 방송했다. 유명인이 멕시코에 한인 길거리 음식점을 차리는 내용이다.

제작자 나영석 PD는 한국에서 가장 유명한 리얼리티 TV 프로듀서 중 한 명으로, 거대 미디어 기업 CJ E&M 소속이다. 나 PD는 해외 시청자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없다고 말했다. ‘서진이네’를 통해서는 한국 시청자를 위해 재미있는 방송을 만들고자 생각했다.

그러나 ‘피지컬 100’이 그런 생각을 바꿨다. 갑자기 나 PD에게 새로운 기회가 보였다. 그는 글로벌 팬을 사로잡기 위해 유명 연예인을 활용했는데, ‘서진이네’에는 방탄소년단의 뷔가 식당 인턴으로 출연한다.

그는 “솔직히 이제는 해외 시청자도 내 방송을 좋아해 줬으면 좋겠다. 혹시 재미나 즐거움을 느끼지 못한다면, 포맷을 바꿔볼 생각이다. 어쩌면 서바이벌 방송을 만들어야 할지도 모르겠다”고 농담을 했다.

방송 업계는 글로벌 혁신을 준비 중이다. CJ E&M에서는 200명가량의 프로듀서들이 매일 머리를 싸매고 새로운 아이디어를 생각해낸다. 스트리밍 플랫폼이 이런 아이디어에 돈을 지불한다면 예산이 더 확대될 것이고, 더 크고 더 좋은 방송이 제작되는 선순환이 이어질 것이다. 적어도 그런 희망이 감돌고 있다.

나 PD는 “처음으로 이게 정말 가능하겠다고 생각했다. 외국 시청자가 한국 리얼리티 쇼를 즐길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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