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보라 니콜스-리
다윗(다비드)은 역사상 모든 시대에서 남성성을 논할 때마다 꾸준히 등장해왔다. 드보라 니콜스-리가 다윗과 신화, 예술적 영감에 대해 정리했다.
한 명의 소년이었던 그가 남성미의 귀감으로 떠올랐다. 영원히 기억될 “다윗”이라는 이름. 블레셋에서 가장 강력한 전사였던 거인 골리앗을 죽이고 훗날 이스라엘의 왕이 된 양치기 소년. 이 소년이 미술사에서 가장 상징적인 작품의 주제가 된 것이다.
이탈리아의 내로라하던 조각가 도나텔로와 베로키오, 미켈란젤로, 베르니니는 모두 다윗 작품으로 기존의 틀을 깨뜨렸다. 기욤 쿠르투아와 루벤스, 레니, 카라바조와 같은 화가들도 다윗을 소재로 걸작을 남겼다.
성경에 묘사된 “아름다운 눈과 준수한 외모”와 극적인 이야기를 통해, 다윗은 완벽한 뮤즈가 됐다.
그 시작은 도나텔로였다. 1408년 도나텔로는 골리앗의 잘린 머리를 밟고 있는 대리석 다비드상을 만들어, 사람들의 마음에 다윗을 새겨넣었다.
이 작품은 현재 “도나텔로: 르네상스를 조각하다” 전시가 한창인 런던 ‘빅토리아 앤 앨버트'(V&A) 박물관에서 볼 수 있다. 이 작품이 영국에 온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이번 전시에선 도나텔로의 두 번째 ‘다윗’이자 더 유명한 청동 다비드상과 박물관의 영구 소장품도 함께 전시되고 있다.
도나텔로의 대리석 다비드상은 매끈한 몸매를 생생하게 보여준다. 동시에 약간 뒤틀린 콘트라포스토 포즈(이탈리아어로 ‘대비’를 뜻하는 말로, 한 발을 앞으로 밀어내 인체 곡선의 아름다움과 역동성을 표현한 자세)로 중세 조각의 경직성을 벗어난다. 작품을 보면 이 어려운 시도를 해낸 도나텔로의 능숙함과 당시 무르익은 ‘고전적 지식과 아름다움을 되살린다’는 르네상스의 사명을 느낄 수 있다.
관람객이 다비드상의 아름다움에 탄복하는 이유에는 도나텔로의 작품에 녹아든 독특한 인간성도 어느 정도 포함될 것이다. V&A 도나텔로 전시회의 수석 큐레이터인 페타 모투어는 BBC컬쳐에 “비록 이상화된 영웅이긴 하지만, 이 젊은 영웅은 한 명의 개인을 표현했다는 느낌도 갖고 있다”고 말했다. 도나텔로의 작품이 “심리적 감수성을 자극”하고, 예술가가 가진 “인간 정신에 대한 이해”와 “순간을 포착하는 타고난 능력”을 보여주기에 가능한 일이다.
도나텔로가 활동하던 당시, 조각은 건축의 일부분이었다. 도나텔로의 대리석 다비드도 원래는 피렌체 대성당 부벽에 세워질 예정이었다. 하지만 예정과 달리 시청 앞에 세워지며, 대중적이면서 새로운 정치적 의미를 담은 작품이 됐다. 그리고 이러한 결정은 예술사에 큰 영향을 미쳤다.
성당이 아닌 곳에 세워진 다비드는 더 이상 단순한 종교적 인물이 아니었다. 또 다른 약자, ‘피렌체’를 우화적으로 표현하는 인물이었다. 작은 도시 국가였던 피렌체는 인근의 침략으로 많은 고초를 겪었지만, 용감하게 침략자들을 물리쳤다. 이를 상징하듯, 다비드상 아래에는 “신들은 조국을 위해 가장 무시무시한 적들에 맞서는 용감한 투사들과 함께한다”는 내용의 라틴어 글이 새겨졌다.
도나텔로는 1430년대 후반 다시 다윗을 창작의 주제로 삼았다. 그리고 이때 고대 이후 처음으로 단일 누드 조각 작품이 만들어졌다. 특이하게도 이 작품은 한 개인(당시 피렌체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사람이었던 코시모 데 메디치)의 의뢰로 만들어졌을 뿐 아니라, 전시 공간을 사방에서 볼 수 있는 별장 안뜰로 잡았다.
도나텔로가 조각한 두 번째 다비드상은 골리앗의 칼을 손에 들었고, 거인의 머리를 밟고 서 있다. 막 전투를 마친 모습이다. 그런데 머리에 쓴 양치기 모자는 여성스러운 듯하고, 자세는 요염하며 몸은 어린아이 같다. 반면 골리앗을 다루는 그의 태도는 잔인해 보인다.
현대인들은 나체 다비드상에서 순수함과 욕망이 함께 표현된 모순을 보기도 한다. 일부 평론가들은 어린 소년들이 나이 든 남성들에게 자주 구애받던 장소와 시대에 살았던 동성애자 도나텔로가 의도적으로 다윗을 성적으로 표현한 것이라 해석한다. 하지만 이러한 해석이 시대착오적이라고 보는 평론가들도 있다.
BBC컬쳐가 만난 피렌체의 조각가 제이슨 아클스도 작품을 성적으로 해석하는 것에 반대했다. 그는 조각가이자 교사, 미술사학자, 그리고 팟캐스트 ‘조각가의 장례식(The Sculptor’s Funeral)’의 진행자다. 그는 “성기가 보이는 것만 빼면, 다비드상엔 성적인 면이 없다”고 말했다. “예술은 맥락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조각품이 만들어진 이유를 이해하지 못하면 대부분의 이야기를 놓치게 되죠.” 그는 당시 예술 작품은 항상 의뢰를 통해 만들어졌다고 강조했다. “단지 아름다움이나 작가의 자기표현 수단이었던 게 아니죠.”
다비드의 허벅지 안쪽으로는 관능적인 깃털이 보인다. 조각가인 아클스는 이를 실용적인 용도로 해석했다. “도나텔로는 자신이 이제껏 보지 못했던 골조를 만들고 있었습니다. 크기도 더 컸고, 인물 안에 완전히 감춰져야 했죠.” 다리를 따라 올라가는 깃털은 단순히 조각의 가장 취약한 부분을 강화하기 위한 장치다.
아클스는 의뢰를 받고 만드는 작품에 개인적인 생각을 강하게 투영함으로써 생계를 위태롭게 만들 예술가는 거의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도나텔로가 “이 동상 하나로 자신의 개성을 표현했다기보다는, 기술적인 장애물 몇 가지를 극복”했던 것이라고 말했다.
아름다움의 계보
60년 후, 미켈란젤로의 누드 다비드상이 등장했다. 미켈란젤로는 한쪽 다리 뒤에 나무 그루터기를 놓아 전신을 지지했다. 골리앗은 작품에서 사라졌다. 대신 용기 있게 전투에 임하는 소년 영웅이 시선을 사로잡는다.
이 미켈란젤로의 초대형 다비드(1501-4)가 도나텔로가 만든 실물 크기 청동 다비드상이 사람들을 놀라게 했던 곳, 피렌체의 주 광장에 세워지자 격렬한 반응이 쏟아졌다.

먼저 5m 높이의 거대한 석상이 세워졌다. 그리고 나중에는 석상 허리께에 성기를 가리기 위한 놋쇠 잎사귀 화환이 둘렸다. 토스카나 대공에게 동상의 사본을 선물 받은 빅토리아 여왕은 조각상의 나체에 너무 모욕감을 느낀 나머지, 성기를 가리기 위해 무화과 잎을 이용했다고 한다.
현재 미켈란젤로의 다비드상과 더불어 나뭇잎 석고 모형도 V&A에 전시 중이다. 다비드상의 성기는 의도적으로 성적 이미지를 약화한 것이라 해석되기도 한다. 전체 몸보다 비상식적으로 성기를 작게 만든 것은 성적인 특징을 의도적으로 억제하려는 시도였다는 것이다.
사실 비율의 문제는 꽤 흥미로운 주제다. 두꺼운 머리카락과 강한 턱선, 탄탄한 몸매를 가진 이 남성미의 모범이 자세히 살펴보면, 완벽함과는 거리가 멀기 때문이다. 성기가 작을 뿐만 아니라, 손과 머리는 상대적으로 크다. 심지어 사용된 대리석에도 결함이 있다고 한다. 도나텔로의 가르침을 받았던 아고스티노 디 누치오가 수십 년 전 조각용으로 가져왔다가 포기한 대리석이라고 한다.
나체의 다비드상은 단순히 이상적인 신체와 성적 매력을 표현했다기보다는 고대 이후 볼 수 없었던 예술 기법을 선보이는 동시에, 인체와 르네상스 시대에 인체에 대한 더 많은 지식을 축적하게 됐음을 찬양하기 위한 것이었다.
아클스는 “토가(고대 로마 시민이 입던 헐렁한 겉옷)는 많은 오류를 숨길 수 있다”고 말했다. “누드 상을 만들 때는 신체의 모든 부위를 다 만들어야 할 뿐만 아니라 그 부위들이 다른 부위와 함께 어우러지게 만들어야 합니다. 누드 상을 만든다는 것은 이러한 어려운 일을 할 수 있다는 표현이기도 하죠.”
조각가 안드레아 델 베로키오도 1465년 자신의 청동 다비드상에 반투명 옷을 입혔다. 도나텔로가 개척한 (누드 상의) 계보를 이어 인간 육체의 아름다움과 복잡성을 보여준 것이다.
다비드상의 신체적 아름다움은 그의 도덕성에 힘입은 바가 크다. 외형뿐 아니라 내면 역시 미학적으로 돋보이는 것이다. 그래서 다비드상은 피렌체의 마스코트이자 선한 정부와 이상적인 시민을 상징하게 됐다.
후기 바로크 시대 베르니니의 다비드에서 볼 수 있는 자유분방한 감정 및 육체성과는 대조적으로, 르네상스는 고전주의를 모방해 합리성과 통제, 시민적 미덕을 인간다움으로 보았다. 당당하면서 도전적인 위치에서 로마를 바라보고 있는 미켈란젤로의 다비드는 이러한 특성의 구현이며, 피렌체 공화국의 자유와 독립을 상징하는 것이다.
피렌체 사람들에게는 다비드상의 상징성이 여전히 남아있다. 아클스는 “피렌체 사람들이 다비드상과 연결되는 방식은 아주 독특하다”고 말했다. “피렌체 사람들은 다비드상 앞에서 눈물을 흘릴 뿐만 아니라, 시를 써서 발치에 남겨두기도 했습니다. 중요한 의미가 있다 보니, 짧게나마 거의 종교적 숭배를 받기도 했죠.”
예술적 보물들로 가득 찬 도시에서, 미켈란젤로의 다비드상은 여전히 최고로 꼽히고 있다. 이곳을 찾는 방문객들은 아카데미아 갤러리에서 진품을 보기 위해 줄을 서거나, 시뇨리아 광장에 있는 복제품으로 몰려든다. 오늘날 피렌체의 기념품 가판대에는 500년 전 예술가들이 청동과 테라코타로 다비드상 작품을 만들어 돈을 벌었던 것처럼, 조야한 다비드상 기념품들이 즐비하다.
현대 예술가들도 여전히 새로운 다비드상을 만들고 있다. 2005년 이스탄불 비엔날레를 위해 튀르키예계 미국인 예술가 세르칸 외즈카야는 미켈란젤로의 다비드상을 10m 높이의 부처 모양의 금 복제품으로 만들었고, 로스앤젤레스에 기반을 둔 예술가 카디르 넬슨은 2019년 흑인 다비드상을 구상했다.
실제 다비드상의 모델이 누구였는지 혹은 실존 인물을 모델로 삼은 것인지에 대해 확실히 아는 사람은 없다. 어쩌면 이는 별로 중요하지 않은 문제일 것이다. 중요한 것은 이렇게까지 지속적으로 예술 작품의 영감이 되고 대중의 상상력을 사로잡은 남성이 없었다는 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로는 인정해야 한다. V&A의 페타 모투어는 “각 예술가들이 그랬던 것처럼 각각의 다비드상은 수 세기에 걸쳐 나름의 영향을 끼쳤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들은 모두 도나텔로에게 빚을 진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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