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외교부가 6일 ‘제3자 변제’를 골자로 하는 강제징용 해결안을 공식 발표했다. 박진 외교부 장관은 경색된 한일 관계를 풀 “마지막 기회”라며 일본 정부와 민간 기업들의 성의 있는 호응을 기대한다고 밝혔다.

같은 날 기시다 후미오 총리는 참의원 예산위원회에서 나온 한일 관계 관련 질의에 “역사 인식에 관해서는 역대 내각의 입장을 전체적으로 계승해 왔고, 앞으로도 이어갈 것”이라고 말했다. 이를 두고 기시다 총리가 한국 정부에서도 강조해 온 1998년 ‘김대중-오부치 공동선언’을 계승하겠다는 입장을 표명한 것이라는 해석이 나온다.

다만 기시다 총리는 총리의 해당 문제 관련 입장 표명 방식에 대해서는 “이 같은 정부의 입장을 앞으로도 적절하게 표현하고 발신해 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인식하고 있다”며 명확한 답을 내놓지 않았다. 그러면서 “양국 외교당국 간에 조율이 이뤄지고 있어서 구체적으로 말씀드리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한일 관계가 오랜 기간 답보 상태에 빠져 있던 데다 양측 정부나 피해자, 피고 기업 등에서 새로운 주장이나 제안이 나오지 않고 있어 한국 정부에서 최종 조율 방안 발표를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상황’이었다는 분석이다.

특히 미국과 중국간 경쟁 관계의 심화, 북한의 안보 위협 심화,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인한 신냉전 구도의 심화 등 한국이 미국의 동맹국이면서 가까운 이웃 국가인 일본과 관계를 회복해야 할 국제정치적 압력이 커지고 있다는 진단이다.

하지만 강제 징용 문제에 연루된 일본 기업들이나 일본 정부의 ‘직접적’ 사과 없이는 조율안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피해 당사자들의 반대가 있는 만큼 한국 정부가 피해자들과 소통하며 이견을 좁혀야 하는 과제를 남겨 두고 있다.

일본 정부 역시 한국 정부의 조치에 ‘성의 있는’ 호응을 하기 위해 국내 여론을 조율해야 하는 상황이다.

한국 정부 발표한 ‘최종안’ 내용

한국 정부가 발표한 최종안은 2018년 대법원으로부터 배상 확정 판결을 받은 일제 강제징용 피해자들에게 국내 재단이 대신 판결금을 지급하는 ‘제3자 변제’를 골자로 한다.

박 장관은 “행정안전부 산하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이하 재단)’이 강제징용 피해자·유족 지원 및 피해구제의 일환으로 2018년 대법원의 3건의 확정판결 원고분들께 판결금 및 지연이자를 지급할 예정”이라며 “동 재단은 현재 계류 중인 강제징용 관련 여타 소송이 원고 승소로 확정될 경우, 동 판결금 및 지연이자 역시 원고분들께 지급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이러한 방식은 일본 피고 기업인 미쓰비시중공업과 일본제철 대신 한국 정부 산하 재단이 한국 기업들이 출연한 기금으로 2018년 대법원 확정판결을 받은 피해자들은 총 15명(생존자 3명)에 판결금을 지급하는 제3자 변제 방식이다.

박 장관은 재원 마련에 대해서는 “민간의 자발적 기여 등을 통해 마련하고, 향후 재단의 목적사업과 관련한 가용 재원을 더욱 확충해 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이와 관련해 포스코를 비롯해 1965년 한일 청구권 협정 당시 일본 정부 자금 수혜 기업들은 정부 등으로부터 기부금 출연 요청을 받을 시 구체적 논의에 착수하겠다는 입장이다.

이날 정부 발표에 대해 야권에서는 강한 반대의 목소리를 냈다.

더불어민주당, 정의당, 무소속 등 의원 53명으로 구성된 ‘강제동원 사죄와 전범 기업의 직접 배상 촉구 의원모임’은 이날 국회 기자회견에서 “정부 대책은 피해자의 절규를 무시하고 능멸하고 있다”며 윤석열 정부의 ‘제 3자 변제’ 방식의 강제 징용 피해배상 해법에 대해 즉각 철회를 촉구했다.

피고기업 판결금 조성 참여 불발.. 일본 정부 입장은

한국 정부가 발표한 강제징용 해결안에서 가장 쟁점이 되는 부분은 피고기업 미쓰비시중공업과 일본제철의 배상금 조성 참여 여부와 일본 정부의 사과 표명이 어떻게 이루어질 것인가다.

다만 아직 일본 정부와 피고기업은 한국 사법부의 판결을 인정할 수 없다는 입장에 변함이 없어, 피해자들이 요구하는 일본 정부와 피고기업의 ‘직접 사과와 배상’이 이루어지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일본 언론 보도에 따르면 기시다 총리가 일본이 과거 식민지 지배로 한국 국민들에 막대한 손해와 고통을 끼친 것에 대한 ‘통절한 반성과 진심 어린 사죄’를 담은 1998년 한일 공동선언에 대한 계승 입장을 표명하는 방안이 부상하고 있다.

또한 일본 피고기업이 직접적으로 판결금 조성에 참여하지 않는 대신 일본 재계를 대표하는 게이단렌(經團連·일본경제단체연합회)이 기금을 조성해 한국 유학생을 대상으로 장학금을 지급하는 사업 등이 검토되는 것으로 알려졌다.

게이단렌에는 피고기업 미쓰비시중공업과 일본제철도 회원사로 가입돼 있다.

한일 언론보도에 따르면 한국의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과 게이단렌은 미래 지향적 한일관계를 위한 경제 분야 협력 사업을 검토하는 한편, 그 일환으로 한일 재계의 젊은 층을 대상으로 한 기금 창설을 계획하고 있다.

‘양국 국내 정치 문제가 남은 과제’

세종연구소의 진창수 일본연구센터장은 한국 정부가 일본 피고기업의 배상과 일본 정부의 직접 사과가 빠진 ‘반쪽 자리’ 해결안이라는 비판에도 불구하고 강제징용 문제에 대한 최종 조율안을 발표한 데에는 ‘삼중고’의 상황이 작용했다고 밝혔다.

진 센터장은 ▲대법원 판결로 인한 국내 강제징용 일본 기업의 자산 현금화 절차 임박, ▲북한 핵 위협 심화와 지역 안보 상황에 따른 일본과의 파트너십 강화 필요성 증대, ▲일본 정부가 1965년 청구권 협정으로 청구권에 관한 모든 문제가 완전하고 최종적으로 해결되었다는 원칙론을 굽히지 않는 상황을 삼중고의 상황으로 꼽았다.

진 센터장은 BBC 코리아에 “시간이 더 지난다고 해서 이 세 가지 상황에 변화가 나타난다든지 국제현실이 조금씩 한국에 유리해진다든지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한국 정부가 느끼는 압박은 조금씩 더 강해지는 것”이라며 “제3자 변제 방식은 이전 정권에서부터 제안된 방식으로 더 이상 새로운 방법론이 없다”고 말했다.

다만 진 센터장은 “피해자의 입장에서 보면 정부의 결정에 반발할수 밖에 없다”며 “한국 정부에게 남은 과제는 이러한 피해자들의 입장을 포함해 국내 여러 집단의 이견을 잘 조율해 나가고 필요한 정책적인 뒷받침을 해주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가장 좋은 것은 여권과 야권이 식민지 문제 해결에 대한 특별법을 마련하는 식으로 나름의 원칙을 세우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한편 2018년 대법원 판결에 승소한 양금덕 할머니 등 피해자들은 6일 광주와 서울에서 정부의 해결안에 반대하는 기자회견을 가졌다.

양 할머니는 이날 오전 광주 서구 일제강제동원시민모임 사무실에서 강제동원 문제 해결방안에 대한 정부의 발표를 온라인 생중계로 지켜본 뒤 제3자 변제 방식의 배상안을 두고 “동냥처럼 주는 돈은 받지 않겠다”고 말했다.

양 할머니는 “잘못한 사람은 따로 있고 사죄할 사람도 따로 있는데 (3자 변제 방식으로) 해결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며 “그렇게 해서는 사죄라고 볼 수 없다”고 말했다.

한편 2018년 대법원 확정판결을 받은 피해자들은 총 15명(원고 기준 14명)으로, 일본제철에서 일한 피해자, 히로시마 미쓰비시 중공업에서 일한 피해자, 나고야 미쓰비시 근로정신대 피해자 등 3개 그룹이다.

이외에도 대법원에 계류돼 확정판결을 기다리고 있는 강제징용 소송 9건을 비롯해 국내 법원에서 다수의 소송이 진행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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