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1인 가구 수는 700만여 명, 혼인 건수는 역대 최저인 19만3000건(2021년 기준). 이제 결혼은 필수가 아닌 선택이 됐다.

아직 좋은 시기와 상대를 만나지 못해 결혼하지 않은 사람들도 있지만, 아예 결혼을 원하지 않는 이들도 많다. 최근 들어 미완의 의미를 담은 ‘미혼’보다 개인의 선택을 강조한 ‘비혼’이라는 단어가 더 많이 쓰이는 이유다.

이렇듯 비혼 인구 증가는 새로운 삶의 형태로 나타나고 있다.

부케 대신 부토니에…그의 ‘비혼식’

지난 19일 주말 오후, 서울 마포구의 한 문화공간에서 깔끔한 수트 앞주머니에 부토니에(꽃장식)를 꽂은 정지현(31)씨가 준비해온 글을 읽어 내려갔다.

“나는 평생 스스로를 아끼고 사랑할 것을 굳게 맹세합니다.”

‘비혼 선언문’이었다. 당연히 돌아오는 신랑의 대답도 없었다. 대신 38명의 하객들이 답했다.

“오늘 참석한 모두가 증인이 되어 이 맹세가 진실하게 이루어졌음을 선언합니다.”

개발자로 일하는 정씨는 혼자 지내는 게 안락하기 때문에 비혼을 결심하게 됐다고 말했다. 그는 비혼에 관한 수필집 ‘언제나 나를 기다리는 나의 아파트’도 독립출판했다.

비혼식을 열게 된 특별한 이유도 없었다. 그는 “굳이 말하자면 친구들이 신경쓰였다”고 말했다.

“제가 일찌감치 비혼을 선언했기 때문에, 친한 친구들도 저를 결혼식에 부르는 걸 미안해하더라고요. 저는 결혼을 안 할 거고, 그러면 축의금을 돌려줄 수 없으니까요. 그래서 농담 삼아 ‘비혼식 할 거니까 괜찮다’라고 말하곤 했었죠.”

정씨는 그의 비혼식을 ‘이립(서른 살을 뜻하는 말) 잔치’라고 이름 붙이고 초대장도 만들었다. 장소 대여 등 행사를 준비하는 데 든 비용은 150만원 정도.

개식 선언부터 입장 퍼포먼스, 비혼 선언문 낭독, 축가와 축사까지. 일반 결혼식과 비슷한 식순이었지만, 다른 점도 있었다.

정씨는 그의 비혼식을 찾는 하객 중에 확고한 비혼주의자거나 비혼에 관심 있는 사람이 많다는 점을 고려해 하객들의 질문에 답하고 하객들끼리 이야기 나눌 수 있는 시간을 마련했다. 비혼을 선택한 사람들끼리 알고 지내는 게 좋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정씨는 이날 하객 중 10여 명이 비혼주의자라고 소개했다. 몇몇은 친구이자 이웃사촌이기도 해서 자주 안부를 묻고 장봐온 것을 나누기도 한다. 정씨는 “일종의 생활 공동체처럼 지내고 있다”며 “주변에 이런 친구들이 있어서 비혼으로 지내겠다는 결심이 좀 더 쉬웠던 것 같다”고 했다.

“비혼식 전후로 큰 차이는 없지만, 비혼식을 통해 주변에 이런 결심을 지지하고 응원하는 친구들이 많이 있다는 걸 확인할 수 있어서 좋았어요. 주변에 그런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확인한 것만으로도 큰 응원이 됐죠.”

지난해 인구보건복지협회가 비혼 청년(19~34세) 1047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한 결과 결혼 의향이 있다고 응답한 비율은 51%였다. 결혼 의향이 있다고 밝힌 여성 비율은 44%로 남성(57%)보다 회의적인 것으로 나타났다.

결혼을 생각하지 않는 이유로는 ‘경제적 여유가 없어서’, ‘혼자 사는 것이 행복해서’, ‘가족이라는 제도에 얽매이고 싶지 않아서’ 등이 꼽혔다.

지난 7일 정부가 발표한 ‘청년 삶 실태조사’ 결과에서는 1만5000명(19~34세) 응답자 중 향후 결혼 계획이 ‘있다’고 응답한 비율이 75.3%였다. 남성은 79.8%, 여성은 68.7%였다.

회사도 ‘비혼 직원 챙기기’

최근 기업들도 직원들의 삶의 방식이 변화하고 있다는 점을 눈치채고 발 빠르게 움직이고 있다.

올해 들어 LG유플러스 등 여러 회사에서 결혼 축하금, 유급 휴가 등 기혼 직원을 대상으로 제공하던 혜택을 비혼 직원에게까지 확대하고 있다. 최근 들어 비혼 직원이 늘면서 기혼자 복지 혜택이 차별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는 우려에서다.

롯데백화점은 지난해 9월부터 ‘미혼자 경조’ 제도를 시행 중이다. 만 40세 이상 미혼 직원이 신청할 수 있는 제도로, 결혼하는 직원에게 지급하는 경조금과 유급 휴가 5일이 동일하게 지급된다. 또 화환 대신 반려식물을 제공한다.

21년차 직원 조대상(45)씨는 바로 다음달 복지 혜택을 신청했다. 그는 “비혼 사실을 누군가에게 공식적으로 얘기해야 한다는 것에 약간의 부담감은 있었다”면서도 “기혼자들을 포함해 직원들의 반응이 대체로 긍정적이어서 빨리 신청할 수 있었던 것 같다”고 말했다.

조씨는 최근 몇 년간 결혼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이 빠르게 바뀌고 있음을 느낀다고 했다.

“제가 30대 중반일 때만 해도 상사분들이나 주변 어른들이 결혼 걱정을 하거나 이런저런 얘기를 했는데, 최근에는 제가 왜 비혼을 선택했는지에 대해 물어보거나 걱정스러워한다거나 이런 일이 없었어요. 이런 분위기가 조성되다 보니 자연스레 이런 경조가 생긴 게 아닌가 생각해요.”

러쉬코리아는 2017년 6월부터 비혼자에게도 기혼자에 준하는 복지 혜택을 제공하고 있다. 연 1회 비혼 선언의 날을 지정해 근속연수 만 5년 이상인 비혼 임직원이 복지 혜택을 신청할 수 있도록 했다. 지금까지 총 15명이 혜택을 받았다.

2019년 비혼 선언을 한 한성민(39)씨는 “성소수자이기 때문에 국내법상 결혼이 불가능하지만, 이와 별개로 주변 지인들이 겪는 결혼 관련 고민을 들으며 (비혼을) 결심하게 됐다”며 “결혼 상대는 물론 상대 가족까지 책임감과 부담이 이어지고 혼자일 때의 편리함 등을 포기하게 되더라”라고 밝혔다.

특히 직원들에게 인기가 있는 복지 혜택은 ‘반려동물 수당’이다. 러쉬코리아는 자녀가 있는 직원들에게 월 10만원 상당의 육아 수당을 지급하는데, 반려동물을 키우는 비혼자에게도 월 5만원의 ‘반려동물 수당’을 지급한다. 또 반려동물이 사망할 경우 유급휴가 1일을 쓸 수 있다.

하지만 아직 비혼 직원들을 위한 혜택을 제공하는 회사는 소수에 지나지 않는다. 회사가 제공하는 비혼 지원금이 저출산 시대에 비혼을 부추길 수 있다는 부정적 여론도 있어 회사 입장에서는 부담일 수밖에 없다.

다만 한씨는 아직 제도나 사회적 인식이 다양해지고 있는 삶의 형태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고 느꼈다.

“최근 혼자 사는 사람이 늘어나고 출산율이 줄어드는 것을 보며 소단위인 회사 복지가 아닌, 국가 차원에서 결혼과 출산을 위한 복지가 개선돼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요. 특히 국내에서는 미혼 출산에 대한 인식이 무척 안 좋기 때문에 이에 대한 인식 개선과 함께 복지 또한 확대돼야 한다고 생각해요.

정씨는 앞으로 꿈이 “건강한 부자 할머니가 되는 것”이라며 결혼하지 않고도 주체적이고 행복하게 삶을 꾸려나가기 위해 재테크와 운동에 힘쓰고 있다고 했다.

“결혼이나 출산 등의 이벤트가 없기 때문에 앞으로의 삶을 좀 더 자유롭게 계획할 수 있는 면이 있는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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