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 정부가 노동 개혁을 본격적으로 추진하고 있다.
고용노동부는 9일 오후 서울 중구 프레스센터에서 외신기자 정책토론회를 열고 노조 회계 투명성 강화, 노동시장 이중구조 해소, 근로시간 제도 개편 등 새로운 노동 정책을 설명했다.
한국 노동시장은 대기업·정규직 중심인 1차 시장이 12%, 나머지 2차 시장이 88%를 차지하고 있다. 즉 대부분의 노동자가 비정규직이거나 중소기업에서 일한다는 뜻이다. 임금 등 노동 환경 격차도 점점 커지고 있다 .
정부는 노동 개혁을 통해 이러한 이중구조를 해결하고 노동 약자들을 보호하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정부의 개혁 방향은 이들의 고충을 해결해 줄 수 있을까? BBC 코리아는 국내 중소기업에서 일한 사람들이 실제 겪었던 어려움을 들어봤다.
‘내가 휴가 가면, 내 일은 누가 해요?’
“수당 없는 야근이요? 그건 그냥 일상에 녹아 있는데요. 중소기업에서는 그냥 당연한 거예요. 월급 안에 다 포함돼 있다고 말은 하는데, 그게 정해진 기준이 없잖아요. 내가 야근을 2시간 해야 하는 건지 ,12시간 해야 하는 건지…”
최모씨(35)는 2년 간 한 중소 유통기업에서 B2B 영업 업무를 담당했다. 그가 근무할 당시 정직원은 8명, 비정규직 작업자까지 포함하면 총 16명 규모의 회사였다고 했다.
그는 최근 발표된 근로시간 개편 방안에 대해 회의적이라고 밝혔다.
정부는 지난 6일 70년간 유지된 ‘1주 단위’ 근로시간 제도 개편안을 발표했다. ‘주 52시간'(기본 40시간+연장근로 최대 12시간) 틀을 유지하되 노사 합의로 ‘주’ 단위가 아니라 ‘월·분기·반기·연’ 단위로 근로시간을 운영할 수 있게 하겠다는 것이다.
개편안에 따르면 분기 단위부터는 총근로시간이 이전보다 70~90% 줄어든다. 하지만 주 단위로 봤을 때 산술적으로 최대 69시간 근로가 가능해진다.
정부는 노동자들이 상황에 맞춰 노동시간을 탄력적으로 운용할 수 있을 거라고 기대하고 있지만, 노동계에선 ‘몰아서 일할 수는 있겠지만 몰아서 쉴 수는 없을 것’이라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2021년부터 1년 조금 넘는 시간 동안 10명 규모의 식음료 도매업체에서 디자이너로 일한 원모씨(31)는 “회사가 포괄임금제를 도입했기 때문에 이전부터 주 69시간 또는 그 이상 일하고 있는 직원들이 많았다”며 “그런데도 휴가는 여전히 3일, 길어야 4일씩 썼다. 암묵적으로 그래야 하는 분위기였다”고 회상했다.
원씨는 ‘바쁜 시기’가 아니어도 마찬가지라고 했다 .직원 수가 워낙 적기 때문에 특정 업무 담당자가 한 명인 경우가 많아, 업무 공백이 길어지는 걸 우려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최씨도 “대부분 회사에는 일상적으로 정해진 루틴이 있기 때문에 일을 몰아서 한다는 개념이 사실상 없다”며 “또 중소기업은 아무래도 체계가 없다 보니까 내가 할 일이 큰 틀에서는 정해져 있지만 세부적으로는 이것도 내가 하고 저것도 내가 한다. 그러다 보니 늘 근무시간이 2시간 정도 넘어가는 날이 많았다”고 했다.
현재 중소 제조·유통기업에 근무하는 장모씨(34)도 “대기업처럼 업무가 팀별로 나뉘어져 있지 않은 경우가 많아 직원들이 업무의 A부터 Z까지 다 해야 하는 경우가 너무 많다”고 토로했다.
이어 “연차는 근로자의 권리라고 생각하는 사업주가 매우 드물다”며 “마치 연차를 사장인 본인이 주는 재량이라고 생각하고, 연차를 사용할 때 이유를 묻거나 일정을 조절하라고 할 때가 많다”고 밝혔다.
정부는 ‘노사 합의 하에’ 연장근로 제도를 운영하도록 규정했지만, 노조가 없고 인력이 부족한 중소기업에서는 합의 자체가 어렵다는 지적도 나온다.
앞서 이병훈 중앙대 사회학과 교수는 BBC 코리아에 “근로시간 유연화의 경우 ‘노조 밖에 있는 취약 노동자를 위한다’라는 (정책) 취지와는 완전히 어긋날 수 있다”며 “조가 있는 곳은 노조가 크게 반대하거나 거부할 경우 이를 시행하기 쉽지 않은 반면 중소기업 비정규직은 (이를 거부할 수 없어) 일을 더 많이 하게 될 수 있기 때문”이라고 우려를 표했다.
포괄임금제, 근절할 수 있을까?
상황이 이렇다 보니, 중소기업 노동자의 실질적인 업무 환경 개선을 위해서는 포괄임금제부터 규제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된다.
포괄임금제는 노동자가 연장근로를 할 때마다 수당을 지급하는 게 아닌, 처음부터 임금에 연장근로 등 각종 수당을 포함해 근로계약을 체결하는 제도다.
대법원 일부 판례에서 업종 또는 직종에 따라 근무시간을 정확히 집계하기 어려운 경우 이러한 계약 형태를 인정함에 따라 많은 회사들이 이를 도입하고 있다.
문제는 불가피한 경우가 아닌데도 포괄임금제로 계약해 이를 ‘공짜 야근’ 수단으로 악용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계약서에 대략적인 연장근로 시간을 명시하지 않은 위법 사례도 많다 .
민간 공익단체 직장갑질119가 지난해 12월 7~14일 19세 이상 직장인 1000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진행한 결과, 32%가 ‘연장·휴일·야간근로 등 초과근로에 대해 가산임금을 받고 있지 못하다’고 밝혔다. 이 중 30% 이상이 포괄임금제 대상자였다.
이은솔 동화노무법인 노무사는 “포괄임금제는 근로시간 산정이 불가능하고 유효한 포괄임금제 계약을 체결하는 등 일정한 경우만 적용이 가능하다”라며 “근로시간 산정이 가능한 기업에서 ‘몇 시간을 더 연장근로하든 더 줄 돈은 없다’는 취지의 계약서를 작성한다면 명백한 위법”이라 강조했다.
다만 연장근로시간 수를 명시하는 등 유효한 포괄임금약정을 체결하고 약정한 시간보다 더 많은 시간을 일한 경우 추가적으로 연장근로수당을 지급해왔다면 임금체불로 처벌하기는 어렵다는 게 노무사의 설명이다. 예를 들어 ‘1개월 고정적인 연장근로시간 수를 10시간’으로 정했다면 연장근로시간이 5시간에 불과하더라도 10시간 분의 연장근로수당을 그대로 지급하되, 만약 20시간을 더 일했다면 10시간 분의 연장근로수당은 추가로 지급하는 방식이다.
“포괄임금제 폐지는 예전부터 논의가 이뤄져왔고, 기업이 장시간 근로나 근로시간 관리에 대해 신경쓰지 않게 된 하나의 중요한 원인이기 때문에 고쳐야 하는 하나의 축이라고 봅니다.”
관리·감독 및 처벌 강화해야
정부는 포괄임금제 남용을 막기 위한 방안을 이달 중 발표하겠다고 밝혔다. 올해부터 고용노동부는 ‘온라인 노사 부조리 신고센터’를 운영하며 포괄임금 오·남용 사업장에 대한 기획 감독에 나섰다.
하지만 최씨는 “당한 사람이 회사를 고발하는 게 아니라, 부당한 처우를 해주는 회사가 단속 대상이 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을’인 피고용인이 ‘갑’인 고용인을 고발하는 일이 현실적으로 쉽지 않기 때문이다.
그도 회사가 법정 연차 휴가를 보장해주지 않자 이를 고발하려고 했지만, 결국 포기했다. “고발하면 회사 전체 분위기가 안 좋아질 게 뻔하기 때문”이라는 이유에서다.
“(고용인과 피고용인의) 입장 차이가 있기 때문에 고발은 절대 많이 나올 수가 없어요. (일자리가) 간절한 사람일수록 더더욱 말을 못 하죠. 고발할 거리가 100건 있다면 실제 고발로 이어지는 경우는 10건도 안 될걸요.”
환경노동위원회(환노위) 입법조사관을 지낸 유재원 노동 전문 변호사는 현재 고용 관련 예산이 실업자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며, 직장을 다니고 있는 노동자들의 고용 안정 및 복지에도 좀 더 많은 예산이 사용돼야 한다고 말했다.
유 변호사는 “현재 근로감독관 한 명이 5000개 이상 사업장을 관리하는 상황”이라며 “노무사를 의무적으로 배치하게 하고 그 비용을 지원하는 방안도 고려해볼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 노무사는 중소기업 노동자들의 노동 환경을 개선하기 위해 사업주의 인식 개선과 근로기준법 위반시 처벌 강화 등 크게 두 가지 변화가 필요하다고 봤다.
그는 “예를 들어 직원들이 노동청에 신고를 하더라도 근로시간 데이터는 기업이 갖고 있기 때문에 법 위반을 입증하기 어려워 실제로 사업주 형사 처벌까지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지 않다”며 “이 때문에 기업 입장에서도 (근로기준법) 위반을 심각하게 여기지 않는 경향이 있어 이번 근로시간 정책 변화와 더불어 법 위반 시 사업주 처벌 역시 강화되어야 한다고 본다”고 주장했다.
이와 관련해 고용노동부는 올해 상반기 중 노동 개혁안 세부 조항 등을 모두 정리해 발표하겠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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