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로피를 들고 수감 소감을 말하는 미셸 여의 모습

Getty Images
미셸 여(양자경)는 올해 미국배우조합상(SAG)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

SF 영화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에서 악역 조부 투파키는 “내가 여기에 있을 수 없는 것인지, 아니면 내가 여기에 있는 게 허용되지 않는 것인지?” 묻는다.

조부 조이는 자신이 환영받지 못한다고 느끼는 이 세상을 끝내고자 필사적으로 노력하는 인물이다. 영화 속 악역의 이 씁쓸하고도 체제 전복적인 질문은 배우 미셸 여(양자경)의 할리우드 여정을 잘 보여준다.

여가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에서 맡은 역인 에블링 왕은 다중 우주에 휩쓸리는 중국계 미국 이민자이자 세탁소를 운영하는 인물로, 세상에 별로 있음직 하지 않은 슈퍼히어로이다.

여는 이 역할은 자신이 할리우드에서 인정받고자 싸워온 전쟁과도 같았던 삶을 반영한다고 밝힌 바 있다. 자신에게 던져졌던 질문과 비슷하다는 것이다.

여는 BBC와의 화상 인터뷰에서 “사람들은 자기를 드러내고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권리를 원한다”면서 “나는 경쟁에 참여할 수 있는 권리를 원할 뿐”이라고 말했다.

“[에블린 왕은] 태어난 순간부터 딸이라는 이유로 아버지로부터 실패라는 말을 듣습니다. 이토록 제 내면에 깊은 울림이 있는 작품을 만난 건 오랜만입니다.”

여는 에블린 왕 역으로 올해 각종 시상식을 휩쓸었다. 이미 ‘골든글로브’상과 ‘미국배우조합상(SAG)’ 등에서 트로피를 거머쥔 데 이어 이젠 아카데미 시상식에서도 새로운 역사를 쓸 준비가 됐다.

“배우로서 인정받는다는 게 단순히 제 개인적인 일만이 아니라는 걸 매우 잘 알고 있습니다. 아시아인 공동체 전체가 이제 나서서 우리를 위해 인정받아 달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아시아인들은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곤 한다. 그래서 아시아인들은 자신들의 이야기를 할 필요를 못 느낀다는 오해가 생기는 것 같다”는 여는 “이야기를 어떻게 하는지, 그 방식이 차이를 만든다. 이제 관객들은 할리우드가 지구촌 전체의 이야기를 반영하길 바란다”고 덧붙였다.

한편 할리우드에서 성공하기 전부터 여는 이미 아시아에선 유명 스타였다.

말레이시아 페락주 이포에서 태어난 여는 10대에 영국으로 떠나 왕립무용학교에 다녔다. 그러나 허리를 다치면서 무용수의 꿈을 접게 됐다. 그러나 이후 연기자의 길을 걸으면서 스턴트 연기에 도움이 됐기에 결코 헛된 경험은 아니었다는 설명이다. 실제로 여는 이후 액션 연기로 유명해지게 된다.

미스 말레이시아 대회에서 우승한 여는 이후 홍콩을 주 무대로 활동하게 된다. 여가 경찰관으로 나온 영화 ‘예스 마담(1985)’은 크게 흥행하며 이후 여성 주인공을 내세운 수많은 액션물의 영감이 됐다.

여는 “여성은 도움이 필요한 연약한 존재라고 생각하지 않았기에 액션 영화에 몸담게 됐다”면서 “여성들의 이야기는 (대중에) 정확하게 전달돼야 한다”고 말했다.

한편 현재 말레이시아에서 가수로 활동하는 코디 푸(33)는 5살 때 이포에서 살던 여와 이웃이었다고 말한다.

“제 어머니는 항상 여와 어울리고 싶어 했습니다. 어머니는 여를 ‘미셸 이모’가 아니라 ‘미셸 여 이모’라고 불렀습니다. 한번은 여가 가지고 있던 열쇠고리를 가지고 놀아도 되냐고 물었는데, 그러라고 허락해줬습니다. 그래서 여가 어머니와 대화하는 동안 아이였던 전 즐겁게 놀 수 있었습니다. 여는 진짜 제 이모 같은 존재였습니다.”

미셸 여, 푸의 어머니, 어린 푸가 함께 있는 사진

CODY FOO
1996년 코디 푸와 푸의 어머니, 미셸 여의 모습

푸는 자신과 같은 말레이시아인들에게 여의 성공은 시사하는 바가 엄청나다고 말했다.

“우리 같은 소수자들이 예술 분야에서 성공할 수 있을지 상상하기조차 어려웠는데, 여가 우리도 할 수 있다는 걸 보여줬다”는 설명이다.

그러면서 “1996년 여의 식당 개업식에 가서 여를 축하해줬다. 그리고 얼마 안 돼 여는 ‘007 네버 다이(1997)’ 촬영을 위해 말레이시아를 떠났고, 이후 다시 만나지 못했다”고 회상했다.

여는 ‘007 영화’ 시리즈에서 피어스 브로스넌(제임스 본드 역)과 함께 첫 할리우드 주연을 맡았다. 당시 소수 인종과 여성에겐 매우 전형적인 역할만 주어지던 시기 여는 유능한 중국 스파이를 연기했다. 이는 일반적인 ‘본드 걸’이미지와도 매우 달랐다.

한편 ‘엘르’ 잡지와의 한 인터뷰에서 여는 자신이 처음 미국에 왔을 때 사람들은 자신들이 천천히 말해야 여가 이해하리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사람들은 제가 영어를 할 줄 아는 데 충격을 받았다”는 여는 여전히 그때를 회상하며 황당하다는 표정이었다.

“전 대체 이게 무슨 상황인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소수자라고 불리는 게 이해할 수 없었다”는 여는 “내가 태어난 말레이시아는 다민족 사회로 서로의 차이를 포용하며 살아간다”고 설명했다.

여는 순종적인 여성 혹은 남자 주인공의 부속물에 불과한 수동적인 여성 역을 맡기 거부했기에 처음엔 선택할 수 있는 영화가 많지 않았다. 그러나 이 또한 서서히 변하기 시작했다.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 속 한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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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의 출연진은 대부분 아시아계이다

여는 “세상은 발전하고 있고 다른 (영화) 시장들이 계속 성장하고 있다. 이는 할리우드에 끊임없이 진화하고 나아지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는 점을 상기시키기에 긍정적”이라고 설명했다.

한편 지금까지도 여가 싸워야 할 대상은 인종적인 고정관념만이 아니다.

“특히 여성들은 나이가 들면 특정한 상자(고정관념)에 갇혀버리게 되는 듯하다. 배우로서 역할이 점점 축소되거나 중요한 인물을 맡지 못하게 된다”는 게 여의 주장이다.

“60, 70대 남자 배우들은 세상을 구하는 슈퍼히어로 역할을 맡습니다. 그런데 대체 왜 여성은 그럴 수 없나요?”

여가 할리우드에서 걸어온 여정에 돌파구가 된 작품은 2018년 개봉한 로맨틱코미디 영화 ‘크레이지 리치 아시안’이었다. 이 영화에서 여는 여성으로서 집안을 이끌어가는 엘리노어 성 영 역을 맡아 연기했다.

한편 여는 자신의 성공은 이번 영화를 맡은 청년 감독 및 작가들 덕이라고 말했다.

“매우 평범한 여성에게 슈퍼히어로가 될 기회를 주는 대본을 쓸 만큼 아주 대담한 다니엘스(감독이자 각본가인 다니엘 콴과 다니엘 샤이너트스)와 같이 진보적인 차세대 인물들을 믿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기회를 스스로 만들어 나간다. 자신들이 걸어갈 길을 스스로 만들어 나가는 사람들”이라는 여는 “내가 작가였으면 좋았을 것 같다. 그렇다면 나만의 대본을 많이 썼을 것 같다”고 덧붙였다.

다니엘 콴과 다니엘 샤이너트스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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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 촬영장에서의 다니엘 콴과 다니엘 샤이너트스 감독

한편 여의 주변 사람들은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가 여에겐 큰 모험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인생은 언제나 위험을 감수하며 살아가는 거죠. 위험을 감수하지 않으면 같은 일만 반복하게 됩니다.”

“아시아 공동체는 지금껏 (사회에서) 잘 보이지 않는 존재였다고 생각한다”는 여는 “하지만 이제 변화의 큰 물결이 일어나고 있다. 여기까지 오는 데 시간이 걸리긴 했지만 이러한 변화를 목격할 수 있다는 데 감사할 뿐”이라고 덧붙였다.

그리고 아시아 영화계의 기둥인 미셸 여가 올해 아시아 여성 최초로 아카데미 여우주연상 후보에 올랐다는 사실은 ‘에브리씽(모든 게)’ 변하고 있다는 증거일 수 있다.

하지만 변화는 ‘에브리웨어(모든 곳)’에서 일어나는 건 아닐 수 있다. 그리고 확실히 ‘올 앳 원스(한꺼번에)’ 모든 변화가 일어나진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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