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일(현지시간) 미 캘리포니아주 로스앤젤레스에서 열린 제95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남우조연상을 수상한 배우 키 호이 콴(51)은 수상 소감에서 베트남에서 배를 타고 홍콩의 난민 캠프로, 그렇게 다시 캘리포니아로 향했던 자신의 유년 시절을 회상하며 눈물을 흘렸다.
콴은 “난민 수용소에서 1년을 지낸 내가 어떻게 이렇게 할리우드의 가장 큰 무대에 서게 됐다”면서 “영화에만 나올 법한 이야기다. 지금 내게 일어나고 있다는 게 믿어지지 않는다. 아메리칸 드림”이라고 언급했다.
콴은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수상한 최초의 베트남계 배우이며, 이번 시상식에서 영화 ‘더 웨일’로 여우조연상 후보에 오른 배우 홍 차우 또한 베트남에서 배를 타고 도망친 이민자 출신이다.
그러나 베트남 현지 반응은 뜨겁지 않다. 사실상 국가가 통제하는 베트남 언론의 보도는 콴이나 콴의 배경에 대해 거의 언급하지 않는다.
베트남 출신이라는 점보다 중국계 혈통을 더 강조하는 보도도 있다.
실제로 콴은 베트남계 화교다. 1971년 남베트남(베트남공화국)의 수도인 사이공에서 태어난 콴의 가족은 화교로, 현재까지도 동남아시아 여러 지역에선 상업적으로 성공을 거둔 소수의 화교를 찾아볼 수 있다.
베트남 어느 언론도 소위 대규모 ‘보트 피플(베트남 전쟁이 끝난 이후 작은 보트를 타고 탈출한 이민자들)’ 행렬 속 베트남을 탈출한 콴의 배경에 대해 보도하지 않는다.
베트남 현지 ‘탄니엔’ 신문은 “콴은 1971년 호찌민시[‘사이공’의 공식 명칭]의 중국인 가정에서 태어났으며, 1970년대 후반 미국으로 이주했다”고만 언급했다.
또 다른 현지 언론사인 ‘뚜오이 트레’는 “콴은 1971년 베트남에서 홍콩 출신 어머니와 중국 본토 출신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났다”고 밝혔다.
‘VN 익스프레스’는 콴이 “쩌런 지역의 중국인 부모 밑에서 태어났다”고만 보도했다.
호치민시 쩌런은 전통적으로 중국인들이 많이 거주하는 상업 지구다.

베트남 정부는 이에 대해 별다른 언급을 하지 않았는데, 베트남 공산당의 이러한 침묵 대응이 그리 놀랍지 않다.
왜 베트남 당국은 자신의 베트남 뿌리를 공개적으로 인정하는, 현재 국제무대에서 성공을 거두며 인정받는 배우를 자국의 인물로 포용하길 꺼리는 것일까.
1970~80년대 보트 피플의 대탈출은 베트남 현대 역사에서 가장 어두운 사건 중 하나다. 당시 150만 명 이상이 남중국해를 가로질러 보트를 타고 위험한 탈출길에 올랐다.
유엔난민기구(UNHCR)에 따르면 이 여정에서 20만~40만 명이 사망했으며, 일부는 악랄한 해적들에 잡히기도 했다.
당시 미군을 막 물리치고 현재 눈부신 경제 성장을 주도한 집권 공산당에겐 차라리 잊고 싶은 과거의 조각이다.
그런데 콴이 아카데미에서 수상을 하며 이 모든 과거를 다시 되살리고 있는 것이다.
한편 보트 피플의 비극적인 여정은 베트남과 그 거대한 이웃국 중국 간 껄끄러운 관계를 상기시키기는 일이기도 하다.
두 공산주의 국가는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국가 형성기엔 공식적으로 가까운 관계였다. 북베트남은 처음엔 프랑스, 그 다음엔 미국에 맞서는 기간 중국으로부터 많은 지원을 받았다.
그러나 1975년 4월 북베트남이 베트남전쟁에서 승리하며 베트남을 통일하면서 양국 관계는 나빠져 갔다.
베트남 공산당 지도부가 중국과 소련의 분열 및 중국의 미국과의 화해 상황에서 소련 편을 들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때 콴의 가족을 포함한, 쩌런을 중심으로 한 많은 중국계 사람들이 곤란에 처했다. 이미 전쟁에서 승리한 공산주의자들로부터 남베트남의 주요 자본주의 집단이라며, 패배한 남베트남 정권에 지속해서 충성하는 것 아니냐는 의심받던 상황이었다.
이에 많은 중국계 사람들이 재교육 수용소로 보내지기도 했다.
당시 베트남의 경제는 전쟁 이후 엄청난 피해와 경직된 국제 사회에서의 고립, 극심한 피해와 국제적 고립, 새 정권의 경직된 사회주의 정책 아래 심각한 상태였다.
관리들에게 뇌물을 주고 보트를 살 여유가 있었던 이들 중국계 사람들은 1978년 9월부터 대거 베트남을 떠나기 시작했다.
이러한 탈출 행렬은 중국이 베트남을 공격하며 반중 감정이 고조된 1979년 2월 이후 더욱 격렬해지며 10년 이상 이어졌다.

베트남과 중국의 관계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매끄럽지 않으나, ‘비엣 키우’ 즉 도망친 사람들이라고 불리는 중국계는 이후 다시 베트남으로 돌아와 무난하게 살아가고 있다.
그러나 남중국해의 여러 섬을 둘러싼 중국의 공격적인 태도와 커지는 중국의 경제적 영향력은 베트남 국민들의 강력한 반중 감정을 부채질하고 있다.
한편 어느 SNS 사용자는 BBC 베트남어 페이스북 페이지에 콴은 “베트남계가 아니라 베트남에서 태어난 중국계 베트남일 뿐이다. 이 점을 분명히 해야 한다”고 적었다.
“콴은 중국계 미국인이며, 베트남 국적을 과거 갖고 있었을 뿐이라는 점을 분명히 밝혀달라! 어떻게 ‘베트남계’ 일 수 있냐?”는 글도 있었다.
그러나 또 다른 사용자는 “콴은 베트남에서 태어났고, 중국계이기에 우리도 그를 베트남인이라고 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한편 호찌민시 출신의 작가 트란 티엔 둥은 페이스북에서 콴의 정체성은 “사이공-쩌런” 인으로 규정하면 어떨지 언급하기도 했다.
“저는 콴이 출생지인 사이공-쩌런에서 에너지를 얻어 미국에서 성장해 이후 명성을 얻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콴의 (수상 소식을) 축하하는 한편 SNS에서 여러분들과 기쁨을 나누고 싶습니다.”
한편 호주 뉴사우스웨일스 대학의 의학 교수이자, 마찬가지로 보트 피플 출신인 응우옌 반 투안 교수는 “(베트남) 국영 매체들이 보트 피플로서의 콴의 과거를 도외시하는 것이 유감스럽다”고 지적했다.
“1970~80년대 보트 피플의 이야기는 베트남 역사의 비극적인 장입니다. 당시 미국에 도착한 베트남 난민 대부분은 중국계든 ‘순수 베트남인’이든 상관없이 매우 가난했습니다. 영어도 하지 못했죠. 그러나 이들은 살아남았고 번창했습니다.”
“베트남의 현재를 살아가는 세대는 그 당시 난민들의 고난을 상상할 수 없습니다. 우리 역사의 슬프고도 고통스러운 시기에 대해 배우지 않았던 것도 이유입니다.”
조나단 헤드 기자는 BBC 동남아시아 특파원이며, 트란 보 기자는 태국 방콕 기반의 BBC 베트남어 뉴스 기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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