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늘날 노동 현장에서 노동자들의 장시간 근무와 만성 스트레스, 피로가 증가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어쩌면 지금 우리는 번아웃에 대한 이야기를 새롭게 써야 할지도 모른다.
번아웃은 직장인들 사이에서 오랫동안 광범위하게 발생해왔다. 그런데 팬데믹과 함께 발생율이 치솟았다. 전 세계적 폐쇄 및 육아 부담, 공중 보건 위기 속에서 점점 더 많은 노동자들이 만성 스트레스와 피로를 호소하고 있는 것이다. 2021년 3월 한 구직 플랫폼이 미국 근로자 1500명을 조사했다. 이 조사에서 응답자의 67%가 코로나19 팬데믹 속에서 번아웃이 늘었다고 답했다.
하지만 팬데믹 3년이 지나도록, 번아웃은 진정의 기미를 보이지 않는 듯하다. 새로운 관행이 자리잡은 노동 현장에서, 여전히 번아웃을 호소하는 노동자들이 많다. 2023년 2월 미국 싱크탱크 ‘포처 포럼’이 전 세계 노동자 1만243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에선 응답자의 42%가 자신이 번아웃 상태에 있다고 답했다. 2021년 5월 이후 최고치다.
유연한 근무 형태는 이론적으로는 직원들의 워라밸과 생산성, 복지의 증진을 뜻한다. 하지만 번아웃은 점점 더 사회적 문제로 대두되고 있다. 그러자 번아웃 스트레스 완화에 도움이 될 만한 헬스장 이용권이나 재택근무를 위한 시설비 등 몇 가지 특전을 지원하는 기업들도 생겨나고 있다.
그러나 여전히 번아웃을 호소하는 목소리는 잦아들지 않고 있다. 결국 번아웃은 팬데믹과 묶어서만 생각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오늘날 번아웃이 각처에서 나타난다는 것은 기업들이 작업장에 어떤 조치를 취하더라도 번아웃이 쉽게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는 뜻이다. 이를 감안해 전문가들은 고용주와 직원들이 번아웃을 완전히 없애는 것을 목표로 삼기보다는 번아웃 관리에 집중하는 게 타당하다고 말하기도 한다.
오래된 문제
팬데믹 이전에도 번아웃은 확대 일로에 있던 문제였다. 2018년 ‘갤럽’이 미국 노동자 750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조사에 따르면, 67%가 자신의 업무에서 번아웃을 경험했다. 2019년 세계보건기구(WHO)는 번아웃을 직업과 관련된 증상의 하나로 정의하며 국제질병분류에 포함시켰다.
한때는 극단적인 노동 문화와 고된 노동을 견디는 것이 미화되기도 했지만, 번아웃을 둘러싼 담론은 대체로 그 심각성에 공감하는 쪽으로 흘러왔다. 이와 관련된 자료들이 이같은 진화의 동력 중 하나다. 2021년 5월에 발표된 WHO와 국제노동기구(ILO)의 연구에선, 연간 약 34만 명이 장시간 노동으로 인해 허혈성 심장질환과 뇌졸중으로 사망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휴식: 덜 일하고 더 하는 법’의 저자인 알렉스 수정-킴 팡은 “코로나19 이전부터 번아웃은 일부 지위가 높고 스트레스가 많은 직업 특유의 위험에서 공중 보건에 가까운 문제로 바뀌고 있었다”고 말했다.
번아웃의 주요 원인으로는 장시간의 과도한 업무, 지속적인 과로, 스트레스를 주는 문화 등이 꼽힌다. 팡은 그러한 직장 내 관행이 수십 년 동안 흔했다고 말했다. “많은 기업들이 직원들에게 장시간 근무를 요구하고 수익성을 개선하기 위해 직원들에게 업무량 최대치를 끌어내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했었죠.”
기업들은 그동안 번아웃 관리 책임을 직원들에게 떠넘겨왔다. 팡은 “기업에선 번아웃을 노동자의 책임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었다”고 말했다. “작업장 내 특정 요인이 번아웃을 일으키는 것을 고용주가 방치해 생긴 것이 아니라, 개인이 건강 관리를 잘못한 것으로 취급한 것이죠. 하지만 번아웃은 개인에게 떠넘겨진 조직의 문제입니다.”
늘어나는 까닭
팬데믹이 닥치자, 일상적 스트레스와 경력 불안 등 기존의 직장 관련 문제들은 건강 위기의 불확실성과 결합하며 더욱 증폭됐다.
멜버른 스윈번 공대 ‘센터 포 워크포스’의 이사인 션 갤러거는 노동자들이 이러한 “복합 영향”을 받았다고 말했다. 호주는 세계 각국을 대상으로 한 조사에서 종종 직원들의 피로도가 가장 높은 국가로 꼽히곤 한다.
갤러거는 “노동자들은 고립과 위태로운 고용 안정성 때문에 건강 관리 부담을 갖게 됐을 뿐만 아니라, 달라진 방식으로 일하며 육아에 대한 책임도 져야 했다”고 말했다. “이는 번아웃 측면에서 ‘잔류 효과(살포한 농약이 식품에 남아서 지속적으로 효과를 내는 것처럼, 어떤 사건이나 행위가 계속 영향력을 발휘하는 현상)’를 일으켰습니다. 오늘날까지도 많은 노동자들이 개인의 삶과 직업 활동을 오가면서 정신적 안녕을 찾지 못해 힘들어하고 있어요.”
원격 및 하이브리드 근무 형태는 직원들에게 더 큰 자율성을 줬다. 하지만 이러한 유연성에는 대가가 따르기도 했다. 근무일이 늘어나는 것이 그 예다. ‘ADP 연구소’가 세계 각국의 노동자 3만2924명을 대상으로 진행한 2022년 4월 조사에서 직원들은 매주 8.5시간의 무급 초과근무를 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반면 무급 초과근무는 팬데믹 이전에는 7.3시간이었다.

팡은 “업무가 수시로 주어진다는 것은 일이 끝나지 않는다는 뜻일 수도 있다”고 말했다. “(요즘은) 노동자가 어디에 있든, 24시간 내내 업무를 할 수 있습니다. 번아웃과 마찬가지로, 노동자들은 유연 근무로 인해 생기는 문제도 스스로 해결해야 하기도 하죠. 이런 경우 그들은 가정과 일 사이에서 최대한 많은 것을 소화하려고 하게 됩니다.”
노동 현장에서 생겨난 변화 또한 과로를 유발할 수 있다. 갤러거는 “원격 근무와 함께 소통 방식에서 나쁜 습관이 생겨났는데, 이메일로 충분한 내용을 화상회의로 진행하는 것 등이 그 예”라고 말했다. “이로 인해 노동자들은 업무에 집중할 시간이 줄어들고 과중한 업무량을 처리할 시간이 줄어들게 됩니다. 그러면 이를 따라잡기 위해 계약된 시간을 초과해 일하게 되죠. 그래서 노동자들이 지치게 됩니다.”
비록 일부 고용주들이 노동자들의 복지 증진 필요성을 인식하기도 하지만, 고용주들의 해법이 적절하지 않은 경우도 있다. 팡은 빅테크 기업들과 호화로운 특전을 예로 들었다. 그는 “드라이클리닝과 초밥 요리사와 같은 혜택은 직원들의 번아웃을 줄이는 대신, 가능한 한 오랫동안 사무실에 있게끔 지원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그것은 사람들이 죽을 때까지 일할 수 있도록 편안한 직장을 만들어주고 있는 겁니다.”
갤러거도 고용주들이 번아웃의 근본 원인을 해결하지 않고 대증요법(어떤 질환을 치료할 때 원인이 아닌 증상만 치료하는 것)을 실시하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노동자들에게 명상 앱이나 요가를 지원하는 것은 나쁜 건 아닙니다. 하지만 그것은 ‘반창고’같은 거죠. 지나치게 긴 업무 시간과 과로, 유연 근무 체제에서 나오는 불확실성 등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지 못해요.”
끝낼 수 있을까?
팡과 갤러거는 현재의 업무 관행은 경우에 따라 번아웃이 불가피하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입을 모았다.
팡은 “사실, 번아웃이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직업은 극히 일부”라고 말했다. “하지만 지금은 너무나 많은 노동 현장에서 사람들이 고통을 받든 아니든 장시간 노동과 과로, 피로를 개인적으로 감내해야 합니다.”
일부 전문가들은 여러 분야에서 지속 중인 안 좋은 경제적 상황으로 번아웃이 장기적으로 지속될 가능성이 높다고 보고 있다. 갤러거는 “일 자체에서 오는 압박 뿐만 아니라, 직원들은 어마어마한 생계비 부담도 해결해야 한다”고 말했다. “인플레이션은 더 악화되고, 해고가 벌어지고 있으며, 노동자들은 집을 잃을까봐 걱정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번아웃이 더욱 심각해지더라도 놀라운 일이 아니죠.”
지속적인 육아 위기와 계속된 불안정은 특히 부모들이 전 세계적으로 겪고 있는 어려움이다. 2022년 5월 발표된 오하이오 주립 대학교의 한 보고서는 미국 내 일하는 부모 중 66%가 번아웃 기준을 넘어섰다고 밝혔다.
노동자들이 만성적 스트레스와 과로, 장시간 노동을 감내하게 하는 사업장이 있는 한, 번아웃은 사라지지 않는다. 하지만 팡은 더 많은 조직들이 번아웃에 대한 책임이 있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우리는 번아웃을 전적으로 개인의 문제로 보던 세상에서 점차 벗어나 조직 차원의 해법이 핵심이라는 것을 깨달아가고 있습니다. 작업장에 있는 어떤 요인이 번아웃의 원인이 되고, 이로 인해 고통받는 노동자가 사업에 부정적인 영향을 보다 광범위하게 줄 수 있다는 인식이 확산되고 있는 겁니다.”
어떤 경우에는 법 차원에서 변화가 일어나기도 한다. 예를 들어 호주의 새로운 법안은 번아웃을 업무 건강 및 안전 위험으로 분류하고 있다. 이로 인해 고용주들은 업무량이 몰리는 기간부터 초과 근무 시간에 이르기까지 직원들에게 업무와 관련된 스트레스를 줄 수 있는 위험을 파악하고 관리할 의무를 지게 됐다. 갤러거는 “직장내 업무 관행으로 인해 번아웃이 발생한다면, 이제 고용주들은 직원들을 벼랑 끝에서 다시 안전한 곳으로 데려와야 할 중요한 의무가 생겼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러한 조치가 힘을 발휘하려면 시간이 필요하다. 특히 전 세계으로 확산되려면 더욱 시간이 걸릴 것이다. 또한 고용주들이 작업장에 있는 업무 관행을 점검할 것이라는 보장도 없다. 다만 갤러거는 노동자들의 업무량 관리를 도와줌으로써 유연 근무 체계를 보다 안정시킬 수 있다고 말했다. “보다 튼튼한 가드 레일을 설치하는 겁니다. 근무 시간을 명확히 하고, 무급 초과 근무를 줄이고 워라밸을 개선할 수 있도록 말이죠.”
팡은 현재 만연한 번아웃 상황을 고려할 때, 이와 관련된 담론을 재구성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그는 “번아웃이 없어질 수 있다는 생각은 워라밸을 한번에 완전히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만큼 비현실적”이라고 했다. “대신 우리를 번아웃 위험에 빠뜨리는 각자의 희생이 일자리 유지와 경력 관리 측면에서 감당할 만한 가치가 있는지 따져봐야 합니다.”
전문가들은 앞으로도 목표는 번아웃 근절이어야 한다고 말했다. 비록 근절이라는 게 비현실적일 수도 있지만, 그것을 추구는 것은 가치가 있다는 뜻이다. 그러한 시도는 번아웃의 가장 해로운 영향을 줄이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 그리고 번아웃을 겪어야 하는 노동자들도 점점 줄어들 것이다. 갤러거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보다, 완화하는 것이 더 낫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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