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03년 3월 미국과 영국의 침공은 이라크와 이라크 국민에게 재앙이었다.
시리아와의 국경에서 그리 멀지 않은 이라크 북서부 신자르 외곽 사막에서 이라크인들의 망가진 삶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장소가 있다. 집단 매장지로 의심되는 곳이다.
핍박받는 소수민족 중 하나인 야지디족의 생존자들이 대리석 채석장이었던 곳에서 발굴 현장을 지켜봤다.
발굴 현장 주변을 둘러싼 철조망에는 극단주의 무장 조직 ‘이슬람국가(IS)’에 의해 살해된 수십 명의 사진이 걸려 있었다. 대부분 남성이었다.
이들은 이곳 채석장에서 그리 멀지 않은 자일-리 지역 출신으로, 지난 2014년 8월 3일 야지디족 남성 1800명이 끌려와 살해당했다.
야지디족은 기독교와 이슬람이 혼합된 종교를 믿는 집단으로, IS는 이들을 이교도로 간주해 집단 학살을 자행했다.
미국과 영국이 이라크에서 물러난 뒤 일어난 비극이지만, 그러나 학살과 침공, 그리고 이후 수년간 이어진 비극적인 사건은 모두 직접적으로 얽혀있다.
집단 매장지 발굴 현장을 지켜보던 사람 중엔 나이프 자소도 있었다. 자소는 자일-리 지역보다 더 큰 피해를 입은 코초 지역의 야지디족 공동체 지도자다.
코초에선 전체 인구 1250명 중 517명이 ‘ISIS’, 또는 ‘다에시’라는 이름으로도 잘 알려진 IS의 무장대원의 손에 살해당했다.
한편 당시 16세였던 소피안 살레도 발굴 현장을 지켜봤다. 살레는 당시 자일-리 지역에서 살아남은 유일한 남성 2명 중 한명이다.
자일-리 지역 남성들은 가족들과 강제로 떨어져 이곳 채석장까지 끌려와 총살당했다.
살레는 함께 끌려온 아버지와 형, 이웃 주민 20~30명과 함께 죽을 처지였다. 살레는 먼저 끌려온 이들의 죽음을 목격했다. 시신은 절벽 밑 채석장으로 굴러떨어졌다. 그리고 살레의 차례가 다가왔다.
“총을 쏘기 전 우리 손을 뒤로 묶었다. 그리곤 끌고 가 땅바닥에 내동댕이쳤다”고 한다.
살레의 아버지와 형은 죽었으나, 시신이 위로 떨어져 덮어준 덕에 살레는 목숨을 건졌다.

이는 IS가 가장 좋아하는 방식이다.
우선 지역의 남성들을 모두 죽인 뒤 여성들을 노예로 삼는다. 아이들은 어머니에게서 떨어져 IS 신병으로 거듭나고자 세뇌 훈련을 받는다.
발굴 현장 근처에 있던 한 여성은 IS 무장대원의 가족에 강제로 넘겨줘야 했던 자신의 아기를 떠올리며 슬피 울었다.
한편 철조망 옆에는 20대 여성인 수아드 다우드 차토가 포스터를 들고 서 있었다. 당시 살해된 남성 친지 9명과 실종된 여성 친지 2명의 얼굴이 담겨있었다.
차토는 자신이 16세였던 지난 2014년, IS 무장대원이 자신과 다른 여성 및 여아들을 시리아로 끌고가 억류했다고 설명했다. 차토는 2019년까지 붙잡혀 있다가 IS가 참칭한 칼리프국이 무너지면서 구조되면서 탈출했다.

“그들은 야만인이었다. 오랫동안 우리에게 수갑을 채웠다”는 차토는 “우린 밥을 먹는 동안에도 손이 묶여있었다”고 회상했다.
“저는 강제로 여러 번 결혼해야만 했습니다 … 그들은 노예랑 결혼한 거죠. 그 누구도 예외는 없었습니다. 끌려온 우리 모두가 강간당했습니다. 우리 눈앞에서 사람을 죽였습니다. 모든 야지디족 남성을 살해했어요. 제 삼촌 중 8명이 살해당했습니다. 그들은 많은 (야지디족) 가족을 파괴했습니다.”
채석장에선 우선 인골 몇 구가 발견됐다. 여전히 인골 수십구가 발굴을 기다리고 있다
한편 2014년 여름, IS가 이라크에서 미친 듯이 날뛰고 있을 땐 이미 미국과 영국이 이라크에서 떠난 이후였다.
지하디즘(이슬람 근본주의 하의 무장 투쟁) 이념은 2001년 9·11 테러를 자극할 만큼 이라크 침공 훨씬 이전부터 존재했다.
하지만 이라크 침공으로도 오사마 빈 라덴과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의 이념은 파괴되지 않았다. 오히려 2003년 전쟁 이후 혼란 속에 잔혹한 이슬람 극단주의 폭력은 가속화됐다. 미국과 수니파 부족 간 연합에 의해 잠시 주춤했던 알카에다는 더욱 잔인한 IS로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전쟁 발발 20주년인 올해 이라크는 그 이전 길었던 혼란의 시기에 비하면 안정적이다. 수도 바그다드, 북부의 모술 등 여러 도시가 더욱 안전해졌다.
그러나 이라크인들은 매일 침공의 결과를 느끼며 살아간다. 수백만 명의 삶을 변화시키거나 파괴했으며, 자신들의 조국을 송두리째 바꿔놓은 침략이었다.
그런데 침공을 구상하고 주도한 미국 및 가장 가까운 동맹국으로 함께 했던 영국의 정치 및 대중적 담론에선 이제 이라크 침공을 찾아볼 수 없다. 암울한 아이러니다. 미국과 영국은 침공 결과에 중대한 책임이 있으며, 또 침공 결과는 이들에게도 여전히 영향을 미치고 있다.
물론 이라크의 폭군이었던 사담 후세인은 충분히 타도 당할만한 인물이었다. 이라크인 수천 명을 감금하고 살해했으며, 심지어 독립을 원하는 쿠르드족에 화학무기를 사용하기도 했다.
문제는 후세인 타도가 어떻게 이뤄졌는지이다. 미국과 영국이 국제법을 무시한 방식, 부시 행정부 이후 이라크에 만연한 폭력 사태로 인해 정권 교체로 인한 권력 공백을 메울 계획을 세우지 못했다는 점이 문제다.
후세인 독재 시기에 더해 침공 이후 20년까지, 거의 반세기에 걸쳐 이라크 국민들은 고문과 같은 삶을 견디고 있다.
한편 어느 역사가가 최근 설명했듯이 2001년 9·11 테러와 이라크 침공 사이의 18개월 동안 미국을 열렬히 뒤덮었던 “공포, 권력, 오만함”의 분위기는 당시 미국에 있었던 사람조차 재현하기 쉽지 않다.
미 뉴욕 맨해튼의 세계무역센터가 파괴된 지 며칠 뒤 나는 뉴욕에 있었다. 당시 F-15 제트기가 맨해튼 상공을 순찰하고 있었다. 지구상 최강 군사력을 자랑하는 미국이 어떻게 이번 사태에 대응하는지, 그 힘을 잘 보여주는 모습이었다.
테러의 충격으로 조지 W 부시 당시 미 대통령은 알카에다와 주변 지하디즘 단체를 상대로 빠르게 “테러와의 전쟁”을 선포했다.
그리고 토니 블레어 당시 영국 총리는 전세기로 대서양을 건너 미국에 와 지원을 약속했다. 미국과의 친밀한 관계는 국제무대에서의 영국의 영향력을 가장 잘 보장해주리라는 계산이었다.

미국과 영국은 아프가니스탄의 알카에다 네트워크에 대항해 빠르게 움직였다. 침공이 시작된 그해가 끝나기도 전에 미국 주도의 연합군은 알카에다의 지도자였던 오사마 빈 라덴을 내주기 거부했던 아프가니스탄의 탈레반 정권을 몰아냈다.
그러나 미국은 만족하지 못했다.
부시 대통령과 보좌진은 당시 미국을 향한 더 큰 위협이 있다고 봤다. 미국에 반대하는 국가라면 알카에다와 또 그 이후 등장할 무장 세력과 동맹을 결성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었다.
그러던 그들의 눈에 들어온 가장 큰 목표물은 이라크와 당시 이라크를 지배하던 독재자 후세인이었다.
사실 후세인은 1990년 쿠웨이트를 침공한 이후로 줄곧 미국의 눈엣가시였다. 이에 어떤 증거도 없었으나, 미국은 후세인과 알카에다 사이의 연결고리를 만들어내고자 노력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세속적인 독재자 후세인은 종교적인 극단주의자들을 오히려 자신에게 위협적인 존재로 보고 있었다.
한편 이보다 앞선 1991년, 후세인의 이라크군이 쿠웨이트를 침략하자 미국은 다국적군을 결성해 쿠웨이트를 도운 바 있다. 그런데 당시 조지 H. W. 부시(‘아버지 부시’) 미 대통령은 후세인 정권 타도까지는 가지 않기로 결정했다.
이대로 계속 이라크로 전진할 경우 문제가 생길 것이라는 예상이었다. 장기간 이라크를 점령한다는 계획은 마치 빠져나가기 힘든 늪처럼 보였으며, 후세인 정권을 무너뜨려도 좋다는 유엔(UN)의 허가도 받지 못한 상태였다.
그렇게 걸프전쟁이 중단됐을 때 난 바그다드에 있었다. 알고 지내던 이라크 관료 모두가 후세인 정권이 살아남았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어 했다.
이로부터 12년 후인 2003년, 미국의 힘에 대한 오만함과 분노로 ‘아들 부시’ 대통령은 과거 자신의 아버지를 자제하게 만들었던 현실을 보지 못했다.
UN 안전보장이사회에서 이라크 침공 및 정권 교체를 명시적으로 허용하는 결의안 통과를 이뤄내지 못하자, 부시 대통령과 블레어 총리는 이미 앞서 통과된 다른 결의안으로도 이라크에 대한 군사 활동이 가능하다는 주장을 펼쳤다.
당시 UN 사무총장이었던 코피 아난도 이러한 미국과 영국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못했던 인물 중 하나였다. 침공 18개월 후 BBC와의 인터뷰에서 아난 전 사무총장은 해당 침공은 UN 헌장에 “준거하지 않는”고 말한 바 있다. 즉 국제법상 불법이라는 것이다.
프랑스 등 다른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동맹군도 침공에 동참하길 거부했다.
블레어 총리는 영국 내 대규모 반전 시위도 무시했다. 이러한 결정은 블레어 총리의 이후 정치 커리어를 따라다니며 내내 발목을 잡게 된다.
대통령이나 총리 등 국가 정상이 내리는 결정 중 개전만큼 중대한 결정도 없다. 부시 대통령과 블레어 총리의 개전 결정으로 수십만 명이 목숨을 잃었다.
그리고 침공 명분은 이내 사실이 아닌 것을 드러났다. 블레어 총리는 유창한 연설로 주장한 후세인이 대량살상무기를 개발하고 있다며 위험한 인물로 규정했으나, 이는 사실이 아니었다.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대량살상무기, 이는 첩보 실패일 뿐만 아니라 리더십의 실패였다.

미군은 “충격과 공포”라는 작전명을 붙이고 이라크에 대규모 공습을 가했다. 부시 대통령 주변 신보수주의자들은 총칼로도 민주주의 확산과 지역 안정 도모가 가능하다고 착각했다.
압도적인 규모의 미군은 자국 영토 보호를 넘어 중동 지역을 안정시킬 것이며, 시리아, 이란 등에서 민주주의가 마치 좋은 바이러스처럼 확산하리라는 착각이었다.

실제로 침공 몇 주 뒤 후세인은 축출됐다.
그러나 이라크 국민들은 전혀 감사할 기분이 아니었다. 후세인이 지도자로 있던 마지막 10년간 이라크 국민들의 삶은 UN의 이라크 제재로 이미 피폐해진 상태였다. 거기에 미국과 영국이 전쟁을 시작하며 더욱 이들의 삶은 어려워졌다.
미국과 영국 및 그 동맹국은 이라크 길거리에 평화를 가져다주지 못했고 약탈, 보복 공격, 범죄 등으로 점철된 악몽 같은 시간이 이어졌다.

그리고 서방의 점령에 반대하는 움직임은 종파 간 내전으로 변했다. 미국이 시아파, 쿠르드족, 수니파 등 이라크 내 3대 주요 집단 간 인종과 종파 노선을 따라 권력을 분배하는 정부 시스템을 세우자 이라크인들은 서로 등을 돌렸다.
무장 민병대가 출몰해 점령군에 맞섰으며, 민병대 간 민간인 살해가 이어졌다.
그리고 지하디즘 단체들은 이러한 혼란을 이용해 외국 세력을 죽이고자 움직였다.
일례로 이후 미군에 의해 사살당한 요르단 출신의 수니파 극단주의자 아부 무사브 알-자르카위는 서방의 점령에 대한 반란을 종파 간 내전으로 바꾸기 위한 공격을 감행했다. 그리고 시아파 암살단은 공포 통치를 일삼으며 또 이에 보복했다.
2003년 이라크 침공으로 얼마나 많은 이라크인이 죽었는지 정확한 규모는 알려진 바 없다. 수십만에 달할 것으로 추정할 뿐이다.
그리고 종파 간 폭력적인 갈등은 여전히 중동을 맴돌고 있다.
또한 이라크 침공이 지정학적으로 남긴 결과물은 여전히 현재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다.
미국은 후세인 정권을 무너뜨림으로써 의도치 않게 이라크 내 권력 균형을 시아파 종주국인 이란의 입맛에 맞게 만들었다. 후세인은 이라크를 이란으로부터 막는 수니파 쪽 방벽으로 여겨지던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후세인 정권이 무너지자 이라크에선 이란과 가까운 시아파 정치인들이 득세했다. 오늘날까지 이란이 지원하고 훈련한 민병대는 이라크에서 가장 강력한 군대 중 하나로, 정부 인사까지 배출했다.
또한 이라크 침공 이후 미국과 영국은 또 다른 재앙을 초래할까 두려운 나머지 2011년 ‘아랍의 봄’이라고 불리는 반정부 시위 운동 및 혁명의 물결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으며, 특히 바샤르 알-아사드 시리아 대통령이 자국민을 대상으로 자행한 내전에도 소극적으로 반응했다.
이에 더해 인구가 빠르게 증가하는 이라크 내 혼란한 상황은 유럽행 이민자 증가로 이어졌다. 영국 내무부에 따르면 영국 해협을 통해 영국으로 건너오는 민족 중 이라크인들이 4번째로 많다. 영국 ‘난민 위원회’는 이들 중 대부분이 난민으로 인정받았다고 설명했다.
오늘날 미국과 영국의 지도자들은 더 이상 이라크 침공에 연연하지 않지만, 여전히 잊지 못하는 이들도 있다.
최근 국제법을 준수하라는 국제사회의 호소를 무시하고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후에도 전 세계 많은 개발도상국이 러시아에 중립을 지켰다. 이에 대해선 여러 이유가 있겠으나, 과거 미국, 영국 등 서방 동맹국이 이라크 침공에 반대하는 목소리를 어떻게 짓밟았으며, 어떻게 국제법을 무시했는지에 대한 기억도 한몫한다.
한편 이라크 내부에선 차라리 후세인 시절을 그리워하는 목소리도 들을 수 있다. 비단 같은 수니파 공동체 내부에서만이 아니다. 그렇다는 건 전쟁 후 지난 20년이 얼마나 참혹했는지 잘 보여준다.
적어도 그땐 그 늙은 독재자의 통치하에 자신이 어떤 쪽인지 가늠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후세인은 자기 사위 등 모든 사람을 동등하게 적으로 규정해 죽여대던 살인마였다.
모술 인근에서 기름을 얻기 위해 줄 서고 있던 수니파 주민 모하메드(48)를 만났다. 모하메드는 서방 침공 이후 시아파가 이끄는 이라크 정부가 수년간 다른 종파 주민들을 살해했다며 분노를 터뜨렸다.
“후세인 통치 시절이 단 하루만이라도 다시 돌아오길 바랍니다. 네, 후세인은 독재자였고 혼자만의 규칙으로 나라를 다스렸죠. 그러나 후세인은 시아파 혹은 수니파인지, 아니면 쿠르드족 혹은 야지디족인지, 이러한 종파와 민족을 이유로 사람을 죽이진 않았습니다.

물론 현재 이라크에선 희망의 조짐이 느껴진다. 여러 마을과 지역이 여전히 폐허로 남아있으며, 서방 세계의 기준으로는 여전히 국가적 위기라 할 수 있는 위험 요소로부터도 안전하지 않지만, 이라크인들은 이젠 더 안전해졌다고 느낀다.
여전히 폭탄과 매복 공격을 감행하는 IS 극단주의자들을 억제하고자 잘 훈련된 반테러 부대가 활동 중이지만, 상점 주인들은 1년 중 가장 대목인 라마단 기간을 바라며 손님 맞을 준비를 하고 있다.
한편 장기적인 관점에서 바라본, 이라크 국민들이 느끼는 이라크 침공의 가장 큰 결과물은 바로 미국이 선동한 정치 체제다. 민족과 종파 노선을 따라 권력을 나누는 이러한 정치 체제에서 정치인들은 엄청난 부정부패를 저질렀다.
2003년 침공 이후 부정부패로 이라크 국민들이 도난당한 금액은 1500억~3200억달러(약 196조~ 418조원)에 이를 것으로 추정된다.
종파를 막론하고, 부정부패의 이익이 돌아가지 못한 대부분 이라크인들은 지속적인 정전, 형편없는 수도 시설 및 의료 시스템에 고통받고 있다. 과거 유럽에서 최고로 여겨졌던 병원들이다.
또한 이라크의 길거리를 걷다 보면 학교에 가는 대신 일을 하거나 구걸하는 아이들을 쉽게 만나볼 수 있다. 이라크는 과거 중동에서 교육 시스템이 가장 발달한 국가 중 하나였다.
한편 모하메드 시아 알수다니 이라크 현 총리는 새로운 출발을 약속했다.
알수다니 총리는 나라를 내부에서부터 갉아먹는 암과 같은 존재인 부정부패 척결을 가장 우선순위로 내세웠다. 심지어 압수돼 이라크 국고에 반환된 지폐 더미를 배경으로 연설하기도 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이들은 바로 무고한 희생자들이다. 목숨을 잃은 이들뿐만 아니라 이라크인 수백만 명 등 수많은 중동 주민의 삶은 침공 및 그 이후 사태로 더욱 열악해졌다.

한편 신자르 인근에서 발견된 집단 매장지에서 만난 야지디족 운동가들은 국제 사회의 보호를 호소했다. 생존자들은 2014년 대량 학살을 자행한 IS 무장대원들의 억양이 이라크식이었다며 인근 지역인 텔 아파르 출신인 자들도 있다고 말했다.
야지디족 운동가인 파하드 바라카트(25)는 당시 신자르산으로 탈출해 살아남았지만, 여전히 이웃들이 무섭다고 밝혔다. 바라카트는 “우리 주변 부족, 아랍 부족들”이 살인을 저질렀다며 “어떻게 그럴 수 있냐. 우리를 죽이고, 야지디족 여성들을 강간한 이들은 (다름 아닌 같은) 이라크인이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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