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학교폭력 피해자의 복수극을 다룬 넷플릭스 드라마 ‘더 글로리’의 시작은 처절했지만, 결말은 속 시원했다는 평가가 나오고 있다. 하지만 실제 현실에서 학교폭력 피해자들은 어떤 결말을 기대할 수 있을까? BBC 코리아가 학창 시절 폭력을 경험한 후 성인이 된 피해자들을 인터뷰했다.
다른 이유는 없었다…그들 눈에 띄었을 뿐
미용사로 일하는 표예림(27)씨는 경상남도 의령군 의령읍에서 초등학교 때부터 고등학교에 이르기까지 12년간 학교폭력을 당했다고 했다.
사소하게는 험담을 하거나 물건을 숨기는 것부터, 심하게는 변기통에 머리를 강제로 집어넣거나 발로 배를 차기까지. 반응이 없으면, 반응할 때까지 폭행이 이어지기도 했다.
반려동물 서비스 업종에 종사하는 임호균(24) 씨는 경기도 안성에서 학교를 다니면서 중학교 1학년 때와 고등학교 1학년 때 학교폭력을 경험했다고 밝혔다.
가해자는 달랐지만, 일년 동안 언어폭력이 이어졌다. 뒤에서 머리를 때리거나 쿡쿡 찌르는 등의 손찌검도 있었다.
이들은 어느 순간, 이유 없이 갑자기 시작된 괴롭힘이 이렇게 오랜 시간 자신을 괴롭힐 줄 몰랐다고 말했다.

학교는 날 보호하지 못했다
예림 씨가 자란 의령군 의령읍에는 학교도, 학생도 많지 않았다. 많은 학생이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까지 같은 학교에 진학했다.
그는 당시 초등학교 담임 교사에게 피해 사실을 말했지만, “너는 그 애들한테 잘못한 게 없냐, 왜 너는 그 애들과 친하게 지내려고 노력하지 않냐”는 대답에 좌절했다고 했다.
결국 그에게 학교는 ‘도망쳐야 할 곳’이었다. 오래 머물수록, 괴롭힘은 길어졌다.
예림 씨는 이후 인문계 고등학교에 진학했지만, 야간자율학습(야자) 시간을 피하기 위해 미용 학원에 다니기 시작했다. 그러면 5교시가 끝나면 학교를 빠져나올 수 있었기 때문이다. 왼손잡이라 처음에는 어려움이 많았지만, 매일 새벽 1시까지 연습에 매진했다.
대학 진학을 포기한다는 뜻이었기에 부모님은 심하게 반대했다. 부모님은 이때까지도 예림씨가 폭력을 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몰랐다.
“원래는 도서관 사서가 되는 게 꿈이었어요. (친구들로부터) 도망 다닐 때 도서관을 진짜 많이 갔거든요. 도서관 안에서만큼은 정말 조용했어요. 조용하고, 편안하고, 책을 읽으면 집중하게 되다 보니까 주변 소리가 신경 쓰이지 않았고요. 그런데 사서가 되려면 대학을 나와야 하고, 대학을 나오려면 야자를 해야 해서 포기하게 됐죠. 그냥, 당장 하루하루 사는 거에 초점을 맞췄어요.”
예림 씨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도망치듯 지역을 떠났다. 아무도 그를 모르는 곳에서 ‘새 삶’을 살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때는 다른 삶을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강했던 것 같아요. 피해 사실을 숨기고, 진짜 완전히 다른 사람이 돼서 평범하게 살아야겠다는 생각이요. 학창 시절에 대한 얘기가 나오면 ‘그냥 그랬지’ 이런 식으로 넘겼어요. 심지어 애인이 물어봐도 ‘내 사생활이기 때문에 말하기 싫다’고 거절했고요.”

‘차라리 쓰러질 때까지 맞았으면, 할 때도 있었어요’
호균 씨도 당시 해당 교사에게 학교폭력 피해 사실을 알렸다고 했다. 최소한 반을 옮겨줬으면 했지만, 자리를 옮겨주는 데 그쳤다. 이후에도 학년이 끝날 때까지 괴롭힘은 이어졌다.
“제가 죽을 만큼 맞고 쓰러지는 정도의 학교 폭력이었다면 학교폭력대책심의위원회(학폭위)가 열리는 등 조치가 있었겠지만, 매일 교묘하게 신경을 긁고 스트레스를 주고 약간의 신체 접촉이 있는 식이다 보니…”
그러면서 기억나는 몇몇 순간들을 회상했다.
“친한 친구는 아니었고, 앞자리에 앉은 반 친구 두 명이 뒤를 돌아앉아 저와 얘기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가해자가 갑자기 저를 때리기 시작하는 거예요. 그런데 대화하던 두 친구는 이걸 보더니 그냥 자연스레 다시 앞을 보고 앉더라고요.”
그는 중1 때부터 우울증을 앓기 시작해, 수많은 병원과 센터를 전전했다. 고1 때 또다시 학교폭력을 당하면서 심리 상태는 극에 달했고, 고등학교 2학년 때는 폐쇄 병동에 입원도 했다.
그는 휴대폰도 사용할 수 없고 TV도 볼 수 없는, 사회와 격리된 곳에서 3~4개월을 지냈다고 한다.
어느 정도 마음의 안정을 되찾고 2개월 정도 학교에 다녔지만, 결국 대안교육지원센터로 갈 수밖에 없었다. 이후 학교에 돌아간 적은 없었다. 호균씨는 본인 사진이 없는 고등학교 졸업앨범을 받았다.

‘사이다 결말…정말 그렇게 생각해요?’
지난해 12월, 학교폭력을 주제로 한 드라마 ‘더글로리’가 방영되면서 이들은 학교폭력의 기억을 다시 들춰낼 수밖에 없었다.
“(드라마 ‘더글로리’ 결말이) 통쾌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학교폭력을 당한 적이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저는 전혀 통쾌하지 않았어요. 허무함이 남았죠. 주인공 인생은 가해자한테 전부 다 걸었던 거잖아요.”
예림 씨는 드라마 ‘더 글로리’를 우연히 보게 됐다. 그가 당한 폭력이 떠올라 괴롭고, “이걸 보고 나면 (내 감정을) 감당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어 중간중간 시청을 멈춰가면서. 하지만 결국, 끝까지 볼 수밖에 없었다.
“주인공의 선택이 궁금했어요. 나는 도망갔는데, 주인공은 어떻게 행동했을지가 궁금해서요.”
첫 번째 감정은 ‘자책’이었다. “주인공은 저렇게까지 했는데, 나는 성인이 되고 7년이 지나도록 뭘 했나”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다음에는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졸업앨범을 뒤지고 수소문해 가해자들에게 연락했지만, 돌아온 답변은 “네가 표혜교(배우 송혜교가 드라마 ‘더글로리’ 주인공 역을 맡았다)인 줄 아느냐”라는 조롱이었다.
호균씨는 주인공의 복수를 응원하긴 했지만, 결말이 비현실적이라고 생각했다. 아니, 애초에 주인공이 복수를 다짐한 게 비현실적이라고 했다.
“저는 이 정도 (폭력을) 당했는데도 복수 같은 것은 꿈도 못 꾸고, 우울했고, 자해나 자살 시도도 몇 번 했었어요. ‘내가 왜 살아야 하지’라는 고민을 많이 했죠. 그런데 드라마 주인공은 꿋꿋하게 나아가잖아요. 정말 멘탈이 탄탄하고 어려움을 이겨낼 수 있는 자신감이 있는 사람이라면 가능하겠지만, 많이 비현실적이라고 느꼈어요.”
그는 몇 년 전, 그를 괴롭혔던 가해자가 TV에 출연해 유명세를 얻는 것을 보고 복잡한 기분이 들었다고 했다.
“(가해자로부터) 진심 어린 사과를 받고 싶은 마음은 있어요. 그런데 한편으로는 제 인생에 더 이상 관여 안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들고요.”

학교폭력, 성폭력과 닮았다는 이유는
“저는 제가 피해를 입었다고 하면 경찰이나 다른 분들이 내 피해 사실을 입증해줄 줄 알았어요. 근데 현실은 그게 아니에요. 내가 피해를 당했다는 증거를, 피해자인 제가 일일이 찾아서 가져다줘야만 해요.”
예림씨는 드라마를 계기로 학교폭력 피해 사실을 늦게나마 공론화하고 법적 절차를 밟으려 했지만, 대부분의 경우 공소시효가 끝나 있었다.
학교폭력 공소시효는 현행 학교폭력 관련법에 명시돼 있지 않아 형법상 폭행죄(5년), 일반상해죄(7년)·특수상해죄(10년), 강제추행(10년) 등을 적용하고 있다.
고등학교 2학년 때 자신을 폭행한 가해자를 특수상해죄로 고소하는 게 그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법적 조치였지만, 이마저도 올해 공소시효가 만료된다. 또, 그가 동창 수십 명한테 연락해 받아낸 진술서는 등은 ‘직접 증거’로 채택되기엔 부족했다.
“공소시효가 제가 학교폭력을 당한 기간보다 더 짧아요. 좀 억울하다고 생각했어요. 나에겐 진술서 14장과 12년 동안의 피해 사실이 있는데, 단지 공소시효가 만료됐다는 이유로 그 애들을 법의 심판대에 놓지 못하는 거예요.”
예림 씨가 국민청원으로 눈을 돌린 이유다. 그는 학교폭력 관련 공소시효 폐지와 사실적시 명예훼손 폐지, 간접증거 효력 강화, ‘촉법소년’ 제도 폐지 등을 주장하고 있다.
학교폭력 피해자 법률대리인을 맡아온 박상수 변호사는 학교폭력 사건에서 관련 법 개정이 꼭 필요하다고 봤다.
그는 “지금 학교폭력 사건은 성범죄 관련 법이 개정되기 전, 성범죄 사건에서 벌어졌던 일이 그대로 벌어지고 있다”며 “피해자가 법적 절차에서 완전히 소외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피해자는 피해 증거를 직접 다 수집해야 하고, 모든 법적 절차에서는 가해자의 부모와 법률 대리인들이 진술한다. 이 과정에서 피해자나 피해자 대리인은 진술할 권리조차 없고, 절차 진행 관련해서 통보도 받지 못하고 있다는 설명이다.
심지어 피해자가 학교폭력 사실을 밝혔다가 가해자로부터 사실적시 명예훼손으로 고소당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박 변호사는 “사실적시 명예훼손의 필요성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지만, 지금은 피해자가 가해자의 (범죄 사실을) 알리는 것을 막는 수단으로 더 많이 활용되고 있다”며 “전 세계적으로도 선진국 중 팩트를 얘기했다고 해서 형사처벌 하는 나라는 정말 몇 군데 없다”고 했다.
학교폭력 사건을 전문으로 하는 노윤호 변호사는 “사실적시 명예훼손의 경우 (고발) 내용에 따라서, 그리고 공익적인 목적이 있었다고 인정되는 경우 처벌받지 않기도 한다”며 “하지만 내용이 지나치게 비난 일색이라든지 인신공격적 표현이 있었다면 공익적인 목적을 인정받기 힘들다”고 했다.
다만 노 변호사는 “학교 폭력의 본질이자 피해자들이 바라는 부분은 가해자가 빨리 잘못을 인정하고 피해 회복을 위해 노력하는 것”이라며 “지나치게 (가해자에 대한) 불이익에만 치중하다 보면 가해 학생 측에서도 격렬하게 부인하고 반발하고, 심지어 피해 학생을 쌍방으로 신고해서 분쟁으로 끌고 가는 상황이 생길 수 있다”고 했다.
학교가 ‘트라우마’로 남아선 안 돼
학교폭력 피해자와 가해자가 모두 미성년자인 만큼, 법적 처벌을 논하기 전에 학교의 역할을 강화하고 피해 학생의 치유와 회복에 집중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2000년 ‘성수여중 폭력사건’ 피해자 어머니인 조정실씨는 학교폭력피해자가족협의회를 구성하고 23년째 활동을 이어오고 있다.
그는 “그동안 학교폭력 특별법도 만들어지고, 피해자 보호 및 지원도 늘었지만 아직도 제대로 보호받지 못하고 고통받는 학교폭력 피해자와 학부모들이 많다”며 “(학교폭력) 사건에 대해 분노만 하지 말고 피해 학생들이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그들의 아픔을 어떻게 돌봐줄 수 있는지 관심을 가져주면 좋겠다”고 했다.
수도권 지역에서 교사로 일하는 김지원(가명)씨는 2년간 학생부에서 ‘교원 기피 업무 1순위’로도 꼽히는 학교폭력 업무를 맡았다. 그도 첫 해는 등떠밀려 업무를 맡게 됐지만, 이듬해 같은 업무를 자원했다. 학교폭력 문제가 너무 심각하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학폭 업무를 처리하면서 학생들이 생각보다 다양한 종류의 학폭에 노출돼 있다는 것을 알게 됐고, 피해 학생들이 최소한이나마 제도적으로 구제를 받았으면 하는 마음이 커졌어요.”
교육부 발표에 따르면 지난해 학교폭력 피해응답자는 321만 명 중 1.7%인 5.4만 명이다.
김씨는 “요즘 대부분 학교폭력이 악플·저격 글 같은 사이버테러나 루머 확산을 통해 이뤄진다”며 “가해 학생이 징계를 받더라도 가해의 여파가 워낙 크기 때문에 피해학생들은 교내외 상담을 병행하더라도 정신적인 스트레스로 오랜 기간 힘들어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김씨는 “몇몇 담임 선생님들은 사소한 갈등마저 중재 노력 없이 바로 학폭으로 넘겼다”며 “사소한 갈등이 진위 여부를 떠나 무조건 학교폭력으로 신고됨으로써 아이들이 쉽게 화해할 수 있는 여지를 완전히 차단하고 관계 회복 기회까지 뺏어가는 경우가 꽤 많았다”고 토로했다.
권일남 명지대 청소년지도학과 교수도 학교 자체적으로 피해 학생 보호 기능을 강화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학교가 학폭위 또는 지역위원회에 학교 폭력 사건 대부분을 맡기는 건 학교 스스로 교육적 기능을 포기하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지적했다.
2021년부터 학교장이 학교폭력을 인지한 경우 피해자 반대만 없으면 가해 학생과 피해 학생을 즉시 분리하고 있지만, 분리 기간은 최대 3일에 불과하다. 많은 피해 학생들이 ‘가해 학생과 분리되지 못했다’고 느끼는 이유다.
이후 학폭위에서 조치를 취하더라도 가해 학생이 불복할 경우 조치가 미뤄지는 동안 피해 학생이 방치되는 상황이 발생하기도 한다.
청소년폭력예방단체 푸른나무재단의 김석민 상담본부 팀장은 “학교폭력 사안 처리 절차 중에서 피해 학생이 보호받지 못하는 시점과 시기가 있다”며 “이때 학교에서 취할 수 있는 조치를 좀 더 구체화해서 조례나 가이드 등으로 마련하는 작업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러나 학교는 학교폭력 피해자들에겐 그 자체로 트라우마를 일으키는 공간이 되기도 한다. 피해자가 학교로부터 잠시 떨어져 치유할 대안학교가 필요한 이유다.
하지만 국내에 학교폭력 피해자를 위한 대안학교는 대전에 있는 해맑음센터 단 한 곳뿐이다. 그마저도 시설이 노후화해 운영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호균씨도 고등학교 3학년 때 해맑음센터에서 많은 도움을 받았다.
그는 “드라마 더글로리에서는 주인공의 복수를 도와주는 사람이 많았지만, 나에게는 인생을 잘 살 수 있게 도움을 주는 사람이 많았다”며 “학교폭력을 당한 많은 사람들이 치유받고 안정적으로 생활할 수 있는 기관과 환경이 좀 더 많이 마련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 학교폭력 상담 및 신고는 전화(국번없이 117), 서울지방경찰정의 학교폭력신고센터 안전드림 홈페이지(http://www.safe182.go.kr)에서도 도움을 받을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