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도 모스크바에서 남쪽으로 230km 떨어진 러시아 예프레모프 지역의 중심가엔 전쟁과 관련한 그림과 포스터 등으로 뒤덮인 벽이 있다.
복면을 쓰고 총을 든 러시아 군인의 사진이 크게 인쇄돼 있으며, ‘Z’와 ‘V’도 큼지막하게 눈에 띈다. 러시아가 현재 우크라이나에서 벌이고 있는 “특별 군사 작전”을 상징하는 글자다.
시 한 편도 적혀 있다.
선한 이들에겐 힘이 있어야 한다
선한 이들에겐 철의 손이 필요하다
선한 이들을 협박하는 이들의
피부를 벗겨버리기 위함이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에 대한 러시아의 공식적이며 애국적인 입장을 느낄 수 있는 부분이다.
그러나 예프레모프에선 우크라이나 전쟁과 관련해 전혀 다른 모습도 찾아볼 수 있다.
올가 포돌스카야 예프레모프 시의원이 휴대전화를 꺼내 사진 하나를 보여줬다.
어린이가 그린 그림이었다.
그 그림의 왼쪽엔 우크라이나의 국기와 함께 “우크라이나에 영광을”이라는 문구가, 오른쪽엔 러시아 삼색 국기와 “전쟁에 반대합니다!”라는 문구가 적혀져 있었다. 러시아 방향에서 미사일이 날아오자 엄마와 아이로 보이는 이들이 그 앞길을 도전적으로 가로막는 모습을 묘사한 그림이었다.

이 그림을 그린 이는 12살 소녀 마샤 모스칼레바로, 마샤를 홀로 키우는 아버지 알렉세이가 어느 날 포돌스카야 의원에게 조언을 얻고 싶다고 연락해왔다.
마샤가 학교에서 이 그림을 그리자 학교 측이 경찰에 신고했다는 것이다.
포돌스카야 의원은 BBC와의 인터뷰에서 “경찰은 알렉세이의 SNS를 조사하기 시작했다”면서 “그러더니 알렉세이에게 딸을 나쁜 방식으로 양육하고 있다고 비난했다”고 설명했다.
그렇게 알렉세이는 기소됐고, SNS에 반전 게시물을 올려 러시아군의 명예를 훼손했다는 죄로 벌금 3만2000루블(약 54만원)이 부과됐다.
그리고 불과 몇 주 전엔 형사 소송도 제기됐다. 마찬가지로 반전 게시물로 인한 명예훼손이 그 혐의다. 이번엔 징역형이 선고될 수도 있다.
알렉세이는 현재 예프레모프의 자택에서 가택연금 중이다. 우선 딸 마샤는 어린이집에 보내졌다. 알렉세이는 심지어 딸과의 전화 통화도 허락받지 못했다.
포돌스카야 의원은 “우리가 어린이집에 찾아가 마샤의 안부를 물어보려” 해도 이번 달 1일 이후 마샤를 본 사람이 아무도 없다”고 말했다.
“러시아 당국은 전 국민이 고분고분하길 원합니다. 자신만의 의견이라는 건 허락되지 않습니다. 의견이 다르다면 그냥 그 사람의 SNS 게시물을 읽지 않으면 됩니다. 그런데 의견이 다르다고 해서 그 사람을 가택연금 시키고 아이를 떼어놓는 건 말이 안 됩니다.”
BBC 취재진은 알렉세이가 사는 아파트 단지에 서 있었다. 창문이 열리고 한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알렉세이였다.
그러나 그와 대화할 순 없다. 가택연금 규정에 따라 알렉세이가 접촉할 수 있는 이들은 변호사, 수사관, 교도소 직원들로 제한되기 때문이다.

알렉세이의 변호사인 블라디미르 빌리엔코가 이내 도착했다. 빌리엔코 변호사는 지역 시민 운동가들이 알렉세이를 위해 사준 음식과 마실 것을 갖다줬다.
알렉세이를 만나고 온 빌리엔코는 “딸이 곁에 없어 매우 걱정하고 있다”면서 “집안의 모든 것에서 딸을 떠올린다. 딸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지 걱정한다”고 전했다.
BBC 취재진은 빌리엔코에게 당국이 마샤를 알렉세이로부터 데려간 이유와 관련해 짐작이 가는 부분이 있는지 물었다.
이에 빌리엔코는 “알렉세이에게 진짜 질문을 하고 싶었다면 알렉세이를 소환해 진술을 받아냈어야 했다”면서 “그리고 마샤도 불러 이야기해야 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저 마샤를 [어린이집에] 보내버리기로 한 거죠. 제 생각에 알렉세이가 적용받은 이러한 혐의가 없었다면 일어나지 않았을 일입니다.”
“현재 러시아 사회 복지 당국은 알렉세이 가족에게 집착하고 있는 모습입니다. 저는 순전히 정치적인 이유라고 생각합니다. 알렉세이 가족의 고난은 그저 어린 소녀가 그 그림을 그린 뒤부터 시작됐습니다.”
BBC 취재진은 길거리에서 만난 알렉세이의 이웃들에게 현 상황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었다.
연금으로 살고 있다는 안젤리나 이바노브나는 “마샤는 착한 소녀고 한 번도 알렉세이와 문제가 있었던 적은 없다”면서도 “하지만 아무 말도 못 하겠다. 너무 무섭고 겁난다”고 말했다.
어느 젊은 여성은 “아마도 [알렉세이를 위한] 지지 서명을 모을 수도 있을 것”이라면서도 현 상황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의견을 물어보자 “미안하다, 말할 수 없다”고 했다.
무슨 일이 일어날지 두렵냐는 질문에는 “그렇다, 물론이다”라는 답이 돌아왔다.
알렉세이가 사는 아파트 단지에서 마샤가 다녔던 제9 학교까진 짧은 거리다. 알렉세이는 해당 학교가 마샤가 그린 반전 그림을 경찰에 신고했다고 주장하고 있으나, 학교는 BBC의 서면 의견 요청에 답하지 않았다. 직접 방문하려 해도 들어갈 수 없다는 말만 들었다. 전화 또한 받지 않았다.
그래서 BBC 취재진은 제9 학교의 홈페이지를 방문했다. 앞서 예프레모프 시내 중심가에서 보았던, 애국적인 그림으로 가득 찬 벽이 떠올랐다.
홈페이지에는 “특별 군사 작전의 영웅들”이라며 우크라이나에서 싸운 러시아 군인들의 초상화 24장을 소개하고 있었다.
또한 “모든 건 승리를 위한 것. 최전선에 나가 있는 우리 청년들을 응원합시다!”와 같은 애국적인 슬로건도 눈에 띄었다.
지난해 10월엔 우크라이나에서 싸우고 돌아온 군인들이 해당 학교를 찾기도 했다. 당시 라리사 트로피모바 학교 이사는 “우리는 결코 잘못된 일을 할 리 없는 우리 자신과 조국을 믿는다”고 연설했다.
한편 마을 건너편 지방 법원에선 알렉세이 가족의 지지자들과 기자들이 모여들고 있었다.
예프레모프의 청소년위원회가 알렉세이의 친권을 공식적으로 제한하고자 법적인 절차를 밟고 있기 때문이다.

판사와의 “대화”로도 알려진 초기 심리에서 빌리엔코 변호사는 알렉세이가 직접 이곳에 오고 싶어 했다고 전했다. 그런데 자녀에 대한 친권이 걸린 문제임에도 법원 방문이 허용되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법원 복도에선 어느 시민운동가가 “마샤를 아버지에게 돌려줘라!”고 적힌 포스터를 펼쳐 들었다. 그러자 경찰관이 다가와 포스터를 내려놓으라며 제지했다.
청소년위원회는 알렉세이와 딸 마샤의 사건에 대한 의견을 묻는 BBC의 요청에 아직 응답하지 않았다.
한편 알렉세이의 지지자 중 한 명인 나탈리야 필라토바는 알렉세이 가족의 사연은 러시아 반체제 인사들에 대한 탄압을 보여준다고 설명했다.
필라토바는 “우리 러시아 헌법엔 표현의 자유, 양심의 자유 등 시민들이 자신이 의견을 펼칠 수 있는 완전한 자유를 지닌다고 적혀있다”면서 “하지만 현재 우리는 자유롭게 의견을 펼칠 수 없다. 금지당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