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주도로 이라크 침공이 시작된 지 20년이 지난 지금, 한때 세계에서 가장 풍요로운 문명으로 꼽히던 고대 바빌론이 이렇게 몰락했다는 사실은 여전히 받아들이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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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주도로 이라크 침공이 시작된 지 20년이 지난 지금, 한때 세계에서 가장 풍요로운 문명으로 꼽히던 고대 바빌론이 이렇게 몰락했다는 사실은 여전히 받아들이기 어렵다.

수도 바그다드를 관통하는 티그리스 강은 많은 비밀을 간직하고 있다. 얼마나 많은 시신이 강에 버려졌는지 아무도 모른다. 미국의 주도로 이라크 침공이 시작된 지 20년이 지난 지금, 한때 세계에서 가장 풍요로운 문명으로 꼽히던 고대 바빌론이 이렇게 몰락했다는 사실은 여전히 받아들이기 어렵다.

현재 이라크는 어느 정도 안정을 되찾았지만, 여전히 종파 간 보복 살인, 부비트랩이 설치된 차량, 극단주의 수니파·시아파 무슬림 민병대와 함께 살아가고 있다. 그 뿌리를 거슬러 올라가면, 2000년대 초 미국이 독보적인 힘을 발휘하던 시절을 마주하게 된다.

침공 결정

9.11 테러에서 무장 단체 알카에다의 표적이 된 미국은 2001년 알카에다의 본거지인 아프가니스탄 침공을 위해 연합군을 조직했다.

그 ‘성공’을 확인한 이후 미국의 관심은 곧 이라크로 향했다. 마수드 바르자니 전 이라크 쿠르드자치정부 수반은 본인과 경쟁 관계에 있던 한 쿠르드 정치인이 2002년 4월 워싱턴을 비밀리에 방문하도록 초청을 받았다고 말한다.

바르자니는 “우리가 동의하든 하지 않든, 참여를 원하든 원하지 않든, 사담 후세인 정권을 전복시키기로 결정이 내려진 상태였다”고 설명했다.

마수드 바르자니 전 이라크 쿠르드자치정부 수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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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수드 바르자니 전 이라크 쿠르드자치정부 수반

바르자니는 미국이 회의체를 조직해 사담 후세인이 제거되면 개입할 이라크 야당 지도자들을 잠재적 ‘후속 정부’의 일원으로서 더 폭넓게 초대하도록 제안했다. 이후 2002년 12월 런던에서 회의가 열렸고 민주적인 연방 이라크 구성에 대해 합의가 이뤄졌다.

그러나 바르자니는 일부 시아파 정당이 “복수에 대한 열망”을 표출하는 것을 목격하면서 경종이 울렸다고 말한다. 사담 후세인 치하에서 이라크의 시아파 무슬림 인구 대다수는 폭력적 탄압을 마주했다.

당시 미국과 영국은 이라크에 ‘대량살상무기’가 있다며 전쟁을 일으켰지만, 실제로는 발견되지 않았다. 해당 군사작전은 2003년 3월 19일 바그다드에 집중된 강력한 공중 폭격으로 시작됐다.

사담의 몰락

3주 후 4월 9일, 사담 후세인은 바그다드의 수니파 지역 아다미야를 마지막으로 방문했다. 미군은 이미 바그다드 도심에 진입했고, 불과 몇 시간 만에 사담 후세인의 동상을 무너뜨릴 수 있었다.

당시 이라크 기자 디야르 알 오마리가 바그다드에 있었다. 오마리의 설명에 따르면, 광장에 모인 이라크인들이 처음에는 동상을 끌어내릴 수 없었다. 이에 미군은 장갑차를 동원했는데, 동상의 바닥과 사담 후세인의 발 부분은 여전히 땅에 박혀 있는 상태였다. 이는 앞으로 벌어질 일의 전조와도 같았다. 사담 후세인의 바트당 정권은 수십 년에 걸쳐 이라크 사회에 깊은 뿌리를 내리고 있었던 것이다.

바그다드가 함락된 후 사담 후세인 이라크 대통령과 그의 가족은 안바르 지방으로 떠났다. 이라크의 수니파 지도자 알리 하템 술레이만은 사담 후세인의 이 행보에 이유가 있다고 말한다.

“안바르는 수니파의 본거지이자 이라크 내 아랍 민족의 본거지이므로 안전한 피난처가 될 수 있었습니다.”

사담 후세인은 2003년 12월 미군에 체포됐으며 3년 후 반인도 범죄로 유죄 판결 및 사형 선고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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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담 후세인은 2003년 12월 미군에 체포됐으며 3년 후 반인도 범죄로 유죄 판결 및 사형 선고를 받았다

미국 연합군은 사담 후세인 정권을 정치·사회에서 배제하고 이라크 사회의 완전한 ‘탈바트화’를 추진하기로 결정했다. 이라크에서 직업을 얻거나 교육을 받으려면 바트당원 자격이 필수적이었다. 따라서 ‘탈바트화’ 결정은 이라크 군사·안보·민간 기관의 완전한 붕괴로 이어졌다.

알리 하탐 술레이만은 “이 과정에서 가장 큰 피해자는 수니파였다. 이들은 소외되고 배제되었으며 그 역할이 축소됐다”고 설명한다.

“이때 수니파가 사담 후세인 정권을 지지하는 것처럼 간주됐지만, 사실이 아닙니다.”

이로 인해 전직 이라크 군인 및 안보 관리들이 극단주의 조직에 합류하게 됐다. 알카에다는 다시 일어설 기회를 얻었고 수년간에 걸쳐 반란을 이어갔다.

한편, 사담 후세인은 2003년 12월 미군에 체포됐으며 3년 후 반인도 범죄로 유죄 판결 및 사형 선고를 받았다.

‘희생의 축제’를 의미하는 ‘이드 알 아드하’는 이슬람에서 가장 성스러운 날로 꼽힌다. 이날 당일 새벽에 사담 후세인이 처형되자, 이라크의 수니파 지역과 많은 아랍 국가에서 분노의 물결이 일어났다.

이란과 가깝다고 알려졌던 누리 알 말리키 전 이라크 총리는 BBC 아랍어 서비스와의 인터뷰에서 다른 이라크인을 화나게 하더라도 자신의 힘을 보여주리라 결심했다고 말했다.

알 말리키는 “수니파 아랍 지도자(사담)를 어떻게 시아파 지도자(말리키)가 다스릴 수 있었겠는가?”라며, 사형 집행을 서두른 것은 법원 결정에 대한 이의 제기를 회피하기 위해서였다고 말했다. 사담 후세인이 해외로 이송되어 결국 석방될 것을 우려한 것이다.

말리키 전 총리는 “일부 걸프 국가들이 사담 후세인을 구하고 싶어 했기 때문에 당시 서둘러 처형을 결정했다”며, 이들 국가들이 미 당국에도 압력을 가하고 있었다고 덧붙였다.

처형 장면이 담긴 영상이 유출되자 논란은 더욱 심화됐다. 사담 후세인은 영상에서 침착한 모습을 보였는데, 이는 당시 이라크 고위 보안관리가 그린 그림과 상반된 것이었다. 그는 사담이 교수대에 올라갈 때 떨고 있었다고 말했던 것이다.

Former Iraqi President Saddam Hussein talks to an Iraqi judge during his initial interview at an undisclosed location in Baghdad on 1 July,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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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담 후세인의 처형은 이라크의 수니파 지역과 많은 아랍 국가에서 분노의 물결이 일어났다

수니파의 분노

사망자가 증가하자 미국은 알카에다와의 전쟁에 동참하도록 수니파 측을 설득했고 결국 알카에다는 패배했다. 2011년에는 미군과 영국군 대부분이 이라크를 떠났다.

그러나 젊은이들이 팔루자 인근에서 농성을 벌이는 동안 알 말리키 총리의 정책을 둘러싸고 도시지역 수니파의 분노가 다시 고개를 들었다. 수니파 지도자 알리 하템 술레이만은 그들의 불만이 “수니파에 대한 보복, 불공정한 재판, 이라크 율법과 사법부의 정치화”에 대한 것이었다고 설명한다.

하지만 알 말리키는 이를 부정하며 알카에다가 농성 뒤에 모습을 감추고 복귀할 기회를 기다리던 중이었고 말한다. 2013년 말, 알 말리키는 군대에 광장 습격을 명령했다. 이로 인해 이라크 국경 안팎의 불안정성이 더욱 커졌다.

알카에다는 더 강력하고 더 잔인해진 새로운 모습으로 돌아왔다. 수많은 도시가 소위 ‘이슬람 국가'(IS) 세력의 손에 넘어갔다.

누리 알 말리키 전 이라크 총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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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리 알 말리키 전 이라크 총리

이라크 군대는 하룻밤 사이에 사라진 것 같았다. 마수드 바르자니 전 쿠르드자치정부 수반은 “10년 동안 구축한 군대가 10시간 만에 증발했다”고 말한다.

알 말리키 전 총리는 전체 군부대 사령관이 어떻게 IS가 진격하기 불과 몇 시간 전에 철수할 수 있었는지 의아해했다. 알 말리키의 뒤를 이어 총리가 된 하이데르 알 아바디는 이 문제에 대해 더 개방적인 시각을 갖고 있다.

알 아바디는 “종파 싸움이 되어 버린 것이 큰 문제였다”며 “IS도 종파적이지만 국가 시스템도 종파적으로 변했다”고 말한다.

그러나 알 아바디는 알 말리키의 정책이 종파적이었다고 말하지는 않았으며, 일부 수니파 도시가 IS를 환영한 이유에 대해 나름의 설명을 내놓았다.

석유와 가스 등 천연자원에도 많은 이라크 주민들은 식량난에 시달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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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유와 가스 등 천연자원에도 많은 이라크 주민들은 식량난을 겪고 있다

알 아바디는 “부패한 안보 시스템이 이라크인의 안보를 협박을 통해 사들였기 때문”이었다며 “이라크 시민들은 국가 안보에 대한 신뢰를 잃었고,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서로 협력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고 설명했다.

이라크의 대대적인 안보·군사 노력으로 4년 만에 IS를 격퇴할 수 있었지만, 이 전투는 수니파 지역에 깊은 상처를 남겼다. 가장 중요한 수니파 도시인 모술에서도 그 상흔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모술에서 가장 오래된 모스크의 셰이크(지도자)는 고뇌에 찬 목소리로 시계를 되돌려 사담 후세인 같은 사람이 이라크를 통치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는 사안의 민감성을 감안해 익명을 요청했다.

그는 “우리는 이 나라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해 발언권이 없다”며 “미국은 이라크를 해방시켰다고 말하지만 이란에 이라크를 거저 넘겨준 것일 뿐”이라고 토로했다.

한편, 식량난에 고통받는 상황에서 누가 무엇을 지배하는지는 탁상공론에 불과하다. 이라크 인구는 젊지만 실업 상태다.

이라크가 전리품을 누가 차지할지를 둘러싼 제로섬 게임에서 벗어날 수 있다면, 풍부한 자원을 배경으로 얼마나 많은 것을 성취할 수 있을지 상상해 볼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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