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얀마 북동부 파 지 기 지역에서 소를 키우며 살아가는 윈 조는 “땅이 흔들렸다”고 회상했다. 지난주 어느 화창한 날 아침, 군용기가 다가오는 소리가 들리더니 잠시 후 폭발이 일어났다.
윈 조는 자신이 사는 마을이 피해를 입은 것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그러나 아내에게 전화를 걸어보니 마을 사람들이 카레 국수, 쌀, 돼지고기 등을 모아 두고 보기 드물게 잔치를 벌이고 있던 곳을 군부가 폭격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리고 7살 난 딸 소이 난다르 은웨도 그곳에 있었다.
윈 조는 급히 끔찍했던 현장으로 달려가 딸을 찾고자 했다.
“자욱한 연기 속에서 여기저기 그을린 유해 틈에서 딸을 찾았습니다. 딸을 찾겠다는 생각밖에 없었습니다.”
윈 조는 딸이 가장 좋아하는 옷이자 그날 입고 나갔던 하얀색 꽃무늬 원피스의 흔적을 찾고자 했다.
그러나 폭격 당시 딸과 함께 있던 장모님의 흔적도, 딸의 흔적도 찾을 수 없었다.
이후 마을 사람들은 BBC와의 인터뷰에서 잔치가 벌어지던 곳에 군용기가 나타나 폭탄을 투하했다면서, 이후로도 군이 헬리콥터에서 20분간 마을을 향해 발포했다고 전했다.
윈 조는 “아직도 믿기지 않는다”면서 “어떻게 무방비 상태의 연약한 어린 아이들에게 이런 짓을 할 수 있냐”고 울분을 터뜨렸다.
쿠데타로 미얀마가 내전의 소용돌이에 휘말린 지 2년이 지난 지금, 군사정권은 말 그대로 저항 세력을 잿더미로 만들고자 점점 더 공습을 가하고 있다.
지난 11일(현지시간)엔 군정의 공습으로 남성, 여성, 어린아이 할 것 없이 무려 168명이 숨지기도 했다. 작년엔 학교를 공격해 어린이 여러 명이 숨졌으며, 같은 달 말엔 콘서트장에 폭탄이 떨어져 약 50명이 사망했다.
최소 600번의 공습
BBC가 분쟁 감시단체 ‘ACLED’의 데이터를 분석한 결과 2021년 2월부터 올해 1월까지 군정의 공습은 최소 600번에 달했다.
현재 미얀마에선 내전으로 수천 명이 목숨을 잃고, 140만 명이 이재민으로 전락했으며, 인도주의적 지원이 필요한 이들이 전체 인구의 거의 3분의 1에 달한다.
유엔(UN)은 미얀마 군정이 이러한 반인도적 범죄와 전쟁 범죄에 대한 책임을 질 수도 있다고 밝힌 바 있다.
한편 이번에 군정은 저항 세력과 연관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마을들을 겨냥한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 미얀마에선 군정에 맞서 지역에서 자발적으로 조직된 민병대 네트워크인 ‘시민 방위군(PDF)’가 형성됐으며, 쿠데타 이후 ‘미얀마 민주 진영 임시정부 국민통합정부(NUG)’가 구성됐다.
군정은 파 지 기 지역에서도 해당 마을이 NUG와 연관된 지역 PDF를 위한 행정 사무소를 열었기에 목표로 삼았다고 설명했다.
사무소 개관과 개관을 축하하는 마을 잔치를 이 지역사회의 저항으로 간주해 용납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7살 소녀 소이 난다르 은웨에겐 그저 가장 좋아하는 꽃무늬 원피스를 마을 사람들에게 자랑할 기회일 뿐이었다.
사건 전날 밤에도 아버지를 붙잡고 이번 잔치에 가게 돼 얼마나 기대되는지 떠들곤 했다.
‘아빠의 사랑스러운 아기’
윈 조는 “딸을 이름으로 불러 본 적이 없다”면서 “언제나 ‘아빠의 사랑스러운 아기’라고 불렀다. 딸은 날 사랑했다”고 회상했다.
딸은 아빠 뒤에 올라타 껴안고 자전거를 타기 좋아했다.
숨지기 전날 밤에도 소이 난다르 은웨는 아빠 옆에서 자고 싶다고 조를 만큼 아빠를 따랐다. 윈 조는 사건 당일 아침 일하러 가기 전 아직 자고 있던 딸의 얼굴에 입맞춤한 기억이 마지막이라고 했다.
윈 조는 딸은 선생님이 되길 꿈꿨다면서 총명했던 소녀라고 전했다.
“딸은 친구들의 공부를 돕기 좋아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딸이 커서 매우 어려운 시기를 겪고 있는 조국을 위해 큰일을 해내길 바랐죠.”
한편 지난 2021년 군정이 쿠데타로 문민정부를 축출하고 아웅산 수치 국가 고문을 가택 연금한 이후 윈 조가 살던 지역에선 결혼식조차 올리지 않고 살고 있었기에, 마을 잔치가 열리는 그날 아침엔 시끄러운 음악을 들으며 돌아오는 꿈을 꿨다.
원래는 윈 조가 딸을 잔치에 데려가기로 했으나, 딸이 너무 기뻐하며 흥분해 아내가 장모님에게 딸을 부탁했고, 그렇게 소이 난다르 은웨는 할머니의 손을 붙잡고 예정보다 일찍 잔치가 열리는 곳으로 향했다고 한다.
군정의 공격이 시작되던 순간 소이 난다르 은웨는 잔치 중심의 임시 천막 안에 있었다.
이들이 살던 파 지 기 지역이 속한 북서부 사가잉엔 이전에도 유사한 공습이 여러 번 일어났으나, 파 지 기 지역이 공습받은 건 이번이 처음이다.
한편 이번 공습으로 부모와 딸 흐닌 유 와이(3)를 잃은 농부 예 나잉은 사건이 있던 날 아침, 이 지역 축제 전통에 따라 나무껍질로 만든 물감을 딸의 얼굴에 바르는 걸 도왔다며 말을 꺼냈다.

한편 이번 공습으로 부모와 딸 흐닌 유 와이(3)를 잃은 농부 예 나잉은 사건이 있던 날 아침, 이 지역 축제 전통에 따라 나무껍질로 만든 물감을 딸의 얼굴에 바르는 걸 도왔다며 말을 꺼냈다.
마을 잔치를 즐기려던 아이들
흐닌 유 와이는 등교 전 잔치에 참석한 아이들 중 하나였다.
폭력 사태로 황폐해진 미얀마에선 이제 이러한 잔치가 귀해졌기에 현장엔 많은 아이들이 모여있었다.
파편에 맞아 부상당한 예 나잉은 폭탄이 아이들이 한창 먹고 있을 때 떨어졌다고 증언했다.
“내 딸은 밥 한 그릇도 채 다 먹지 못한 것 같다”는 예 나잉은 “우리 아기는 물 한 컵도 마시지 못했다”고 말했다.
예 나잉은 “그날은 세상의 종말, 아니 그보다 더 나쁜 날인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면서 “그러나 나는 두렵진 않다. 비인간적이고 야만적인 공격이었다. 저들이 무고한 시민들을 억압하고 살해하고 있는 한, 나는 다른 이들과 함께 맞서 싸울 것”이라고 말했다.
예 나잉은 딸은 친절하고 사려 깊던 아이로, 마을 사람들로부터 두루두루 사랑받던 존재였다고 말했다. 아버지가 고단한 하루를 마치고 귀가하면 어머니에게 아버지에게 드릴 간식과 물을 달라고 하던 딸이었다.
한편 파 지 기 지역에 사는 약 200여 가구 대부분이 그날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다. 마을 주민들에 따르면 추가 공격을 우려해 집을 버리고 잠적한 이들도 있다고 한다.
남아 있는 사람들은 이제 오토바이 엔진 소리에도 심장이 내려앉는다.
윈 조는 “우리는 가난한 농부일 뿐”이라면서 “우리가 살해당하는 걸 그냥 보고 있지 말아달라. 얼마나 많은 무고한 생명이 더 희생당해야 행동에 나설 거냐”고 반문했다.
또한 군정 지도자인 민 아웅 흘라잉 장군을 언급하며 “나는 절대 그를 용서하지 않을 것”이라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