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미 양국이 정상 차원의 첫 확장억제 합의문을 발표했다. 이름하여 ‘워싱턴 선언’. 핵심은 한층 실질적인 ‘한국형 확장억제’ 방안 마련이다. 북핵 위협 고도화에 맞서 한국에 대한 미국의 확장억제 공약을 구체화 및 제도화하고 이 과정에서 한국의 관여도를 높인다는 것이다.
이는 윤석열 정부 출범 이후 한미가 1년 가까이 협의해온 결과물로서, 무엇보다 한미동맹 70주년을 맞아 북핵 위협에 대응하는 두 나라 공조가 흔들림 없다는 정상 간 의지를 부각하는 의미가 크다.
선언문에는 핵협의그룹(NCG·Nuclear Consultative Group) 신설을 비롯해 전략핵잠수함(SSBN) 등 미국 전략자산의 정례적인 한반도 전개 확대, 핵 위기 상황에 대비한 도상 시뮬레이션 등 확장억제의 구체적인 작동 방식이 포함됐다.
신설되는 핵협의그룹은 1년에 4차례 정기 회의를 개최하며 회의 결과는 양국 대통령에게 보고될 예정이다. 미국의 한반도 관련 핵대응 의사결정 과정에 한국의 관여도를 늘리고 한미 간 지속적인 소통을 이어갈 수 있는 창구가 마련됐다는 평가다.
김태효 국가안보실 1차장은 이날 현지 브리핑에서 “한미 양국이 미국 핵 운용에 대한 정보 공유와 공동계획 메커니즘을 마련했다”며 “한국 국민이 사실상 미국과 핵을 공유하면서 지내는 것으로 느껴지게 될 것”이라고 부연했다.
‘최선의 공통분모를 찾았다’
윤 대통령은 이날 한미정상회담 후 공동 기자회견에서 “확장억제 강화와 그 실행 방안은 과거와 다른 것”이라며 “북핵에 대한 국민의 우려는 많이 해소될 것으로 보고 있다”고 밝혔다.
또 “미국이 핵 자산에 대한 정보와 기획, 그에 대한 대응 실행을 누구와 함께 공유하고 의논한 적이 없다”며 “새로운 확장억제 방안이고 그래서 더 강력하다”고 강조했다.
이와 관련해 김현욱 국립외교원 교수는 BBC에 “핵협의그룹의 실제 핵심은 핵 운용 및 결정에 대한 미국과의 공유”라고 설명했다. 윤 대통령의 언급대로 미국이 NATO(북대서양조약기구) 외에 그 어느 개별 국가와도 핵 운용 사안을 공유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미국은 현재 NATO와 핵기획그룹(NPG·Nuclear Planning Group)을 운용 중이며, NCG는 이를 참고한 것으로 보인다.
김 교수는 “한미가 동맹 차원에서 나토의 NPG와 같은 기능을 갖는 새로운 그룹을 만들었다는 것은 상당히 큰 의미가 있다”고 강조했다.
이어 “물론 한국이 자체 핵을 보유하는 게 제일 좋다. 왜냐하면 한국이 원할 때 핵을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기 때문”이라며 “하지만 현실적으로 바운더리 안에선 할 수 있는 것을 선택한 만큼, 최선의 방법을 고른 것”이라고 진단했다.
김형석 전 통일부 차관도 “한미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공통 부문을 찾아낸 것”이라고 평가했다. 미국이 한국의 자체 핵무장은 허용하지 않았지만, 북한의 무모한 핵 공격 자체가 가능하지 않다는 점을 한미 정상이 확실하게 알려주고 제시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는 얘기다.
그는 “미국 전략자산의 한반도 전개가 정례적으로 이뤄진다는 점에서, 이를 민감하게 받아들이는 북한에게 큰 메시지가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애초에 이번 정상회담이 한미 간의 주요 현안을 풀기 위한 목적이라기 보다 한미동맹 70주년을 기념하는 정치적 상징성이 훨씬 큰 회담이었다는 평가도 나온다.
박원곤 이화여대 북한학과 교수는 “주어진 상황에서 나름 최선을 다한 결과”였다며 이같이 말했다. 제한된 상황 속 의제였음이 분명하고 그래서 NCG 신설의 경우 첫 단추는 제대로 꼈다는 것.
그는 “한국에 대한 확장 억제 의지를 바이든 대통령이 표명했고 또 명문화 됐으며 협의체까지 만들어졌다는 점에서 충분히 의미를 찾을 수 있다”면서 “더 중요한 것은 앞으로 이것을 어떻게 운영하느냐 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한국 스스로 ‘핵 족쇄’ 강화
북한의 대남 전술핵 위협이 노골화되는 가운데, 단순한 협의 확대가 한국 국민들의 불안감을 실질적으로 해소할 수 있을지 의문이라는 지적도 있다.
북핵 대응을 위해 한미 간 협의를 더욱 발전시키는 것은 반드시 필요하지만, 한계가 명확하다는 얘기다.
정성장 세종연구소 통일전략연구실장은 “가까운 미래에 북한의 제7차 핵실험이 예상되는 상황에서 한국이 국가생존을 위해 핵확산금지조약(NPT)을 탈퇴할 수 있는 권리마저 자발적으로 포기한 것은 매우 유감스럽다”며 이같이 밝혔다.
한국의 자제 핵 보유를 위해 넘어야 할 산이 많은 것이 현실이고 그렇기 때문에 당장은 일본과 같은 수준의 핵잠재력을 확보하는데 중점을 두고 안보환경의 악화를 고려해 미래의 핵무장 가능성도 열어두는 것이 필요한데, 이번 한미정상회담에서는 NPT 탈퇴 권리마저 공개적으로 포기함으로써 한국 스스로 ‘핵 족쇄’를 강화한 결과를 초래했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정 센터장은 또 이번 회담에서 “사용 후 핵연료의 재처리와 우라늄 농축 분야에서 한국도 일본과 같은 수준의 권한을 확보할 수 있도록 한미원자력협정 개정을 추진하는 데 합의하지 못한 것도 매우 실망스러운 부분”이라며 “미국과의 협상을 통해 한미원자력협정의 개정을 적극적으로 추진했어야 했지만, 과연 그런 노력조차 했는지 의문”이라고 말했다.
아울러 “미국이 호주에 한 것처럼 한국에 대해서도 원자력추진잠수함 확보와 관련한 협력을 요구할 필요가 있었지만, 이에 대해서는 진지한 논의가 이루어지지 않고 상대적으로 덜 시급한 우주 분야 협력에 대해서만 합의가 이루어진 것도 아쉬운 부분”이라고 털어놨다.
정 센터장은 “한국 정부가 핵 보유 권리를 공개적으로 포기하고 스스로 ‘핵 족쇄’를 강화한 결과를 초래한 것”이라며 “북한이 워싱턴선언의 내용에 대해 공개적으로는 비난하면서도 내부적으로는 반길 수도 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북한은 어떻게 받아들일까?
양국 대통령의 대북 메시지는 단호했다.
윤 대통령은 회담 후 공동 기자회견에서 “한미 양국은 북한의 핵 공격 시 즉각적인 정상 간 협의를 갖기로 했으며 이를 통해 미국의 핵무기를 포함해 동맹의 모든 전력을 사용한 신속하고 압도적이고 결정적인 대응을 취하기로 약속했다”고 밝혔다.
조 바이든 대통령 역시 “미국이나 동맹, 파트너에 대한 북한의 핵 공격은 받아들일 수 없다. 북한의 핵 공격 시 정권의 종말을 초래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선언에서도 “북한의 한국에 대한 모든 핵공격은 즉각적이고 압도적이며 결정적인 대응에 직면할 것”이라고 재확인했다.
이에 대해 김현욱 교수는 “핵 사용과 관련해 한국 측 의견이 미국에 반영될 수 있는 체제가 마련된 만큼, 북한 입장에선 김정은의 목을 겨누는 미국의 핵우산이 실제 가동될 수 있는 가능성이 커진 상황을 우려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박원곤 교수 역시 북한의 반발을 예상했다. 북한은 기본적으로 한미 간의 확장 억제 신뢰도를 약화시키는 것이 목적이고, 유사시 미국이 한국을 지켜줄 수 없다는 식으로 남남 갈등의 틈을 파고들려 한다는 얘기다.
그는 “이번 워싱턴 선언은 미국의 확장억제에 대한 의구심을 없애기 위한 차원이기 때문에 북한 입장에서는 불편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그러면서 “바이든 대통령이 직접 ‘핵 도발은 북한 정권의 종말’이라고 언급한 것도 단순한 공갈협박이나 ‘벼랑끝 전술’이 아닌 만큼 북한의 도발을 억제하는 데 효과적일 것”이라고 내다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