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 위 작은 섬 해안가

LINDLE MARKWELL/BBC
미-중 긴장의 최전선에 놓이게 된 필리핀의 외딴섬들

역대 최대 규모로 진행 중인 미국과 필리핀의 합동 군사 훈련이 막바지에 접어들고 있다.

이번 군사 훈련이 시작되기 며칠 전 중국은 대만 섬을 봉쇄하는 형태로 군사 훈련을 펼쳤으며, 이에 대해 미국 측은 비난했다.

태평양 지역을 두고 미국과 중국 간 긴장이 고조되는 가운데 두 강대국 사이에 낀 자신들의 삶의 터전을 걱정하는 이들이 있다. 태평양의 작은 섬 주민들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중간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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잇바얏 섬에서의 삶은 연약하기 그지없다.

대만과 필리핀 루손섬 사이 루손 해협에 자리한 이 섬은 가파른 석회암 절벽과 언덕으로 이뤄진 작은 섬이다.

가장 좋아하는 날치를 낚고자 바다에 나간 주민들의 작은 어선은 날씨가 좋은 날에도 푸른 바다의 강한 파도에 어지러이 흔들리곤 한다.

약 3000명 정도 되는 원주민, 어부, 농부들은 지진, 태풍, 가뭄 등을 겪으며 이곳에서 살아남았다.

그러나 이제 이들은 전혀 다른 종류의 위협에 직면했다.

동쪽의 태평양과 서쪽의 남중국해를 연결하는 군사적 요충지이기도 한 루손 해협에선 미국과 중국 군대가 서로 점점 더 가까워지고 있다. 남중국해에서의 우위를 점하기 위해서다.

이러한 상황에서 이 작은 잇바얏 섬은 양국의 갈등에 휘말릴 위험에 처했다.

갈등의 핵심엔 대만이 있다. 현재 미국의 대만 방어 의지가 커지는 듯한 상황에 자국 영토의 일부라는 중국의 목소리도 더 커지고 있다.

그리고 외부 세계와 동떨어진 듯한, 필리핀 바탄 제도를 구성하는 잇바얏 섬과 바스코섬은 이 갈등에 휘말릴 위기에 처했다.

잇바얏 섬은 대만 섬에서 불과 156km밖에 떨어져 있지 않다. 이러한 근접성 탓에 드넓은 바다에서 그저 작은 점처럼 보이는 이 작은 섬들은 한쪽에선 전략적인 동맹 지역이자 한쪽에선 적의 취약점이 됐다.

전문가들이 두 초강대국 간 긴장이 고조되고 있다고 말하는 현재, 두 국가가 충돌할 수도 있는 화약고에 산다는 건 어떤 느낌일까.

필리핀 북부 바탄 제도를 이루는 잇바얏 섬과 바스코 섬 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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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핀 북부 바탄 제도를 이루는 잇바얏 섬과 바스코 섬

종종 몇주 간 외부와의 교류가 끊길 수 있는 잇바얏 섬은 쉽게 들어가지 못할 지역처럼 보인다.

절벽을 따라 작은 항구들이 자리하고 있으며, 배를 타기 위해선 바위 표면을 따라 깎아놓은 가파른 계단을 기어 내려가야 한다.

섬을 감싸고 흐르는 깊은 청록색의 바닷물은 너무나도 맑아 산호 사이를 노니는 작은 물고기를 맨눈으로 확인할 수 있다.

이렇듯 잇바얏 섬은 이곳에서 오랫동안 터전을 잡고 살아온 원주민을 제외한 인간의 손이 닿지 않은 듯한 느낌이다.

이곳 주민 중 집에 TV가 있는 이들은 거의 없다. 뚝뚝 끊기는 전화 신호보다는 가정에서 가정으로, 혹은 교회 신자들을 통한 네트워크가 이곳에선 더 믿을 만하다.

TV나 SNS가 없어도 이들은 자신들의 해안을 위협하는 미국과 중국 간 요동치는 관계에 대해 알고 있다. 그 어느 때보다도 이들 코앞에 닥친 위협이다.

누가 바다를 지배할 것인가?

바스코 섬에선 머리부터 발끝까지 위장한 채 조준기에 시선을 고정하고 웅크려 대기하는 이들을 만날 수 있었다. 훈련 중인 미 육군 제25 보병사단 소속 군인들이다.

미국과 필리핀의 사상 최대 규모 합동 훈련의 일부로, 이들은 잠재적인 침입으로부터 이 섬을 수호하는 작전을 연습 중이었다.

바다에 떠 있는 미 해군 원정이동기지선 ‘USS 미겔 키스’호가 이번 작전을 지휘하는 동안 수직이착륙기 ‘V-22 오스프리’가 섬 위를 맴돈다.

이 모습에 놀란 현지 주민들은 휴대전화를 들고 카메라에 이 모습을 담기 바쁘다.

이번 시뮬레이션 훈련에선 로켓 발사기를 수륙양용 상륙정으로 해변으로 이동시키는 과정도 포함됐다.

제25 보병사단을 이끄는 조지프 라이언 소장은 “이 지역에서 우리의 분쟁 발생 방지”라고 설명했다.

“우리는 중국과의 전쟁을 원하지 않습니다. 전쟁을 원하지도, 바라지도, 자극하지도 않습니다. (미국과) 중국과의 전쟁은 그 누구에게도 좋은 일이 아닙니다.”

하지만 라이언 소장 또한 양국이 서로 메시지를 보내고 있다는 점은 인정했다.

섬에 착륙한 군인들의 모습

COURTESY US MILITARY
미국과 필리핀은 수십 년 만에 최대 규모로 합동 군사 훈련을 실시하고 있다

“우리가 보내고자 하는 메시지는 바로 우리는 준비가 돼 있으며, 우리는 능력이 있고, 우리는 준비가 돼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곳에서 훌륭한 파트너십을 맺고 있습니다.”

전반적인 아시아 국가가 그렇듯, 양국은 확실히 점점 더 무장하고 있다.

중국의 올해 국방 예산은 사상 최고인 약 2240억달러(약 290조원)로, 여전히 아시아 국가에서 새로운 군사 장비 구비에 가장 많은 예산을 지출하는 국가로 꼽혔다.

이에 대응이라도 하듯 미국 또한 일본, 한국, 호주 등 역내 동맹국들과의 군사훈련을 더욱 강화하는 등 전력 과시에 열을 올리고 있다.

미국에 이러한 합동 군사 훈련은 단순히 빛나는 새 무기를 전시하는 기회가 아니라 동맹 관계를 강화하는 자리이다.

일례로 백악관은 중국에 맞서고자 견고한 동맹을 추구하는 가운데 그 어느 때보다도 아시아 지역에 특사를 자주 파견하고 있다. 그리고 지리적 요충지인 필리핀 또한 그 대상에 포함된다.

미국이 사용권을 확보한 필리핀의 군사 기지 9곳의 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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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이 사용권을 확보한 필리핀의 군사 기지 9곳의 위치(푸른색으로 표시된 곳이 올해 새롭게 사용권을 확보한 지역이다)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필리핀 대통령 또한 이번 주 워싱턴 방문에 앞서 한 지역 라디오 방송국과 진행한 인터뷰에서 “상황이 고조되고 있다”고 인정했다.

필리핀 해군과 해안경비대에 순찰 횟수 증가를 지시하는 등 마르코스 대통령은 전임자보다 중국을 향해 더 적극적인 행동을 취하고 있다.

최전선의 어부들

하지만 지구상 다른 지역에선 대체로 별일 없이 끝날 이러한 순찰은 남중국해에서만큼은 분쟁으로 치달을 가능성이 있는 일이다. 사실 어업조차 지정학적 위기를 일으킬 수 있는 곳이 바로 이곳 남중국해다.

과거 남중국해에서 중국이 영유권을 주장하는 근거로 제시한 ‘구단선’을 인정할 수 없다는 국제 재판소의 판결에도 불구하고 중국 정부는 아직도 남중국해 거의 전체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한다.

남중국해는 연간 수조 달러 규모의 해상 무역이 이뤄질 정도로 전략적으로 가치가 있는 해역이다.

잇바얏 섬의 어부인 사이러스 말루파(59)는 금속 고리가 달린 낚싯줄을 바다에 던지며 “중국 어부들이 우릴 괴롭히곤 했다”고 말했다.

“우리가 이를 (필리핀) 정부에 보고하자, 이곳에서 북쪽으로 떨어진 마부리스 섬에 군사 기지를 세웠다”는 말루파는 “이제 필리핀 해병대가 그곳에서 근무 중”이라고 덧붙였다.

지난 3월 필리핀 해군은 무인도인 마부리스 섬을 조국의 “첫 방어선”이라고 부르며 가장 높은 곳에 필리핀 국기를 꽂는 한편 1달간 임무를 수행했다. 작지만 대담한 주권 행사다.

시장에서 판매할 참치를 잡고자 며칠간 바다에 나와 작은 배에서 생활하는 말루파나 다른 어부들에게 이러한 지정학적 분쟁은 개인적인 문제이기도 하다. 가족의 생계가 달려있기 때문이다.

필리핀 어부 수백 명이 남중국해 남부 해상의 스프래틀리 군도 근처 분쟁 해역 등 전통적으로 이용하던 남중국해의 어장에서 지난 10년간 밀려난 경험이 있다고 말한다.

흰 파도 위에서 흔들리는 작은 배에서 물고기를 잡던 말루파는 “밀렵꾼들은 우리보다 더 발전된 기술을 가지고 있다”면서 “그래서 그렇게 많이 잡지 못한다”고 설명했다.

“우리 같은 현지 주민들은 낚싯줄이나 작은 그물과 같은 오래된 낚시 방법을 사용합니다. 하지만 밀렵꾼들은 더 발전된 기술로 물고기를 더 많이 잡습니다.”

세 어부의 모습

LINDLE MARKWELL/BBC
잇바얏 섬의 어부들. 안토니오 빌라, 다니엘 드 거즈만, 사이러스 말루파(왼쪽에서 오른쪽으로)

필리핀 정부는 남중국해를 둘러싸고 지금껏 중국에 거의 200건에 달하는 외교적 항의를 제기했다.

남중국해에선 그 외에도 베트남, 말레이시아, 대만, 브루나이의 영유권 주장이 겹친다.

한편 빅터 곤잘레스(51)는 “(이곳에서 일어나는) 그 어떤 갈등도 우리 삶에 영향을 미칠 것이기에 걱정되는 게 당연하다”고 말했다.

“우선 우리의 목숨이 걱정되고, 또 자원이 부족한 이곳에 대만에서 사람들이 몰려들지 않을까 걱정됩니다.”

잇바얏 섬의 주민 대부분이 그렇듯 곤잘레스 또한 바다가 거친 날이면 농사를 짓고, 날씨가 좋으면 바다로 향한다.

기계나 비료 없이 손으로 농사를 짓는 이들은 고구마, 쌀, 옥수수, 마늘, 양파를 돌아가며 심는다. 농장 1곳에서 나오는 수확물로 25명을 먹여 살리기도 한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삶의 방식이며, 우리는 대안도 없기에 (이 섬의) 자원을 보호해야 한다”는 곤잘레스는 “우리도 다음 세대에 무언가 물려주고 싶다”고 말했다.

바탄 제도 현지 관료들이 작년 12월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분쟁 상황에 대비해 식량을 확보해두겠다고 발표할 정도로 이들의 고민은 진지하고 또 깊다.

선택의 기로

필리핀에서 가장 큰 섬인 루손섬 북쪽 끝엔 산타 아나 마을이 있다.

이곳 남자들은 보통 바다에 나가 있지만, 그날은 일요일을 맞아 필리핀 진을 마시며 그늘에서 쉬고 있었다. 그 근처엔 얕은 여울에 웅크리고 앉아 휴식을 취하며 달려드는 새들을 꼬리로 쳐내는 물소 몇 마리도 보였다.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여자들은 주말을 맞아 함께 거대한 통에 빨랫감을 넣고 함께 빨래하고 있었다. 여자들 옆으로 하얀 거품 물이 넘쳐흘렀다.

이렇듯 산타 아나 지역은 너무나도 조용한 작은 마을이기에 그곳에 해군 기지가 있다는 것도 알아채기 쉽지 않다.

사실 이곳엔 ‘카밀로 오시아스 해군 기지’가 자리하고 있다. 그러나 해변 한 귀퉁이에 박혀 별다른 활동이 없는 듯한 기지의 존재를 눈치채기란 쉽지 않다. 기지 주변에 설치된, 손으로 칠한 접근 제한 표지판 또한 모래 해변을 따라 정박 중인 녹색 어선 수십 척에 가려 거의 눈에 띄지도 않는다.

그러나 이곳 기지엔 미군이 대만해협으로 나갈 수 있는 활주로가 있다.

산타 아나가 속한 카가얀 지역의 마누엘 맘바 주지사는 이 군사 기지에 대해 “기지라기보단 보이스카우트 캠프에 더 가깝다”고 말했다.

평화로운 섬 풍경

JOE PHUA/BBC
바스코 섬과 같이 외부 세계에서 멀리 떨어진, 태평양의 평화로운 섬들은 대만과의 근접성으로 인해 전략적 요충지로 떠올랐다

이곳은 필리핀이 미국과의 군사동맹을 강화하며 미군에 접근권을 내준 기지 4곳 중 하나다. 다른 두 곳은 대만과 마주한 카가얀 북부 지역에 있다.

맘바 주지사는 “이는 나나 우리 국민의 선택이 아니”라면서 “이는 우리 국가 지도자들의 선택이다. (그리고) 우리는 이를 따를 것이다. 이에 동의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사실 우리 모두 전쟁을 원치 않는다”고 말했다.

“카가얀 지역은 가난하고 우리만의 문제도 있습니다. 그렇기에 상황을 불확실하게 만드는 그 어떠한 원인도 우리에겐 더 큰 문제가 될 것입니다.”

맘바 주지사는 카가얀 지역에 있는 미군 기지 2곳이 장차 목표가 되는 건 아닐지 걱정된다고 했다.

맘바 주지사는 과거 중국인 관광객들을 이곳으로 끌어들이거나, 새로운 국제 공항이 건설되길 바랐다고 한다.

그러나 이제 그 어느 때보다도 필요한 시기에 중국 정부가 필리핀을 외면할 수도 있다며 우려했다.

“(미국과 중국 중) 하나를 선택하기란 어렵습니다. (중국은) 한 번도 적이 된 적 없는 이웃국이며, (미국은) 과거 많은 어려운 상황에서 우릴 지지해준 동맹국입니다.”

“만약 이들이 함께할 수 있다면, 아니 이 두 국가가 서로 대화하기를, 서로 합의할 수 있는 중간 지점이 있길 바랄 뿐입니다.”

맘바 주지사의 이러한 우려는 아시아 일부 지역에서 퍼지고 있는 불안감을 반영하고 있다.

이들 국가는 오랜 동맹국인 미국과 최대 무역 파트너인 중국 사이에서 하나를 선택하도록 강요받게 될까.

한편 바스코 섬에선 잇바얏 섬을 오가는 여행자들의 비행기 탑승을 돕는 아베 마리 가르시아(21)라는 여성을 만날 수 있었다.

잇바얏 섬이 고향이라는 가르시아는 늘 뉴스를 보는 편은 아니지만, 최근 진행 중인 군사 훈련에 대해선 주의를 기울일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아베 마리 가르시아

LINDLE MARKWELL/BBC
잇바얏 섬 출신인 아베 마리 가르시아는 미국과 필리핀 간 동맹 강화로 인해 자신의 고향이 변하지 않길 바란다고 했다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경치와 해변을 보여준다며 스쿠터에 올라탄 가르시아는 “미국이 이러한 군사 훈련으로 전쟁을 일으킬 것 같지는 않다”면서 “다만 미국은 필리핀 군대가 이 섬을 보호할 수 있도록 돕고, 또 중국에 이 지역은 보호받는다는 메시지를 전하려는 것 같다”고 말했다.

가르시아는 형제자매가 무려 10명이다. 그리고 많은 필리핀인이 그렇듯, 가르시아의 어머니 또한 해외에서 일하며 가족들에게 돈을 부친다.

이들 조상이 살던, 수 세기 동안 이어져 오던 석조 오두막은 지난 2019년 지진으로 폐허가 됐다. 이곳에서의 삶이 얼마나 연약한지 잘 보여주는 풍경이다.

형제들과 함께 엄격한 할머니 밑에서 자란 가르시아지만 머리카락 끝을 밝은 금발로 염색했다. 가르시아만의 작은 반항이다.

그러나 이런 가르시아도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자신은 잇바얏인이라고 했다. 가르시아는 그저 조상들이 지켜온 삶의 방식을 보존하고 싶다고 했다.

그러면서 만약 그래야 한다면 미국을 향해 안된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고 했다. 미국과의 관계에서도 선이 있어야 한다는 게 가르시아의 생각이다.

“우리 미래가 걱정됩니다. 이곳에 미군을 위한 구조물이 지어지지 않길 바랍니다. 이 섬이 지금 그대로의 모습을 유지하길 바랍니다. 이곳에 방문하는 건 되지만 우리를 침략할 수도 있는 무언가를 짓는다는 건 무서운 일입니다.”

이곳 사람들은 국제 정치와 각국의 서로를 향한 호전적인 메시지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다고 느끼며, 무엇이든 지나치게 연연하지 않고 현재 가진 것을 즐기고자 노력하고 있었다.

“섬에서의 삶은 단순하다”는 가르시아는 매일 자신과 가족은 이 단순한 삶이 계속 유지되길 기도한다며 마무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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