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atch: Springer asked if he was ashamed about his show

시끌벅적한 토크쇼로 유명한 토크쇼 진행자 제리 스프링거가 향년 79세로 세상을 떠났다.

1991년부터 30년 가까이 진행된 ‘제리 스프링거 쇼’는 주먹다짐, 날아다니는 의자, 미국 사회의 변두리 등을 전 세계 시청자에게 소개했다.

스프링거 측 대변인은 BBC에 스프링거가 27일(현지시간) 시카고의 자택에서 평화롭게 세상을 떠났다고 밝혔다.

스프링거의 친구이자 가족 측 대변인인 진 갤빈은 스프링거를 “대체 불가능”한 사람이라고 묘사했다.

갤빈은 “사람들과 소통하는 제리의 능력은 정치, 방송, 길거리에서 (제리와) 사진 촬영이나 말 한마디를 나누길 원했던 사람들에게 던진 농담까지, 그가 시도한 모든 일에서 성공의 핵심이었다”고 말했다.

또한, “제리는 대체 불가능한 사람이고 제리가 떠나 너무나도 슬프지만, 그의 지성과 따뜻한 마음, 유머에 대한 기억은 계속 살아있을 것”이라고 전했다.

스프링거의 토크쇼는 5000회 가까이 방영되는 동안 난장판 대결, 욕설, 불륜 폭로 등 저속한 텔레비전 방송의 상징이 됐다.

동료 토크쇼 진행자 리키 레이크가 소셜미디어에 추모 글을 올린 뒤 애도가 이어졌다.

“오랜 토크쇼 라이벌이자 친구였던 제리 스프링거가 세상을 떠났다는 매우 슬픈 소식을 들었습니다. 사랑스러운 사람이었죠.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방송인 피어스 모건은 스프링거를 “TV의 아이콘이자 지적이고 따뜻하며 재미있는 사람”이라고 묘사했다.

또한, “AGT[아메리카 갓 탤런트]에서 함께 일해서 즐거웠고, 그와 어울리는 시간을 사랑했고(우리는 2년 동안 같은 호텔에서 살았다), 그와의 논쟁을 좋아했고(그는 본인의 정치적 견해를 좋아했다), 그의 모든 것을 사랑했다”고 덧붙였다.

스프링거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1944년 런던의 하이게이트 지하철역에서 태어났다.

부모님은 현재 폴란드에 속하는 당시 독일 지역에서 피난 온 유대인 난민이었고, 독일의 폭격을 피해 지하철역으로 대피한 상태였다.

스프링거는 4살 무렵 부모, 누나와 함께 뉴욕 퀸즈로 왔다.

대학에서 정치학과 법학을 전공했고 정계에 뛰어들어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로버트 F 케네디에게 자문을 제공했고 1977~1978년 신시내티 시장을 지냈지만, 오하이오 주지사 선거에서 낙선한 뒤 뉴스 보도 방송인으로 전향했다. 지역 방송국의 기자로 시작해 앵커가 됐다.

1991년 출범한 ‘제리 스프링거 쇼’는 시작 당시 온화한 분위기였다. 사회 문제와 미국 정치에 초점을 맞추는 평범한 토크쇼였다.

하지만 몇 년 후 스프링거는 시청률을 높이기 위해 외설적이고 터무니없는 콘텐츠에 초점을 맞추며 극적인 변화를 꾀했다.

스프링거는 방송이 너무 저속하다는 비난 앞에서 자신의 쇼를 거듭 옹호했다.

그는 2014년 BBC와의 인터뷰에서 “물론 ‘여왕의 영어’를 구사하는 멀끔한 부유층 사람들만 방송에 출연시킬 수도 있지만, 그런 방송은 사회 전체를 반영하지 못한다”며 “모든 쇼가 내 방송 같다면 그건 문제겠지만 ‘프렌즈’, ‘사인필드’처럼 부유하고 잘생긴 사람들만 나와도 안 된다”고 덧붙였다.

“부유한 유명인이 방송에 나와서 누구와 잤는지 이야기하면 사람들은 좋아하면서 더 말하길 기대합니다. 하지만 저소득층이 같은 얘길 하면 갑자기 쓰레기라고 하죠.”

제리 스프링거 쇼에 출연한 대부분의 초대 손님은 가족 문제를 이야기하고 간통이나 기타 범죄를 폭로했다.

스프링거가 중재를 시도하지만 결국 주먹다짐으로 끝나는 경우가 많았고, 초대 손님이 보안 요원에게 제지당하는 경우도 있었다.

관객들은 방송 중에 긴장이 고조되면 “제리! 제리!”를 연신 외쳤다.

스프링거는 자신의 트위터 프로필에서 스스로를 “토크쇼 진행자, 문명세계 종말의 무대 감독”이라고 농담 삼아 표현하기도 했다.

스프링거는 본인의 방송을 “도피성 유희”라고 불렀지만, 다른 사람들은 이 방송이 텔레비전의 멍청함과 사회 가치관 퇴보에 기여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종종 자신이 만난 사람들에게 “당신이 내 쇼에 나올 일이 없길 바란다”는 농담을 던졌다.

스프링거는 자신의 트위터 프로필에서 스스로를

Getty Images
스프링거는 자신의 트위터 프로필에서 스스로를 “토크쇼 진행자, 문명세계 종말의 무대 감독”이라고 농담 삼아 표현하기도 했다

스프링거는 자신의 트위터 프로필에서 스스로를 “토크쇼 진행자, 문명세계 종말의 무대 감독”이라고 농담 삼아 표현하기도 했다

1990년대 후반에는 ‘오프라’를 제치고 미국 주간 텔레비전 시청률 1위를 차지했지만, 이후 시청률이 하락해 2018년 종영했다.

2003년에는 이 막장 방송을 원작으로 한 뮤지컬이 만들어졌다. ‘제리 스프링거: 오페라’라는 이름의 뮤지컬은 2003년 4월부터 2005년 2월까지 런던에서 609회 공연한 후 2006년 영국 순회공연을 진행했다.

해당 뮤지컬은 최고의 신작 뮤지컬상을 비롯해 4개의 ‘올리비에’ 상을 수상했다. 2005년 1월 영국 ‘비비씨 투'(BBC Two) 채널은 이 뮤지컬을 송출해 신성 모독이라는 비난과 종교 운동가들의 항의를 받았다.

이후 5만5000건의 불만이 접수됐으나 방송 감독기관 ‘오프컴'(Ofcom)은 가이드라인 위반 사항이 없다고 밝혔다.

스프링거는 2007년부터 2008년까지 유명 오디션 프로그램 ‘아메리카 갓 탤런트’를 진행했고 최근에는 법정 쇼 ‘제리 저지’를 진행하기도 했다.

2009년 6월, 스프링거는 런던 케임브리지 극장에 올라온 ‘시카고’에서 빌리 플린 역으로 무대에 데뷔했다.

또한 BBC의 ‘당신은 누구입니까’ 프로그램에 출연해 홀로코스트를 겪은 그의 가족을 거슬러 올라가 현재 폴란드에 속하는 작은 마을 노이스테틴을 방문했다.

스프링거는 최근 미국판 '복면가왕'에 딱정벌레 역으로 출연했다

FOX
스프링거는 최근 미국판 ‘복면가왕’에 딱정벌레 역으로 출연했다

지난 10월에는 미국판 ‘복면가왕’에 나왔는데, 이것이 생전 마지막으로 출연한 방송이었다.

12월에는 8년 만에 ‘제리 스프링거 팟캐스트’에서 물러났다.

정치 평론가 데이비드 액설로드는 트위터에서 “제리 스프링거는 황당한 타블로이드 스타일 방송의 무대 감독으로 기억될 것”이라고 적은 뒤 “하지만 나는 그를 더 일찍 만났다. 내가 오하이오 주지사 선거를 취재할 당시 그는 (신시내티) 시장이자 반항적인 진보 성향 후보였다. 그는 유쾌하고, 겸손하고, 예리했다”라고 적었다.

유튜버 KSI는 이렇게 말했다. ”제리 스프링거의 명복을 빕니다. 제가 학교를 쉬던 날을 훨씬 더 재미있게 만들어 주셨어요.”

방송 진행자 매튜 라이트는 “매 순간을 사랑했던 제리 스프링거와 함께 ‘제리 스프링거: 오페라’를 보러 갔던 일”을 회상하며 “[채널5 토크쇼] ‘더 라이트 스터프’에서 멋지게 활약한 최고의 친구, 편히 쉬길 바랍니다.”

스프링거의 유족은 애도의 꽃을 보내는 대신 도움이 필요한 사람, 가치 있는 옹호단체에 기부나 도움을 베풀길 요청하면서 스프링거가 토크쇼를 마무리하며 전했던 “잘 지내시고 서로를 소중히 하세요”라는 인사말을 기억해 주길 바랐다.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1
0
+1
0
+1
0
+1
0
+1
0

랭킹 뉴스

실시간 급상승 뉴스 베스트 클릭

금주 BEST 인기글

LEAVE A REPLY

Please enter your comment!
Please enter your name he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