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가 오는 7~8일 한국을 방문해 윤석열 대통령과 만난다. 지난 3월 도쿄 한일정상회담 이후 두 달 만이다. 그의 조기 방한 배경 중 하나가 미국의 의향이라는 진단이 나온 가운데, 이같은 한일·한미일 공조 강화가 동북아 정세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에도 관심이 쏠린다.
미국을 중심으로 한미일이 밀착되는 모습을 보이면서 우려했던 대로 중국 내에서는 윤 대통령의 방미 기간 내내 한국을 견제하는 발언이 잇달아 쏟아졌다. 향후 한중 관계가 일단 외교적으로 냉각기를 보내게 될 것이라는 전망도 이어진다. 일각에서는 한미일이 똘똘 뭉치게 된 것 자체가 결국 북한의 핵 개발 덕분이라는 지적도 나왔다.
이와 관련해 박진 한국 외교부 장관은 지난 1일 “윤 대통령의 국빈 방미는 어느 특정 나라를 겨냥하거나 소회시키기 위해 한 것이 아니다”라고 밝혔다.
그는 “새로운 한미 동맹의 발전과 그 청사진을 보여주기 위해서 한미 정상이 대화한 데 대해 중국이 너무 과잉 대응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며 이같이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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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일본 언론들은 지난달 30일 기시다 총리의 조기 방한을 일제히 보도하며 “그가 지난 3월 윤 대통령의 방일 이후 시간을 두지 않고 조기 방한하는 것은 한일관계 개선에 적극적인 윤 대통령의 자세에 부응해 관계 개선을 가속하려는 것”이라고 평가했다.
그러면서 “조기 방한 배경에는 동맹국인 미국이 중시하는 한일 결속을 과시하려는 의도가 있다”며 “미국의 의향도 방한의 큰 요인”이라고 진단했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지난달 26일(현지시간) 미국 워싱턴DC에서 열린 윤 대통령과 한미 정상회담 당시 한미일 협력을 강조한 바 있다.
윤 대통령 ‘한미일 관계는 선순환 구조’
윤 대통령은 2일 기시다 총리의 방한에 대해 “셔틀외교의 물꼬를 트는 시작”이라며 “이번 한일정상회담에서 좋은 결과가 있도록 하겠다” 밝혔다. 이를 계기로 한일관계를 더욱 지속해서 발전적으로 이끌어나가야 한다는 얘기다.
한미일 관계에 대해서는 “한일관계 물꼬가 트이고 한미관계가 다시 그 물꼬를 트고, 또 한미관계가 다시 한일관계에 영향을 주면서 한미일 관계가 선순환 구조로 돌아섰다”면서 “지금 한일-한미관계가 복원되는 것을 기초로 해서 한미일 관계가 더욱 공고하고 발전된 관계로 나아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윤 대통령은 이날 국빈 방미 성과를 소개하기도 했다. 특히 “바이든 대통령과의 정상회담 결과와 성과는 하나의 시작일 뿐”이라며 “영역은 계속 확장되고 양국 국민들의 기회는 더 커질 것”이라고 밝혔다.
또 “한국이 전쟁의 참혹한 상처와 폐허를 극복하고 오늘의 번영을 일구며 세계의 중심으로 우뚝 서기까지 미국은 우리를 많이 도왔다”며 “세계 최강 국가와 70년 동안 동맹을 맺어왔다는 것은 남다른 의미를 갖고 있다”고 강조했다.
윤 대통령은 이어 “한미동맹 70년 역사는 그냥 주어진 게 아니다. 국가 관계에 있어서 고마운 것이 있으면 고맙다고 이야기할 줄 알아야 한다”고 말했다.
아울러 “우리 국민이 열심히 일하고 미국이 우리 경제 성장에 강력한 동맹으로 지원해준,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우리 역사를 자랑스럽게 생각해야 한다”면서 “한미 동맹은 단순한 편의적 계약 관계가 아닌, 자유민주주의라는 보편 가치에 기반한 가치 동맹”이라고 부연했다.
이날 국무회의 모두 발언은 TV로 생중계됐다.
북한 ‘한국, 끈 떨어진 갓이 되길 바랐는데…’
이렇듯 한미일 3국이 밀착을 강화하는 가운데 이를 바라보는 북한의 심경은 매우 복잡할 것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최경희 샌드연구소 대표는 BBC에 “한미일이 결합하고 동맹이 강화될 때 북한은 늘 불편했었다”며 이같이 말했다.
과거 김일성 정권 당시 한국을 바라보기를 “남한이 갓을 하나 쓰고 있는데 한쪽 끈은 미국(안보), 다른 한쪽 끈은 일본(경제)이다. 한쪽 끈이라도 끊어지면 한국이 쓰고 있는 저 멋있는 갓은 날아가 버릴 것”이라고 혹평을 했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최 대표는 또 “북한 입장에선 한국의 경제가 급속도로 발전한 것도 속이 쓰린데, 갓이 끊어지기는 커녕 양쪽 끈이 더욱 튼튼하게 매듭이 지어지는 것을 두려워 할 수밖에 없다”고 진단했다.
과거 냉전 시대와는 달리 현재 여러모로 한국의 위상이 높아진 상태에서 한미일 동맹이 강화되고 있고 한일관계 역시 수직이 아닌 협치 방식으로 이뤄지고 있기 때문에 핵의 가치만을 극대화하면서 달려온 북한 입장에서는 심기가 불편할 것이라고 부연했다.
아울러 한미일 공조가 강화돼 핵우산과 최첨단 기술, 자금 등이 결합되면 북한 핵 미사일의 가치는 낮아질 수밖에 없다고 최 대표는 덧붙였다.
실제로 북한은 한미정상회담 이후로 연일 한국에 대한 적개심을 드러내는 모양새다. 이례적으로 한미 정상을 겨냥한 허수아비 화형식까지 진행했다.
북한 관영 조선중앙통신은 3일 ‘워싱턴 선언’을 비난하는 청년학생 집회 소식을 전하며 “불을 즐기는 자들이 갈곳은 제가 지른 불속”이라고 비난했다. 또 “미국의 늙다리 전쟁괴수와 특등하수인인 괴뢰역도의 추악한 몰골들이 재가루로 화할수록 징벌의 열기는 더더욱 가열되였다”고 주장했다.
특히 윤 대통령의 미국 국빈 방문을 “가장 적대적이고 침략적이며 굴욕적인 대미굴종행각, 핵전쟁행각”으로 규정하고 “상전과 특등주구가 고안해낸 모략문서들은 철두철미 우리에 대한 적대감이 골수에까지 들어찬 자들의 범죄적인 야망의 산물”이라고 보도했다.
북한이 그간 한미연합훈련 등을 계기로 각계각층의 대미·대남 적대감을 공개하며 한미를 비난하기는 했지만, 한미 정상을 겨냥한 화형식까지 진행한 것은 전례가 없다. 그만큼 확장억제 강화 방안이 담긴 한미 정상의 ‘워싱턴 선언’에 대한 극도의 불만을 드러낸 것으로 보인다.
지난달 29일에는 김여정 노동당 부부장이 ‘워싱턴 선언’ 채택에 반발해 바이든 대통령을 “미래가 없는 늙은이”, 윤 대통령을 “그 못난 인간”이라고 맹비난한 바 있다.
북중러 ‘반미’ 외에 결속력 없어
윤 대통령의 국빈 방미를 계기로 한국 정부가 강조해온 가치동맹의 색채는 더욱 짙어진 반면 한중-한러 관계는 자욱한 안갯속으로 빠져들고 있다는 지적이 이어진다.
윤 대통령이 한미관계 뿐 아니라 우크라이나 전쟁, 대문 문제 등 글로벌 이슈에 있어서도 미국과 함께 할 것임을 분명히 한 만큼, 미국과 패권 경쟁을 벌이고 있는 중국은 물론 우크라이나와 전쟁 중인 러시아 역시 심기가 불편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문가들은 동북아 정세가 ‘ 한미일 대 북중러’ 라는 신냉전 혹은 진영 간의 대결 구도로 심화되지는 않을 것이라는 데 동의했다.
박원곤 이화여대 북한학과 교수는 “신냉전이 되려면 진영 간 결속이 확실해야 하는 것은 물론 이데올로기로 뭉쳐야 한다. 결정적으로 탈 동조화가 다 돼야 하지만 지금은 그 조건들이 모두 맞지 않다”며 이같이 평가했다.
과거 냉전 당시 미국과 소련을 필두로 한 양쪽 진영 간에 경제적 교류도 거의 없었지만, 현 상황에서는 아무리 미중 갈등이 심해도 교류가 완전히 사라질 수는 없다는 설명이다.
박 교수는 “이데올로기가 있어도 그 안에서 모두가 자국의 이익을 쫓아가는 상황이기 때문에 진영간 결속력이 과거에 비해 그리 크지 않다”고 진단했다.
또 “북중러 3국이 미국을 적대시한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긴 하지만 이해관계가 다 다르다”면서 “특히 중러가 서로를 신뢰하고 가치를 공유하는 게 아니기 때문에 현재의 협력은 미국을 적대시한다는 공통분모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라고 말했다.
박 교수는 “큰 틀에서 한미일 동맹 강화의 동력은 사실상 북한에서 나오는 것”이라며 “북한이 핵미사일을 시험발사하지 않았다면 어려웠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아울러 “회복이 불가능할 것이라 여겨졌던 한일 관계가 복원된 것 역시 결국 북한 핵 개발 때문이고 한미일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진 것 역시 북한이 그걸 명분으로 줬기에 가능한 것”이라고 박 교수는 덧붙였다.
러시아 전문가인 이태림 국립외교원 교수 역시 이같은 입장에 동의했다. 러시아 내 여론을 살펴보면 미국을 필두로 하는 반러 진영을 한국이 따라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고, 그래도 한국이 끝까지 신중한 입장을 보이고 있다고 이해하는 부분이 있다는 것이다.
그는 “러시아가 진짜 중국과 한편에서 진영화를 해야 한다면 러시아에 더 불리한 부분이 많다”며 “유럽과 관계가 불편해진 현재 외교적 지평을 넓혀야 하는 러시아 입장에서 한국, 일본과도 등을 돌린다면 입지가 더 좁아질 수 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이어 “아시아에서 적이 많은 중국에 올인하는 것 자체가 자신들의 국제적 입지를 얼마나 위축시키는 것인지를 러시아는 너무나 잘 알고 있다”면서 “그렇기 때문에 한국, 일본과의 관계에서 뭔가 조금이라도 여지를 남기려 하는 것”이라고 부연했다.
이 교수는 “우크라이나에 대한 무기 공여가 공식화되는 것만 아니라면 한국을 대놓고 압박하거나 한국 기업에 불이익을 주는 등의 일은 최대한 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며 “실제 러시아가 지금도 한국과는 무비자 협정을 유지하고 있는데, 러시아가 이런 부분들을 먼저 끊어내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내다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