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19 상황으로 간호사들의 고된 업무 환경이 사회적으로 조명되며 동력을 얻었던 ‘간호법’ 제정이 결국 무산 수순을 밟고 있다.
윤석열 대통령은 16일 제20회 국무회의를 주재하며 지난달 말 국회를 통과한 간호법 제정안에 대해 대통령 재의 요구권, 즉 거부권을 행사했다.
이로써 간호법은 다시 국회에서 표결에 부쳐지게 됐지만, 법안 재의결 시 필요한 재적의원 과반수 출석 및 출석의원 3분의 2 이상 찬성 요건 충족은 어려운 상황이다. 간호법 제정안을 반대하며 대통령에 거부권 행사를 요구한 여당 국민의힘이 국회 300석 중 3분의 1인 100석을 상회하는 115석을 보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윤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는 지난달 초 양곡관리법 거부 이후 두 번째다.
윤 대통령은 국무회의에서 간호법 거부권 행사의 이유로 ▲간호 업무의 탈 의료기관화에 대한 우려 및 이로 인한 국민들의 건강 불안감 초래 ▲간호조무사, 의사 등 유관 직업군과 간호사 간 갈등을 포함한 사회적 갈등의 미해결 등을 꼽았다.
윤 대통령은 “이번 간호법안은 유관 직역 간 과도한 갈등을 불러일으키고 있다”며 “또 간호 업무의 탈 의료기관화는 국민들의 건강에 대한 불안감을 초래하고 있다”고 밝혔다.
수정 거듭한 간호법 내용은?
현재 간호사의 업무는 1951년 제정된 의료법에 의해 규정된다. 하지만 간호계는 기존 의료법이 한국 사회의 고령화 및 저출산으로 인한 인구구조 변화, 이로 인한 의료비와 사회적 돌봄 부담 증가 등의 문제를 해결하기에 부족하다는 입장이다.
특히 코로나19 사태로 간호사들의 열악한 근무환경이 조명을 받으면서 간호사의 처우 및 근무 여건을 명시한 간호법이 사회적 공감대를 얻었다.
하지만 국회에서 입안 과정이 본격 진행되면서 대한의사협회 등 의사 단체에서는 간호법이 ‘간호사 특혜법’이자 ‘의료인면허강탈법’이라며 정부와 여당에 강한 반대 압력을 가했다.
결국 여권이 간호법 제정 동참에서 물러서면서 간호법은 여야 간 쟁점 법안으로 떠올랐다.
지난달 말 국회에서 거대 야당 더불어민주당과 소수정당 정의당이 합세해 통과시킨 간호법에는 본래 여당 국민의힘 의원들도 공동 발의자로 참가했다.
국민의 힘 최연숙 의원과 같은 당 서정숙 의원, 또 더불어민주당 김민석 의원이 각각 발의한 관련 법안들의 내용을 병합 심사해 마련한 간호법에는 애초 여야 의원 총 93명(중복 제외)이 공동 발의자로 참여했다.
간호사의 역할과 업무 범위, 양성 계획 및 권익보장 등을 포괄적으로 다루는 간호법은 ▲1장 총칙 ▲2장 면허와 자격 ▲3장 간호사 등의 업무 ▲4장 간호사 및 간호조무사 단체 ▲5장 간호사 등의 권리 및 처우 개선 등 ▲6장 보칙으로 구성된다.
하지만 간호법 제정안 1장 1조에 들어간 ‘지역사회’라는 말을 두고 논란이 일었다.
간호법의 목적을 명시한 해당 조항에는 “모든 국민이 의료기관과 지역사회에서 수준 높은 간호 혜택을 받을 수 있도록 간호에 관하여 필요한 사항을 규정함”이라는 표현이 들어간다.
간호법에 반대하는 대한의사협회 등은 이에 따라 간호사의 업무 영역이 의료기관 밖으로 확대될 소지가 있다고 주장했다.
또 여야 의원들이 애초 발의한 법안 원문 10조에서 간호사의 업무를 ‘환자 진료에 필요한 업무’라고 규정했던 부분도 논란을 낳았다.
대한의사협회 등은 1조 및 10조에 따라 간호사가 의사의 지도 없이 단독으로 개원하게 되면 의료 현장에 혼란을 불러올 것이라고 주장했다.
심의 과정에서 1조의 ‘지역사회’ 표현은 유지됐지만 10조에서 논란이 된 대목은 기존 의료법과 똑같이 ‘「의료법」에 따른 의사, 치과의사, 한의사의 지도하에 시행하는 진료의 보조’로 수정됐다.
법에서 규정하는 주체만 의료기관을 개설할 수 있도록 한 의료법 33조에 간호사에 대한 규정이 빠진 점 등을 들어 보건복지부에서는 의료법 개정 없이 당장 간호사의 의료기관 개설이 불가하다고 보고 있다.
남은 쟁점
여러 논란 끝에 결국 윤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했지만 설사 간호법이 시행됐다고 하더라도 현장에 당장의 변화가 있었을지는 미지수다.
수정 간호법 제정안이 간호사의 업무 범위와 권리 및 책무 등을 규정하고 처우 개선을 위한 국가와 지자체의 지원을 명시하고는 있지만 모두 추상적인 데다, 구체적인 인력 기준 마련이나 실태조사 등을 할 수 있는 간호종합계획을 5년마다 수립한다는 기존 원안의 내용이 심의 과정에서 빠졌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의사 단체와 간호사 단체 사이 갈등 뿐 아니라 간호조무사 단체에서도 간호법이 간호조무사에게 부당하다며 문제를 제기했다.
간호조무사 단체에서는 간호법이 간호조무사의 자격 관련 대목에서 ‘특성화고의 간호 관련 학과를 졸업한 사람,’ ‘고등학교 졸업자로 간호조무사양성소 교육을 이수한 사람’ 등으로 규정하는 것이 간호조무사의 학력을 ‘고졸’로 제한하는 효과를 가져온다고 주장한다.
간호조무사 교육을 고등학교나 학원에서 받도록 해 대졸 이상 학력자들이 간호조무사로 지원할 수 있는 것과 별개로 학력 하한 효과가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간호조무사 학력 규정은 지난 2012년 한 전문대학에 간호조무과가 생긴 것을 계기로 논란이 됐을 때 특성화고와 학원 측 반발로 그대로 유지됐다.
한편 윤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할 경우 대한간호협회는 단체행동에 나서겠다고 예고했다.
대한간호협회는 지난 8일부터 14일까지 회원을 대상으로 진행되는 ‘간호법 관련 간호사 단체행동 설문조사’ 중간 집계 결과를 13일 발표했는데, 이에 따르면 12일 오후 8시 기준 7만 5239명의 설문 참가자 중 98.%인 7만4035명이 적극적 단체 행동이 ‘필요하다’는 의견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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