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현재 대만에선 여러 유명 인사에 대한 각종 성추행 및 성폭행 의혹이 제기되며 온 온 사회가 들썩이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미투’ 운동을 일으킨 도화선으로 지난 4월 말 공개된 대만의 넷플릭스 드라마 ‘인선지인: 웨이브 메이커스’를 손꼽는 이들이 많다.
지난 2주 동안 대만에서 미투 고발에 나선 이들만 해도 90명이 넘는다.
처음엔 정치권 및 집권 ‘민주진보당(민진당)’ 인사들에 대한 의혹이 집중적으로 터져 나오면서 몇몇 고위 관료들이 사임하기도 했다.
그러나 대만의 미투 물결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의료계, 교육계, 스포츠계는 물론 유튜브 등 사회 전반으로 퍼져나가고 있다.
심지어 지난 10일(현지시간)엔 폴란드 외교관이 대만 소재 싱크탱크 연구원이 제기한 성폭행 혐의로 기소되기도 했다.
대만은 국제 사회에서 진보적인 정치와 성평등에 대한 사회적 노력으로 널리 인정받는 사회이기에, 많은 대만 여성들에게 이러한 현상은 이미 한참 전에 일어났어야 했던 흐름이다.
대만의 첫 여성 지도자인 차이잉원 총통은 이번 사태에 대해 사과하며 개혁을 약속했다.
대만 ‘중앙연구원’ 소속 사회평론가인 류웬 박사는 BBC와의 인터뷰에서 “대만에서도 이전에 성희롱 관련 고발이 단발성으로 일어난 적은 있었으나, 이 정도 규모는 처음”이라고 설명했다.
“다양한 업계에서 여러 근본적인 문제가 동시다발적으로 제기되는 건 이번이 처음입니다.
한편 ‘촁’이라는 가명의 한 30대 여성은 BBC와의 인터뷰에서 유명한 환경 운동가인 상사로부터 과거 성추행을 당한 적 있다면서, 다시 정의 추구를 향한 힘을 얻었다고 밝혔다.
촁이 처음 이 일을 바로잡고자 나섰던 작년만 해도 거절과 냉담한 반응만 돌아왔다고 한다.
하지만 지난주 촁이 또 한 번 온라인에서 목소리를 내자 비로소 회사와 그 상사로부터 사과를 받아낼 수 있었다. 그 상사는 자신이 저지른 일부 행동에 대해 사과한다며 직장을 관두기까지 했다.
한편 이러한 사연이 알려지면서 촁에겐 자신 또한 그 상사로부터 피해를 당했다는 여성들의 메시지가 쇄도했다.
도화선이 된 넷플릭스 드라마
그리고 이러한 미투 운동을 촉발한 도화선으로 인정받는 드라마가 바로 넷플릭스 정치 드라마 ‘인선지인: 웨이브메이커스’이다.
선거를 앞두고 어느 후보자의 캠프에서 일하는 팀원들의 이야기를 담은 해당 드라마는 지난 4월 말 처음으로 공개됐다.
극 중 젊은 여성 보좌관은 자신의 멘토이기도 한 당내 여성 대변인과 단둘이 있게 된다. 이젠 대만 사회에서 상징적인 장면이 된 부분이다.
과연 이 순간 보좌관은 당의 위상과 자신의 커리어를 해칠 위협을 무릅쓰고서라도 당내 남성 동료에게 당한 성희롱 피해 사실을 털어놓을 수 있을까.
힘든 선택이었으나, 보좌관은 극 중 주인공이기도 한 대변인에게 사실을 말하기로 결심한다.
그리고 이 대변인 또한 부하 직원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그를 돕기로 한다.
두려워하는 보좌관을 향해 이 대변인은 “이 일이 그냥 지나가게 내버려 두지 말자, 알았지?”라고 말한다.
“이 사건이 그냥 이렇게 쉽게 넘어가게 둘 순 없어. 그렇지 않으면 우린 결국에 말라 죽을 테니까.”
바로 현재 대만을 휩쓰는 미투 운동의 도화선으로 평가받는 장면이다.
그리고 바로 다음 달인 5월 31일, 자신을 전 민진당 직원이라고 밝힌 쳰쳼주가 페이스북에 해당 장면이 떠올리는 글을 올리게 된다.
쳰은 “이 일이 그냥 지나가게 내버려 두지 말자”고 말을 꺼낸 뒤 민진당 행사에서 성희롱당한 경험을 폭로했다. 그러면서 당내 여성 관련 문제를 담당하는 여성 상사에게 이 사건을 보고했으나, “왜 아무 말도 안했냐”는 질문과 함께 결국 이 사건을 묻어버리라는 조언만 들었다고 덧붙였다.

잇따라 터져 나오는 의혹
쳰의 해당 게시물은 수천 번 공유되는 등 대만 전역을 뜨겁게 달궜다.
이는 정치권 및 다른 분야의 여러 성폭력 피해자들이 자신의 경험과 이에 대한 직장의 대응 등을 공개적으로 발언할 수 있도록 용기를 준 것으로 보인다.
첸의 이러한 폭로 이후 또 다른 여성도 자신을 전 민진당 직원이라고 밝히며, 남성 상사로부터 언어폭력을, 남성 동료들로부터 성희롱 피해를 당했다고 보고해도 귀 기울이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잇따라 의혹이 제기되면서 쳰의 폭로 속 여성 상사인 쉬치아톈을 포함해 한 사회 운동가가 제기한 성추행 혐의를 부인하고 있는 옌치파 대통령 고문 등 여러 민진당 고위 인사가 사임했다.
쉬와 옌 모두 이번 의혹에 대한 BBC의 질문에 응답하지 않고 있다.
한편 야당인 국민당도 의혹에 휩싸이긴 마찬가지다. 지난주 한 언론인은 푸쿤치 국민당 의원이 지난 2014년 언론 행사장에서 자신에게 강제로 입을 맞췄다고 폭로했다.
현재 해당 의혹을 전면 부인한 푸 의원은 BBC와의 인터뷰에서도 거듭 자신은 그런 적이 없다며, 여성 혹은 부하 직원들을 성희롱한 적이 없다고 강조했다.
또 다른 국민당 의원 또한 유명 언론인에 의해 성희롱 의혹이 제기된 상태다. 해당 의원은 자신의 행동에 사과하는 한편, 문제가 된 밤 당시 자신은 너무 술에 취해 기억이 없다고 주장했다.
크라우드소싱 온라인 데이터베이스에 올라온 비슷한 의혹은 무려 90건이 넘는다. 그중에서도 일부 이름이 잘 알려진 남성이 연루된 사건은 다음과 같다:
- ‘천안문 시위 지도자’ 왕단: 지난 1989년 중국 천안문 민주화 시위 당시 학생 지도자로 알려진 왕단은 현재 해외에서 정치 운동가로 활동 중으로, 리위언춘 등 젊은 남성 2명이 제기한 성폭행 혐의에 대해 부인하고 있다. 리는 지난 2014년 호텔 방에서 왕이 성폭행을 시도했다며 이번 달 7일 소송을 제기했다. 이에 왕은 교수직에서 사임하는 한편 이에 맞서고자 현재 머무는 미국에서 대만으로 돌아가겠다고 밝혔다.
- ‘중국 저항 시인’ 베이링: 지난 2일, ‘인선지인: 웨이브 메이커스’의 작가 중 한 명인 친리잉은 저명한 시인으로 중국에서 추방된 베이링에 성폭행 혐의를 제기했다. 친 작가는 베이가 자신을 집으로 부른 뒤 더듬고 입을 맞췄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베이는 이러한 의혹은 “날조”라면서 한달간 구애한 끝에 이뤄진 만남이었다고 강조했다.
- ‘폴란드 외교관’ 바로토소스 라이스: 지난 10일, 대만 소재 싱크탱크 연구원인 라이유펜은 폴란드 외교관 바르토소스 라이스로부터 지난해 성폭행을 당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검찰은 사건 조사 끝에 불기소 결정을 내렸다. 한편 라이스는 해당 혐의를 부인하면서, 혐의를 입증할 수 없기에 대만 검찰이 이 사건을 기각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BBC는 지난해 11월 이미 대만을 떠난 라이스와 직접 연락할 순 없었다. 주타이베이 폴란드 대표부 사무소는 이 사건과 관련해 지난해에도 대만 당국과 협력했으며, “라이스는 사건이 규명된 이후 대만을 떠났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폴란드 대표부는 “그 어떠한 형태의 괴롭힘에도 반대한다”고 덧붙였다.

대만 사회의 반응은?
대만은 당국이 전통적인 성 역할을 장려하고 여성들에게 더 많은 자녀를 갖도록 압박하는 중국과 대조적으로 자신들은 성평등을 추구한다는 점을 늘 자랑스럽게 여겼다.
일례로 대만은 거의 10년간 여성 총통이 이끌어 오고 있는 반면, 중국 정치계엔 고위 관료가 없다. 또한 대만 입법원의 여성 비율은 43%로, ‘국제 의회 연맹(IPU)’이 발표한 세계 평균인 29%보다 훨씬 높다.
한편 차이 총통은 이러한 당내 추문에 대해 2차례나 사과하며 신속히 대응하고 있다.
차이 총통은 지난주 성희롱 피해에 대해 공개적으로 목소리를 낸 이들은 문제를 일으키는 사람이 아닌 그저 피해자일 뿐이라고 강조하면서 목소리를 내줘서 감사하다고 전했다.
“우리 사회 전체가 다시 배우고 자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한편 이번 미투 물결이 일어난 시점은 대만 정치계에서도 중대한 시기이다. ‘인선지인: 웨이브메이커스’ 속 상황과 유사하게도 대만은 실제로 내년 1월 총통 선거를 앞두고 있다.
쳰이 페이스북을 통해 피해 사실을 밝힌 다음 날, 민진당 주석이자 오는 1월 선거 후보였던 라이칭더 부총통은 사과의 말을 전하면서 성폭력 신고 접수 시 당내 대응 방안에 대해서도 점검하겠다고 밝혔다.
라이 부총통은 넷플릭스 드라마 속 대사를 따라 하며 “이 일이 그냥 지나가게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라는 포부를 밝히며, 성추행 의혹에 대한 공식적인 조사를 약속했다. 아울러 성희롱 처벌법 강화 등의 개혁안도 제시했다.
한편 ‘인선지인: 웨이브 메이커스’ 작가진은 대중이 이렇듯 열렬히 반응하리라고는 전혀 생각하지도 못했다며 말을 꺼냈다.
이들은 BBC와의 인터뷰에서 “이번 드라마에선 부하가 당한 직장 내 괴롭힘에 대해 상사인 주인공이 정말 이상적인 방식으로 대처해준다. 이를 통해 현실에서 유사한 문제가 발생했을 때 어떻게 해결돼야 하는지 공감대가 형성되길 바란다”고 전했다.

한편 분명 지금 대만 사회는 성폭력 및 젠더 이슈에 제대로 대응하는 데 있어 중요한 시기를 맞았다는 의견이 많다.
그러나 이번 담론으로 고통스러운 경험을 다시 떠올려야 하는 생존자들에겐 힘든 시기이다. 사실 많은 피해자들이 지속적인 변화를 말하는 약속에 회의적인 반응이었다.
지난주 환경 운동가인 상사로부터 사과를 받은 촁은 이번 드라마가 사회적 담론의 장을 열어준 것에 감사하다면서도, 억압이 아닌 피해자에 대한 지지와 믿음을 바탕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극 중 설정은 여전히 현실과 동떨어진 환상에 가깝다고 설명했다.
“이 드라마를 보면서 강한 유대감을 느꼈던 건 사실이었다”는 촁은 “내 주변엔 정의를 위해 싸워주는 든든한 윗사람 같은 존재는 없었다”고 덧붙였다.
“이 드라마에서 여성 당 대표는 결국 피해자들에게 사과하면서 자신이 이들을 위한 정의를 실현할 때까지 기다려달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전 우리 대만 사회가 미투 운동을 완전히 받아들일 준비가 돼 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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