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센트 반 고흐의 세계에서는 자연계 모든 요소가 중요한 의미를 함축한다. 그에게 해바라기는 기쁨과 몰입을 상징했다. 별은 천국의 빛이었다. 그런데 사이프러스 나무는 어떻게 불굴의 용기를 상징하게 됐을까?
1889년 여름 빈센트 반 고흐는 생 레미에 있는 ‘생 폴 드 모졸 정신병원’에 자발적으로 입원했다. 의사들이 그의 신경쇠약을 치료하고 있었지만, 고흐에겐 스스로 찾은 한 가지 처방이 있었다. 자연과 교감하고 자신의 예술에 더 깊이 빠져드는 것. 그러면서 그는 주변 프로방스 시골에서 볼 수 있던 두드러진 특징, 즉 오랜 세월을 살아온 우람한 사이프러스 나무에 점점 더 집착하게 됐다.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서 진행중인 전시 ‘반 고흐의 사이프러스’는 예술가가 천착했던 이 나무를 집중 조명한다. 이 전시의 큐레이터 수잔 앨리슨 스타인은 BBC 컬처에 “이번 전시가 반 고흐의 사이프러스에 초점을 맞춘 최초의 전시”라고 말했다. “전례 없이 완전히 새로운 관점입니다. 반 고흐가 오랫동안 이 주제에 관심을 가졌던 뒷이야기를 전시에서 들을 수 있어요.”
반 고흐의 회복탄력성 상징을 보여주는 이번 전시의 주요 작품 4점을 소개한다.
1. 별이 빛나는 밤, 1889년 6월
“이집트의 오벨리스크처럼 선과 비율이 아름답다. 녹색 빛깔은 아주 기품이 있다.” 반 고흐는 생 레미에 있는 정신병원에서 사이프러스에 대해 이렇게 언급했다. 그리고 1889년과 1890년 사이에 사이프러스를 그린 모든 작품, 특히 별이 빛나는 밤에가 이를 시각적으로 표현한다.
반 고흐는 1889년 파리 만국 박람회에 전시된 이집트 건축물에 관한 글을 읽은 후 사이프러스와 오벨리스크의 형태적 동질성을 발견했다. 오랜 시간을 견뎌낸 인내를 표현할 뿐만 아니라, 사이프러스와 오벨리스크는 우아하게 단순화된 형태를 지니고 있다. 이 형태는 반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에서 가장 극적으로 드러나는 특징, 즉 땅과 하늘을 연결한다. 이집트의 오벨리스크는 태양신 ‘라’의 상징이며, 사이프러스처럼 창공으로 곧게 솟아 차가운 땅과 하늘의 불을 연결하며 희망과 불멸을 표현한다.
오벨리스크 같은 사이프러스를 그림으로써 반 고흐는 절망의 순간에 위안을 얻을 수 있는 자연의 웅장함과 영원함, 장대하고 장엄함을 나타내려 했다.
2. 사이프러스가 있는 밀밭, 1889년 6월
반 고흐는 동생 테오에게 보낸 편지에 “사이프러스는 여전히 나를 사로잡고 있으며, 내가 보는 방식처럼 아직 아무도 사이프러스를 캔버스에 옮기지 않았다는 사실이 놀랍다. 때문에 해바라기를 그린 것처럼 사이프러스로 뭔가를 하고 싶다”고 적었다. 반 고흐는 1888년 2월 프로방스에 도착한 이후부터 사이프러스와 사이프러스가 표현 측면에서 가진 잠재력에 대해 생각해왔다. 그 결실은 생 레미에 온 뒤에 그린 작품에서 나왔다. 반 고흐는 “내가 보는 대로… 사이프러스로 뭔가를 하고 싶다”고 말하면서, 그는 자신의 회복탄력성의 핵심 측면인 ‘직업적 성공을 위한 투쟁’에 대해 고백했다.
스타인은 “그는 항상 예술계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매우 신경썼다”고 말했다. “그는 야망이 매우 컸고 항상 자신의 유산을 생각했습니다. 그는 처음부터 사이프러스가 다양한 차원에서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모티브라고 생각했습니다. 프로방스를 상징하는 모티프가 그를 다른 예술과 차별화시켜 줄 수 있다고 본 거죠.” 그렇게 이 나무는 작품 사이프러스가 있는 밀밭(1889년 6월)에서 일종의 시그니처이자 반 고흐가 사랑한 지역의 상징으로 등장하며, 그의 작품을 지배했다.
3. 사이프러스, 1889년 6월
반 고흐는 자연을 그리는 자신만의 독특한 스타일을 찾는 것 또한 예술가가 뭔가를 성취하는 과정에서 거쳐야 하는 주요 과정이라고 생각했다. 프로방스에 처음 도착했을 때 반 고흐는 예술가들의 집단 거주지를 만들고 싶었다. 특히 그가 존경하는 동료 화가 폴 고갱의 작품이 있는 곳을 갈망했다. 네덜란드 출신인 그는 예술 및 예술의 정신적 역할에 대한 고갱의 대담한 아이디어에 강한 흥미를 느꼈다. 고갱은 예술가는 자연을 직접 연구한 다음 인간의 상상력을 발휘해 모양과 색상을 강화하는 식으로 변형된 표현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고갱은 1888년 10월 프로방스에서 반 고흐와 합류했다. 하지만 그해 12월 반 고흐의 불규칙한 행동을 불안해하며 프로방스를 떠났다.
고갱이 떠났지만, 반 고흐는 계속 사이프러스를 예술적 특이점을 만들기 위한 수단으로 삼았다. 작품 사이프러스(1889년 6월)는 이를 위한 그의 독특한 접근 방식을 보여준다. 주변 구름과 들판의 흐름과 흔들림을 표현할 때 사용했던 기법을 사용해, 붓을 비틀어 위쪽으로 감아올리는 식으로 나무를 마치 얼어붙은 연기 기둥처럼 그렸다. 이런 스타일은 자연에 대한 반 고흐의 심오한 감정의 산물이었다. 그는 에너지를 서로 반응하는 에너지로 표현했다. 그래서 사이프러스가 끌어올린 흙속 미네랄의 힘이 바람, 언덕, 달의 역동성과 황홀경에 빠져 서로 반응하는 에너지로 표현된 것이다.
4. 프로방스의 시골길 야경, 1890년 5월
반 고흐는 동생 테오에게 주변에 있는 사이프러스 나무의 색조에 대해 “햇볕에 흠뻑 적셔진 풍경의 어두운 부분”이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그것은 어두운 색조 중 가장 흥미롭고, 내가 상상할 수 있는 것 중 가장 정확하게 표현하기 어렵다.”
반 고흐가 포착한 어둠은 사이프러스가 전통적으로 죽음과 불멸(이는 삶의 우여곡절 속에서 확실성을 추구하는 예술가에게 중요한 개념이다)과 연관되어 있다는 점을 반영한다. 사이프러스는 공동묘지에 심어졌고, 그 나무는 관으로 사용되곤 했다. 오비디우스나 호라티우스와 같은 로마 시대 시인들의 글에서 사이프러스는 사별의 맥락에서 등장한다. 이러한 상징적 연관은 수세기 동안 지속되어, 반 고흐가 존경했던 작가 셰익스피어의 희곡과 빅토르 위고의 소설에도 등장한다.
스타인은 “그는 이 나무들이 수백 년을 살아온 나무라는 점을 높이 평가했다”며 “재생, 불멸, 죽음과의 연관성을 확실히 알고 있었다”고 설명했다.”그는 처음부터 이 나무를 별과 밀과 연관지였는데, 이는 영원과 생명의 영원한 순환에 대한 검증된 은유였습니다. 사이프러스는 수천 년 동안 북쪽의 사나운 미스트랄 바람(프랑스 남부 지방에서 주로 겨울에 부는 춥고 거센 바람)으로부터 시골을 보호하고 지켜주는 존재를 상징했어요.”
작품 프로방스 시골길 야경에서 사이프러스는 화면의 중심을 차지해, 밤하늘의 별과 달을 나눈다. 그 아래에는 반 고흐와 고갱을 상징하는 두 남자가 고대의 오벨리스크처럼 생긴 나무 밑을 걸어간다.
프로방스 시골길 야경을 그린 직후 반 고흐는 프로방스를 떠나 파리 근교의 한 마을로 이사했다. 하지만 여전히 고갱과의 창작 파트너십을 열망했다. 그림 속 사이프러스는 프랑스 남부에서 반 고흐를 지탱해줬던 자연과 영성, 예술적 야망, 문화 역사의 기반에 대한 마지막 오마주처럼 보인다.
반 고흐는 1890년 7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장례식 때 반 고흐의 관에는 그의 두 가지 대표 모티브인 해바라기 꽃과 사이프러스 가지가 놓였다. 오늘날 우리는 반 고흐를 주로 현세적 헌신과 일시적 기쁨의 상징인 해바라기와 연관짓는다. 반 고흐는 해바라기를 변함없고 영원한 것을 상징하는 사이프러스와 “동등하면서도 보완적인 존재”라고 불렀다.
사이프러스는 반 고흐의 회복탄력성의 상징한다. 스타인의 말처럼,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서 열리는 이번 전시회에선 반 고흐의 강인한 성격을 볼 수 있다. “그의 풍부한 재능, 포기하지 않으려는 결연함, 새롭고 신선한 발명으로 자신을 가로막는 어려움에 맞서는 능력”이 바로 그것이다.
가장 절망적인 순간에 반 고흐는 사이프러스를 자연의 힘을 상징하는 거대한 토템이자 프로방스 시골의 수호신으로 포착했다. 그리고 역사와 자신의 야망, 예술과 문학의 전통적 상징을 바탕으로 자신만의 것을 만들려 노력했다. 고달픈 시간과 개인의 야망, 예술적 고유성, 삶의 격랑에 맞서는 내면의 강인함을 상징하는 영원한 아이콘은 그렇게 탄생한 것이다.
반 고흐의 사이프러스는 2023년 8월 27일까지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서 전시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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