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금 느끼는 연기에 대한 즐거움이 정말, 정말, 정말 오랫동안 느껴왔던 즐거움보다 더 큽니다.”
엘리엇 페이지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는 인생에서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있다.
그의 회고록이 출간된 주에 할리우드의 한 호텔에서 엘리엇 페이지를 만났다. 회고록은 순식간에 베스트셀러가 됐다.
페이지는 “엄브렐러 마지막 시즌 촬영을 막 끝냈다. ‘나’로서 하루를 시작하게 되어 훨씬 현실을 사는 것 같고 중심이 잡힌다”며 “트레일러 안에서 불편하게 생활했던 것과는 정반대”라고 덧붙였다.
넷플릭스 슈퍼히어로 인기작 ‘엄브렐러 아카데미’에서 페이지가 연기한 인물은 원래 이름이 ‘바냐’였지만, 시즌 3에서는 성전환을 반영해 ‘빅터’로 개명했다.
빅터는 절제된 분위기에서 형제들에게 “난 늘 빅터였어”라고 말한다. 그게 문제냐고 묻자 형제들은 아니라고 답하고, 원래 진행하던 스토리로 돌아간다. 버라이어티 매거진은 이 장면을 “감동적인 담담함”이라고 묘사했다.
넷플릭스는 트랜스젠더 작가 토머스 페이지 맥비를 고용해 빅터의 성전환을 드라마에 녹여냈다. 이 부드러운 연출이 전 세계 시청자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모든 플랫폼의 시청 지표를 수집하는 ‘닐슨 미디어 리서치’에 따르면, 엄브렐러 아카데미는 시청 시간이 105억 시간을 넘겨 올해 가장 많이 시청한 오리지널 시리즈 13위에 올랐다.
엘리엇 페이지가 연기한 빅터는 단숨에 원작 기반 영화·드라마에서 가장 유명한 트랜스남성이 됐다. 트랜스남성은 관련 업계에서 찾아보기 힘든 집단 중 하나다.
성소수자 인권단체 ‘글래드’가 발표한 2022~2023년 TV 속 성소수자 현황 보고서에 따르면, 글로벌 TV·영화·스트리밍 플랫폼 100곳에 등장한 성소수자 캐릭터 596명 가운데 11명만이 트랜스남성이었다.
페이지는 본인이 세계에서 가장 주목받는 트랜스남성 중 한 명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으며, 이를 진지하게 받아들인다고 말한다.
페이지는 “지금 나는 독특한 위치에 있다”며 “내가 가진 힘과 플랫폼을 활용해 내가 속한 공동체를 돕기 위해 어떤 방식으로든 할 수 있는 일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지금처럼 스스로를 받아들이기까지, 본인의 성별에 위화감을 느끼던 길고 험난한 여정이 있었다.
페이지는 BBC에 “‘난 여자였던 적이 없다. 난 절대 여자가 될 수 없다.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지? 그냥 10살짜리 아이로 돌아가고 싶다’고 생각한 적이 정말 많다”고 털어놓았다.
“그러다가 ‘아, (10살짜리 아이였던) 그때가 내가 나답다고 느꼈던 마지막 순간이었기 때문이구나, 내가 나처럼 보였던 마지막 순간이었고, 내 몸 안에서 내가 누구인지 깨닫는, 그런 번뜩임이 있었구나’ 하고 깨닫기 시작했어요.”
“이제 그 번뜩임이 다시 돌아오고 있습니다.”
코로나19 바이러스가 전 세계를 휩쓸던 2020년 12월, 엘리엇 페이지는 자신의 인스타그램 계정에서 본인이 트랜스남성임을 공개했다. 이 게시물은 순식간에 300만 개가 넘는 ‘좋아요’를 받았다. 페이지는 그 발표를 한 것이 행운이었다고 적었다.
페이지는 “오랫동안 정말 혼란스러웠고, 밝힐지 말지 계속 마음이 바뀌는 가운데 스스로를 설득했다”고 말했다.
이런 망설임 가운데 일부는 수년간 정체성을 숨겨왔던 후유증이기도 했다. 처음 일에 뛰어들었을 때 만났던 영화계 사람들의 조언을 따른 것이다. 페이지는 독립 영화 ‘주노’의 20세 스타로서 할리우드를 마주했다. 회고록에서는 그 모습을 “가짜, 공허, 동성애 혐오”라고 묘사한다.
페이지는 주노에서 계획에 없던 임신을 경험하는 십 대 소녀를 연기했다. 이 역할로 오스카상 후보에 오르고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다.
회고록 ‘페이지보이’에서 “주노가 성공했을 때 업계 사람들은 내가 성소수자라는 사실을 아무도 알아선 안 된다고 말했고, 내게 좋을 게 없다고 했다… 그래서 원피스를 입고 화장을 했다. 화보도 촬영했다”고 털어놓았다.
페이지는 성별 위화감이 끔찍하게 불편하다고 묘사한다.
“제 모습을 피해 다녀야 했어요. 사진도 볼 수도 없었죠. 저는 그 사진에 없었으니까요. 너무 괴로웠어요.”

가십지에는 페이지의 성정체성에 의문을 제기하는 칼럼이 게재됐다. 페이지는 소셜미디어가 발달한 요즘도 그런 기사가 실릴 수 있을지 의문이라고 말한다.
“지금 말씀하신 기사는 2008년에 나왔죠. 아마 지금 그런 기사가 나온다면, 글을 쓴 사람은 쫓겨날 거예요.”
그렇다면 페이지는 젊은 트랜스젠더가 아무런 인맥도 없이 할리우드에 와서 성공적인 커리어를 쌓을 수 있다고 생각할까?
페이지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100% 확신할 수는 없지만, 가능성은 있다”고 말했다.
그리고 생각을 정리한 뒤 “하지만 지금도 트랜스젠더에 대한 극단적인 혐오 표현이 난무한다. 아직 갈 길이 멀다”고 답했다.
페이지는 공동체야말로 트랜스젠더에 대한 온라인 논쟁 양극화의 해답이며, 본인의 작품을 통해 전 세계의 젊은 성소수자와 연대하길 원한다고 말한다.
기자는 BBC 서비스를 이용하는 트랜스남성들에게 엘리엇에게 영상으로 질문을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인도에서 조종사로 일하는 아담(24)도 질문을 보냈다. 아담의 가족은 성적 지향을 바꾸는 소위 ‘전환 치료’를 받게 했고, 아담이 1년 넘게 집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했다.
아담은 “이것은 나만의 이야기가 아닌, 전 세계 트랜스젠더의 이야기다. 그래서 힘든 시기를 겪고 있는 트랜스젠더에게 어떤 메시지를 전하고 싶은지 묻고 싶다” 고 전했다.
페이지는 영상을 보며 울컥한 듯했다.
페이지는 “그저 잘 버티고, 힘껏 자신을 사랑하고, 자신에게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고 전하고 싶다”고 말했다. “도움을 줄 곳을 찾아가세요. 오프라인도 좋고 온라인도 좋아요. 나를 대변해 주는 이야기, 위안이 되는 이야기를 찾아보세요. 여러분이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상기할 수 있도록요.”
앞으로는 본인이 운영 중인 영화사 ‘페이지보이 프로덕션’과 연기 활동을 통해 미디어에서 표현되는 트랜스젠더 내러티브를 바꾸고 싶다고 말했다.
또한, 자신이 만든 플랫폼이 남성성을 협소하게 정의하는 사람들의 인식을 바꾸는 데 도움이 되길 바랐다.
페이지는 “남성에게 공격적인 모습이 권장되곤 하는데, 남자다움이 무엇인지, 남성성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 기대치가 다시 정의되고 회복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그는 개인적인 삶이 어떻게 진행될지 확신할 수 없다고 말한다.
페이지는 미소를 지으며 “솔직히 아이를 갖는 데 별로 관심이 없어요. 하지만 또 모르죠” 하고 말했다.
“정말 처음으로 내 인생을 사는 것 같아요. 그냥 행복해요. 아침에 일어나서 개를 산책시키고 친구들과 어울리면서, 처음으로 내 몸 안에 내가 있고, 정말 내 몸을 통해 살아가는 기분이 들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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