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6월 초, 강원 양양군에서 열린 제58회 강원도민체육대회 사이클 여성부 선수로 출전한 나화린씨. 금메달 2개와 은메달 1개를 목에 걸며 우수한 성적을 거뒀다. 하지만 그는 경기가 끝난 뒤 다른 선수들에게 음료를 건네며 사과했다.
나 씨는 경기 전날 밤, 잠을 한두 시간 밖에 못 잤다고 말했다. 경기 자체도 긴장됐지만, 그를 집요하게 괴롭힌 건 다른 생각이었다.
“경기 전날 밤에 혹시나 상대 선수가 기권할까 봐 걱정됐어요. 만약에 (다른 선수들이) 다 기권하고 저 혼자만 남는다? 그건 제가 생각했던 것 중에 거의 최악의 상황일 수 있어서 많이 걱정됐죠.”
나 씨는 생물학적 남성으로 태어났지만, 여성으로 성을 전환한 트랜스젠더다. 트랜스젠더 선수가 국내 공식 사이클 대회에 출전해 수상까지 한 건 이번이 처음이다.
‘체육회가 발칵 뒤집어졌다’
나 씨에겐 고등학교 1학년일 때 어머니가 “운동 좀 하라”며 선물한 자전거가 사이클 인생의 출발점이었다.
2010년부터 사이클 동호회 활동을 하면서 좀 더 본격적으로 자전거를 타기 시작했다. 성전환 수술 전, 도민체전 남성부 선수로 출전해 금메달을 딴 적도 있다.
성전환 수술은 그가 오래전부터 계획한 것이었다.
그는 “어릴 적부터 여성으로 살아가길 바랐다”며 “중학생 때 방송에서 하리수 씨가 나온 걸 보고 성전환 수술이라는 게 있구나, 나도 하고 싶다고 생각했고 20살 때부터 본격적으로 준비했다”고 말했다.
나 씨는 2008년부터 호르몬 주사를 맞기 시작했다. 지난해 10월 성전환 수술을 마쳤고, 올해 4월에 법적 성별이 변경돼 새로운 주민등록번호를 받았다.
성전환 수술이 끝나고 나서, 그가 사랑하는 사이클 대회에 참가하기로 했다.
나 씨는 대한체육회에 연락해 경기 출전 가능 여부를 물었다. 그는 그야말로 “체육회가 발칵 뒤집어졌다더라”며 웃었다.
대한체육회 관계자는 “나화린씨 전에는 이런 사례가 없었던 게 맞다”라면서도 이는 ‘문의’가 들어온 것을 기준으로 한다고 했다.
국내 대회의 경우 일반적으로 선수 성별을 주민등록번호상 ‘1’과 ‘2’로 구분하기 때문에 성전환 수술 후 법적 성별까지 바뀌었다면 본인이 수술 사실을 알리지 않은 채 출전하는 게 가능하다는 설명이다.
‘우승해도 박수받진 못하겠구나’
나 씨의 어머니는 그가 출전한다는 소식에 “우승해도 박수받지는 못하겠다”고 말했다. 나 씨도 동의했다.
그렇다면 박수받지 못할 대회에 왜 나온 걸까? 나 씨는 “신체적 우월성을 주장하기 위해서”라고 했다. 이를 통해 트랜스젠더 여성 선수와 일반 여성 선수가 같은 여성부에 속해 경기를 펼칠 수 없음을 보여주겠다는 뜻이다.
나 씨는 “여성 호르몬제를 맞으면 근력이 많이 빠지긴 한다”면서도 “하지만 기본적으로 자라나는 어깨라든가 키, 그런 골격 쪽은 일반 여성 선수들이 노력해도 바꿀 수가 없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트랜스젠더 선수들이 말은 안 해도 자신이 신체적으로 우월하다는 것을 알 수밖에 없다”고 덧붙였다.
그러면서 그는 트랜스젠더 여성 선수의 출전이 “일반 여성 선수들의 꿈과 노력을 헛되게 만드는 것으로 생각했다”고 강조했다.
“저도 트랜스젠더 여성 선수이기 때문에 여성으로서 뛰고 싶은 그런 심정은 알아요. 나도 여자로 인정받고 싶다는 (그 마음이요). 하지만 스포츠에서 체급으로 나누는 종목들이 있듯이, 이건 공정하지 않다고 생각해요.”
김남수 한국외대 글로벌스포츠산업학과 교수도 “스포츠에서 가장 중요한 게 공정성인데 스포츠에 참여하는 순간 불리한 점이 있다고 하면 (선수들이) 형평성·공정성이 있다고 느끼지 않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트랜스젠더 여성의 신체 능력이 더 뛰어날까?
스웨덴 카롤린스카 의과대학 연구원인 토미 룬드버그 박사는 2019년 남성 호르몬인 테스토스테론 억제 요법이 성전환자의 근육량 등에 미치는 영향을 연구한 논문을 발표했다.
박사는 트랜스젠더 여성 11명을 관찰했는데, 생물학적 남성으로 태어난 채 사춘기를 보낸 경우 이후 성전환 수술을 거치고 약 1년간 남성 호르몬을 억제하더라도 생물학적 여성으로 태어난 사람보다 근육량이 훨씬 더 많다고 주장했다.
이 연구 결과는 럭비 대표기구인 월드럭비(WR)가 여성부 국제대회에 성전환 선수 출전을 금지하는 데 영향을 미쳤다.
룬드버그 박사는 BBC 코리아와의 인터뷰에서 “(생물학적 남성으로 태어난 사람이) 테스토스테론을 억제했지만, 근육량은 약 5% 줄었다”며 “여전히 (신체적) 우위가 상당하다는 뜻”이라고 설명했다.
“우리는 연구 결과 완전한 포용과 공정을 동시에 이루는 게 불가능하다고 판단했습니다.”
하지만 전 세계적으로 트랜스젠더 여성 선수의 상대적 운동 역량에 대한 연구는 찾아보기 힘들다. 트랜스젠더 여성 선수 표본 자체가 적고, 운동 역량에 영향을 미치는 변수가 너무 많기 때문이다.
해당 연구도 실험 대상인 트랜스젠더 여성은 일반인으로, 운동선수로서 훈련받지 않았다는 점에서 한계가 있었다.
최은경 경북대 의과대학 교수는 “사람은 근밀도로만 운동을 하는 게 아니다. 근밀도만이 (운동 능력을 결정하는 요소라면) 근 이식만 하면 될 것”이라며 “그렇지 않기 때문에 전체적인 조화를 이루고 역량을 높이기 위해 트레이닝을 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사람마다 (신체적) 차이가 매우 크고 후천적인 부분이 훨씬 더 많기도 해서 지금 어떤 것(조건)이 더 유리하거나 불리한지 미리 얘기하긴 좀 어렵다고 본다”고 말했다.
국내외에서 어떤 논의 이뤄지고 있나?
아직 국내에선 나 씨 같은 사례를 찾기 힘들지만, 해외에서는 이미 트랜스젠더 여성 선수와 관련한 논의가 진행 중이다.
현재 육상과 수영, 럭비 등 여러 국제 스포츠연맹에서 트랜스젠더 여성 선수가 아마추어 대상이 아닌 엘리트 대회에 출전하는 것을 금지하고 있다.
대신 트랜스젠더뿐만 아니라 남성과 여성의 신체적 특징을 모두 타고난 ‘간성’ 등 DSD(Differences in Sexual Development·성적 발달의 차이) 선수를 포괄하는 ‘오픈’ 부문 신설이 유력한 대안으로 떠오르고 있다.
나 씨는 “태권도나 유도 같은 종목에서 체급을 나누는 것처럼, 새로운 부문을 신설하는 건 성 정체성에 대한 차별이 아니라 운동 능력을 구분하자는 취지로 봐야 한다”고 말했다.
“운동선수는 명예를 향해 달려가는데, 트랜스젠더 여성 선수들이 일반 여성부로 뛰어야 한다면 그 사람이 (운동을 통해) 얻을 수 있는 명예는 다 박탈하는 셈이거든요. 명예는 자신이 만드는 게 아니라 다른 사람으로 인해서 얻는 것이기 때문에, 오히려 그렇게 하는 것이 더 차별이라고 생각해요.”
룬드버그 박사도 ‘오픈 부문’ 신설이 현재로선 최적의 해법이라며 “분류상의 이점과 경쟁력 차원의 이점을 구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스포츠 경쟁 부문을 나누는 것은 사실상 포용적인 조치”라며 “부문을 나누지 않는다면 모든 경기는 20~35세 남성이 석권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러면서도 “사격이나 요트, 양궁 같은 종목에서는 남녀 운동 능력 차이가 더 작다”며 “그런 경우엔 (트랜스젠더 여성을) 포용할 가능성도 있을 것”이라고 언급했다.
김 교수도 일괄적인 원칙을 적용하는 건 오히려 위험한 결정일 수 있다며 “개별 종목마다 원칙과 특성을 인지하면서 진행해야 한다”고 말했다.
국제올림픽위원회(IOC)도 트랜스젠더 여성 선수 관련 원칙을 다시 세우고 있다. 2021년까지 테스토스테론 수치를 기준으로 출전 여부를 결정했지만, 이듬해부터 개별 종목 스포츠연맹의 판단에 맡기고 있다.
트랜스젠더 여성도 엄연한 여성으로서 여성부 경기에 참여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다.
최 교수는 “아직 과학적으로 신체적 기량에 의한 차이라는 것이 어느 정도 수준인지에 대해 입증된 바가 없고, 어느 정도 수준의 신체적 기량을 공정하다고 볼 건지에 대해서도 합의가 이루어진 바 없다”며 “과학적 검토와 의료기관 합의가 이뤄지기 전까지는 트랜스젠더 여성들을 여성부에서 배제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해외에 비해 국내에서는 아직 성전환 운동선수의 경기 출전 문제와 관련해 본격적인 논의가 이뤄지고 있진 않은 것으로 보인다.
대한체육회 관계자는 “(나화린씨라는) 첫 사례가 나온 만큼 여러가지 의견 수렴을 통해 첫 사례가 나왔으니까 이를 기준으로 해서 여러 의견을 청취하고 제도 등을 검토할 필요가 있을 것으로 보인다”고 입장을 밝혔다.
나 씨는 앞으로도 도민체전처럼 선수들에게 큰 피해를 주지 않는 대회에 “시위하듯” 출전하는 것을 고려하고 있다.
다만 국제 경기에는 참여할 수는 없다. 국제사이클연맹(UCI)도 트랜스젠더의 국제 경기 참여를 금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UCI의 결정에 공감해요. 공감을 하기 때문에 이렇게 나온 거고요. 그런데 그렇게 되면 성전환 선수들이 뛸 수 있는 경기가 있어야 하잖아요. 그걸 마련해 놓지 않고 그렇게 하면은 이건 차별인 거예요…여자 일반부 선수들도 만족하게 대회를 경기에 임할 수 있고, 성전환부 선수들도 자신의 우승에 대해 떳떳하게 명예로울 수 있는 그런 대회를 만들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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