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팝 아이돌이 되고 싶어서 미국에서 관련 정보를 찾아 볼수록 걱정거리가 쌓였어요. ‘나이가 너무 많진 않나?’, ‘나는 한국인이나 (중국이나 일본 등) 아시아인도 아닌데 괜찮을까?’ 이런 것들이요. 아무래도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죠.”
당시 22살이던 앤비(본명 플로렌스 알레나 스미스)는 대학에서 뮤지컬과 연기를 공부하고 있었다. K팝을 처음 접한 건 미국의 한 한국 불고기 식당에서 아르바이트를 시작하면서였다. 특히 그룹 원어스(ONEUS)의 ‘가자(LIT)’를 한 달 내내 들었다.
“(아티스트의) 에너지와 열정, 공연에 진심을 쏟아붓는 그 모습에 완전히 빠졌어요.”
K팝 아이돌이라는 꿈을 꾸게 됐지만, 인터넷에 관련 정보를 검색할수록 희망과 기대감은 꺾였다. 그러던 중 발견한 그룹이 ‘블랙스완’이었다.
그때 블랙스완은 2020년 데뷔 후 한국인 멤버인 혜미(본명 김혜미) 탈퇴 후 영흔(고영흔)과 주디(김다혜), 세네갈계 벨기에인인 파투(파투 삼바 디우프), 브라질·일본계 레아(라리사 아유미 카르테스 사카타) 등 4명이 활동하고 있었다.
앤비는 블랙스완 팬을 대상으로 한 행사에 참여해 파투에게 조언을 구했다. 그는 파투로부터 “(K팝 아이돌 연습생을 뽑는) 오디션에 통과하면 좋겠지만, 그것만으로 완벽한 결말이 아니다”라며 “꿈을 이루려면 1000%의 노력을 해야 한다”는 답변이 돌아왔다고 했다.
앤비는 블랙스완 소속사 DR뮤직의 첫 번째 오디션에서 탈락했지만, 두 번째에 합격해 마지막 멤버로 합류했다.
이후 한국인 멤버들이 탈퇴하고 레아가 건강상 이유로 활동을 잠정 중단하면서 현재 파투와 앤비, 브라질·독일 이중국적자인 가비(가브리엘라 스트라스버거 달신), 인도 출신 스리야(스리야 렌카) 등 4명이 활동하고 있다.
‘눈물의 트레이닝’
일찍부터 음악을 즐기고 공부하던 멤버들이었지만, K팝 아이돌이 되는 과정은 쉽지 않았다.
가비는 브라질에서 뮤지컬을 배우고 커버 댄스 그룹에서 활동했기 때문에 춤에 대해 많이 알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트레이닝을 시작하면서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나는 왜 여기 있지?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거지? 왜 내 자신을 힘들게 하는 걸까?’라는 생각이 들 때도 있었어요. 그러다 하루 종일 울기도 했죠. 춤을 배우는 게 가장 어려웠지만 여기에 노래 연습과 한국어 공부, 다이어트 등 여러 부담이 겹쳤거든요. 내가 해낼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해보자는 마음으로 버텼어요. 매일 같이 울면서도 K팝 아이돌이 되고 싶단 마음은 여전했거든요.”
앤비도 춤을 출 때 “작은 동작 하나하나까지 잡아내는” 트레이닝 방식이 힘들었다고 말했다.
“(트레이너들은) 계속 (동작이) 틀렸다면서 다시 하라고 하는데, 제가 볼 땐 분명히 제대로 했거든요. 물론 지금 과거 연습 영상을 다시 보면 왜 다시 하라고 했는지 알죠. 하지만 그때는 정말 좌절감이 들었어요.”
스리야는 어려서부터 무용을 했기 때문에 다른 멤버들에 비해 적응이 수월했지만, 트레이닝 강도가 버겁게 느껴지긴 마찬가지였다. 트레이닝을 하고 나면 “온몸이 아팠다”며 “연습실에서 하루 종일 연습하고 아예 거기서 잘 때도 있었다”고 회상했다.
파투는 뒤늦게 블랙스완에 합류한 멤버들에게는 롤모델이 됐다. 하지만 15살 때부터 오디션에 참가했지만 번번이 고배를 마셔온 그는 완벽주의와 미래에 대한 불안감으로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다고 했다.
“사실 ‘(K팝 아이돌은) 못 될 것 같은데’라는 사람들의 말은 별로 신경 안 썼어요. 그건 그 사람들의 의견이니까 나랑 상관없는 거잖아요. 하지만 연습생 때 자신감이 없어서 힘들었어요. 지금도 그렇긴 한데, 조금 더 컨트롤할 수 있죠. 근데 연습생 때는, 연습생이잖아요. 데뷔를 꼭 한다는 (보장이 있는) 게 아니니까.”
파투는 우울증을 겪고 있다며 지난 2월부터 회사의 지원을 받아 정신과를 다니고 있다고 털어놨다. 그러면서도 “인생에서 가장 행복이 필요할 때 K팝을 찾았다”며 “나에게 K팝은 ‘행복’”이라고 했다.

‘적응 쉽지 않지만… 나아지고 있는 부분도’
블랙스완은 국내에 기반을 둔 최초의 ‘한국인 없는’ K팝 걸그룹으로 알려졌지만, 비슷한 사례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국내 최초 전원 외국인으로 구성된 K팝 남자그룹으로는 2017년 데뷔한 EXP EDITION이 손꼽힌다. 이외에도 해외를 기반으로 활동하는 현지인 중심 ‘K팝 아이돌’이 등장하고 있다.
하지만 한국 문화에 익숙하지 않은 외국인 연습생이 엄격하고 경쟁적인 K팝 트레이닝을 견디지 못하고 소속사와 갈등을 겪거나 포기하는 경우도 있다.
7년여 간의 안무 트레이너 경력을 바탕으로 K팝 캐스팅 디렉터로 일하고 있는 인지웅씨는 동양 문화에 익숙하지 않은 서구권에서 자란 연습생들이 적응을 더 어려워한다고 말했다.
인 씨는 “미국이나 유럽 등에서 어렸을 때부터 오래 살았던 연습생들은 자유롭게 자기 의견을 내는 걸 중요시한다”며 “하지만 K팝 업계에서는 노래나 춤을 서로 맞춰서 획일화하고 사생활을 관리하는 부분이 있기 때문에 이걸 견디지 못하고 숙소를 탈출하는 경우도 종종 봤다”고 했다.
그러면서 “소속사 입장에서도 외국인 연습생을 K팝이라는 시스템 안에 어떻게 잘 (포용을) 할 수 있을까를 많이 고민하고 있다”며 “K팝의 저변이 넓어지면서 예전과 달리 투자금을 받고 시작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연습생 전반에 대한 처우도 더 나아지고 있다”고 말했다.
정부도 ‘한류비자’라고도 불리는 ‘K컬처 연수비자’를 준비하고 있다. 이는 K팝 등 한국 문화에 관심 있는 외국 청소년을 대상으로 하는 1~2년짜리 단기 체류 비자로, 이를 통해 소속사와 계약해 취업 비자를 받지 않아도 사설 교육 기관에 장기 등록해 머물 수 있게 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K팝’이란 무엇인가?
이처럼 K팝의 영역이 확장되면서 K팝의 정체성을 묻는 사람들도 있다.
블랙스완처럼 그룹에 한국인 멤버가 없거나, 해외 소속사의 관리를 받으며 해외를 중심으로 활동하거나, 노래 가사가 한국어가 아니라 영어나 다른 외국어여도 K팝의 범주 안에 들어갈 수 있냐는 것이다.
인 씨는 “K팝은 퍼포먼스 등 여러 가지 요소들이 혼합된 결과물이라고 본다”며 “여러 멤버가 한국식 화장을 하고 의상도 (통일성 있게) 갖춰 입고 완벽하게 군무를 추는 것, 이것처럼 모든 걸 하나로 통틀었을 때 K팝이라고 하는 것 같다”고 했다.
한국조지메이슨대 국제학과에서 문화연구를 하는 이규탁 교수도 “K팝은 음악적인 특징보다 중요한 게 비즈니스 모델이라고 생각한다”며 “회사에서 만든 시스템하에서 매니지먼트를 받아서 가수로 교육되고 만들어지는 그 과정이 굉장히 중요하다고 본다”고 했다.
이어 “그다음에 K팝이 갖고 있는 어떤 외적인 이미지, 패션이라든가 의상이라든가 머리모양 같은 것이 될 수도 있지만 뮤직비디오가 갖고 있는 미학도 중요한 요소”라며 “여기에 특유의 퍼포먼스까지 다 합쳤을 때, 그 결과물을 ‘한국적이다’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고 설명했다.
스리야는 “나에게 K팝은 한국의 대중음악이지만, 그 사실이 장벽이 되진 않는다”며 “누구나 (K팝을) 할 수 있고, 피부색이 한계가 될 순 없다고 본다”고 밝혔다.
가비는 “K팝은 완전한 글로벌 K팝, 즉 5세대를 향해 가는 중일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훗날에는 우리도 그렇게 기억될지도 모르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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