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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전협정 70주년: ‘인민지원군’에서 ‘반공 영웅’이 된 대만 내 중국인 전쟁 포로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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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한반도는 미국과 구소련에 의해 남한과 북한으로 분단됐다.

1950년부터 1953년까지 한반도에서는 6·25전쟁이 이어졌다. 1953년 7월 27일 정전협정이 체결됐고, 북위 38도 부근 비무장지대(DMZ)를 경계로 남한과 북한이 나뉘었다. 같은 해 10월 1일, 미국은 한국과 상호방위조약을 체결했다. 그러나 남북한은 여전히 대립 중이며 공식 평화협정에 서명하지 않았다. 즉, 70년이 지난 지금도 남한과 북한은 “휴전 상태”인 것이다.

6·25전쟁 70주년을 하루 앞두고, 타이베이에 정착한 전 중국인 포로 2명이 BBC 중국어 서비스와 인터뷰를 진행했다. 이들은 전쟁 포로로서의 삶, 국제 정치의 볼모가 된 과정, 당시 중화민국(대만) 국민당에 의해 반공 “영웅”으로 묘사된 과정을 회상했다. 또한, 지난 70년 동안 삶의 궤적이 어떻게 변했는지에 대해서도 술회했다.

1950년대 맥아더와 장개석

Getty Images
장제스(장개석)는 1950년 타이베이에서 맥아더(왼쪽)를 방문했다. 분석에 따르면 장제스 정권은 6·25전쟁에 단 한 명의 군인도 파견하지 않았지만, 정치적으로 큰 이득을 누렸다

‘중국 인민지원군’에서 ‘반공 영웅’으로

예슈화는 1931년 산둥성 광라오에서 태어났다. 20살의 나이로 중국 인민해방군에 징집돼 북한 편에서 싸웠다. 1950년 겨울 전투 중 미국과 한국 연합군에 붙잡혀 거제도 포로수용소에 수감됐다. 1953년에 예 씨는 대만에 와서 장제스 정권하에 “반공 영웅”이 됐다.

그러나 70년이 지난 지금도 예 씨는 그의 상황에 깊이 분개한다. 그는 중화민국 국민당 비밀 요원들이 전쟁 포로로 잡힌 중국인을 “반공 영웅”으로 만들기 위해 강제로 반공 문신을 새겼다고 말했다. 이 때문에 본토로 돌아갈 경우 “체면을 잃고” 곤경에 처할까 봐 감히 귀향할 수 없었다. 결국 젊은 공산당 인민해방군은 중화민국 국군이 되어 대만으로 향해야 했다.

예 씨는 강한 어조로 기자에게 말했다. “비밀 요원을 침투시켜 내부에서 우릴 동요시키고 지독한 고문을 하고 문신을 했습니다. 왜 문신을 새길까요? 잘 생각해 보면 알 수 있어요. 본토로 돌아가면 낯을 들지 못하게 만든 겁니다. 창피하고, 굴욕적이죠. 귀향하지 말란 거예요.”

“문신을 하지 않으면 반드시 돌아갈 테니까요. 저는 고된 노동으로 교화를 시키든 뭐든 다시 돌아갈 거예요.”

예 씨의 진술은 최근 진행된 다른 “한국전쟁 영웅”들의 구전 연구 결과와 거의 일치한다. 하지만 당시 중화민국 국민당 정부는 대만에 온 1만4000명의 중국인 포로들이 자발적으로 “영웅”의 길을 선택했다며 이들을 치켜세웠다.

물론 모든 “영웅”이 “어쩔 수 없이” 대만에 온 것은 아니다.

중국 북동부 안둥(지금의 단둥)에서 태어난 나펑우는 대만행 선택을 후회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는 97세의 몸에도 남아 있는 반공 문신을 기자들에게 거침없이 보여줬다. 나 씨는 대만해협 양 쪽의 현재 상황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지만, 참전을 위해 한반도로 가기 전 중국 본토에서부터 군인들의 식사가 매우 열악했다고 말했다. “반찬도 없는 밥 반 공기가 전부였죠. 대만에서는 음식은 충분했습니다. 소고기도 쌀도 있었죠. 중국 본토의 식사나 숙소처럼 열악하지 않았어요.”

홍콩과학기술대학 부교수 데이비드 쳉 창 박사는 BBC와의 인터뷰에서 격렬했던 6·25전쟁 3년 중 후반 2년은 양측이 “싸우면서 협상”을 진행했으며, 그 중심에는 포로 문제가 있었다고 말했다. 창 박사는 1년간의 전투 끝에 양측 모두 막대한 사상자를 내며 전쟁이 교착 상태에 이르렀고, 휴전 협상이 시작됐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휴전 협상의 핵심은 미국이 제기한 중국군 포로 송환 문제였다. 이를 둘러싼 이견이 팽팽했고, 결국 휴전이 성사되기까지 575번의 회의가 열렸다. “한국전쟁 초반에는 영토를 놓고 싸웠고, 후반에는 포로를 위해 싸웠다고 할 수 있죠.”

1952년 1월 초, 미국 주도의 유엔군 대표들은 휴전 협상에서 전쟁 포로들이 중국 본토가 아닌 대만행을 선택할 수 있도록 “자발적 송환” 원칙을 제안했다. 하지만, 중국과 공산주의의 본산 격이던 당시 소련은 이를 단호하게 거부했고 전쟁은 1년 반가량 더 이어졌다. 일부 분석에 따르면 해리 트루먼 당시 미국 대통령이 포로들의 “자발적 송환”을 제안한 데는 인도주의적 우려, 반공 이데올로기, 정치권력 유지 등 복합적 이유가 있다. 트루먼 대통령은 백악관 고위 관리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중국인 포로의 “자발적 송환”을 주장했다.

창 박사는 당시 소련 공산당 지도자였던 스탈린 또한 포로 문제에서 중국과 북한의 타협에 반대했으며 계속해서 싸울 것을 주장했다고 설명했다. 또한, 역사적 기록에 따르면 1952년 8월 스탈린은 저우언라이에게 “북한군은 전쟁에서 막대한 사상자를 낸 것 외에는 아무것도 잃은 게 없다”고 잘라 말했다는 것이다. 당시 북한 지도자 김일성은 통일의 가망이 없다고 판단해 이미 여러 차례 조기 휴전 의사를 밝힌 바 있다.

션즈화를 비롯한 많은 학자들은 1953년 3월 스탈린 사망 후 예상치 못한 역사의 전환점이 발생했다고 생각하며, 창 박사도 이에 동의한다. 소련의 새로운 지도부는 6·25전쟁에 대한 방침을 바꾸고 중국 공산당에 전쟁을 중단할 것을 촉구했다. 여러 압력을 받은 마오쩌둥은 결국 포로 송환을 일부 수용했다.

그렇게 1953년 7월 27일 양측은 “정전협정”에 서명했다.

결국 2만1000명 이상의 중국군 포로 중 3분의 1인 약 7110명이 본토로 송환됐고, 3분의 2인 1만4000여 명이 대만으로 향했다. 이것이 “포로가 쟁점이던” 6·25전쟁 후반부의 결과다.

창 박사의 분석에 따르면, 이 결말은 중국 공산당 지도부에게 골칫거리가 됐고, 이후 중국에서 포로 문제는 터부시됐다. 창 박사의 조사에 따르면, 1952년부터 1953년까지 포로 문제는 중국 기관지 “인민일보”에서 거의 매일 보도됐지만 이후 자취를 감췄다.

1972년 리처드 닉슨 당시 미국 대통령이 베이징을 방문했을 때 저우언라이는 공식 회담에서 갑자기 불만을 토로했다. 그해 미국이 포로 송환에 장제스의 개입을 허용한 것을 두고 “우리가 이 문제에 대해 상당한 인내심을 보였다”고 말한 것이다.

6·25전쟁 당시 대만은 마오쩌둥의 무력 행사 위협에 직면했다. 위태롭던 장제스 정권은 중국인 포로를 대만으로 데려온다는 미국 주도의 계획에서 기회를 포착했다. 국민당은 단 한 명의 군인도 파견하지 않은 채 정치적으로 가장 큰 이득을 누린 것이다. 역사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당시 미국은 대만과 협력해 포로 이송 계획을 추진하기로 합의했다. 많은 국민당 관리들이 한국 부산과 거제도의 포로수용소로 파견됐고, 포로들의 대만행을 위해 당근과 채찍을 모두 사용했다. 결국 많은 중국인 포로가 대만으로 건너와 장제스의 대내외 선전에서 “반공 영웅”으로 치켜세워지고 국민당 군인들의 사기를 진작시켰다.

6·25전쟁 이후 미국은 동아시아 상황과 대만의 전략적 위치를 재고했다. 그 결과 장제스 정권이 살아남았고 중화민국은 현재까지 미국으로부터 일정 수준의 안보를 보장받았다.

예슈화는 대만에 정착한 뒤 처음으로 가정을 꾸렸다. 제대 후 타이베이에서 수십 년 동안 택시를 운전했으며, 자녀들을 키운 뒤 타이베이 삼협구로 이주했다. 참전용사들을 돌보기 위해 마련된 “타이베이 퇴역 군인의 집”에 들어와 지금까지 거주 중이다.

그는 포로수용소 시절을 떠올리며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모두 (대만에 와서) 죽음이 두려워 감히 입을 열지 못했습니다. 군대에 있던 시절에는 감히 말할 수 없었죠. 하지만 제대했으니 이제 저는 입을 열겠습니다. 두렵지 않아요. 모두 말할 수 있습니다. 2000명 이상의 비밀 요원이 침투해 우리에게 문신을 강요했습니다. 우린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었지만 감히 그럴 수 없었습니다…”

예 씨는 그가 아직 어렸을 때 마을의 많은 남성들이 일본군과 싸우기 위해 군대를 결성했다고 말했다. 이후 그는 인민해방군(PLA)에 입대해 19살의 나이로 6·25전쟁에 파병됐다.

1980년대 후반에야 대만 해협을 건너 가족 방문이 가능해졌다. 이후 고향 산둥성을 5번 이상 방문해 가족과 재회할 수 있었다. “어머니가 살아계실 때는 1년에 한 번은 갔지만, 돌아가신 뒤로는 자주 가지 못했습니다. 어머니는 강한 분이었어요. 전족으로 작아진 발로 생활하면서도 아들이 돌아오기 전까지 눈을 감을 수 없다고 말씀하셨죠…”

나펑우는 자신이 농가에서 태어났으며 고향은 중국 북동부 압록강 근처였다고 말했다. 그는 19살의 나이로 공산당에 “징병”됐다. 원래 베이징 루거우 다리에 배치됐다가 부대를 따라 북동쪽으로 이동해 진저우와 진시에서 6개월~1년가량 주둔했고 이후 후루다오로 갔다. 6·25전쟁이 발발하자 보충병으로 북한에 파병돼 중국 인민지원군의 일원으로 ‘항미원조’ 전쟁에 뛰어들었다.

중국 동북부 산둥성과 쓰촨성에서 모인 신병 몇몇은 16세 정도였고, 극도로 잔혹한 전투를 겪어야 했다.

“병사가 부족해 북한으로 파병됐습니다. 하지만 모두 어린아이들이었죠. 악천후에 밤을 새워 장시간 행군했습니다. 몇몇이 지쳐 쓰러지면 시체는 길에 버려졌죠. 우리는 직접 전투에 참여했습니다. 다른 연대는 3일 동안 싸우다 전멸했어요. 포격은 멈추지 않았고 폭우 아래 나뭇잎 같은 모양새로 포격에 저항했습니다. 3일을 버텼더니 아무도 남지 않았어요… 이후 포로수용소에서 2년 동안 지냈습니다.”

대만에 온 뒤에는 타오위안의 한 군부대로 보내져 군용 차량 수리 등을 담당했다. 이후 부대를 옮겼고 지금 있는 센터에서 반세기 넘게 머물렀다. 그는 “가족을 부양하지 못해 함께 고통받을까 봐” 지금까지 결혼하지 않고 독신으로 지내고 있다.

1989년 나 씨는 가족을 만나기 위해 몇 차례 본토를 방문했다. 이후 아버지가 92세의 나이로 돌아가실 때까지 계속 고향에 돈을 보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지금 그 또한 긴 세월을 보냈다. 이제는 본토로 돌아갈 엄두가 나지 않는다.

잊혀진 전쟁

대만에서 계엄령이 해제된 후 언론의 자유가 많이 확대됐지만, 대만에 온 중국인 포로들의 이야기는 체계적으로 기록되고 연구된 적이 없다. 대만에 남은 것은 구전을 담은 역사 연구서 한 두 권 정도다.

중국과 미국은 전쟁과 연관된 개인, 특히 전쟁 포로 문제에 대해 침묵을 고수했다. 수십 년 동안 이어진 침묵에 역사학자들의 시선이 쏠렸다.

홍콩과기대 부교수 겸 한국 이화여대 객원 교수로서 오랫동안 6·25전쟁 역사를 연구해 온 창 박사에 따르면, 미국에서는 휴전 이후 70년 동안 6·25전쟁이 거의 “잊혀진 전쟁”이 됐다. 그러나 중국에서는 예전 영화 ‘상간령 전투’, ‘영웅적인 아들딸’이나, 민족주의 블록버스터 최근작 ‘장진호 전투’와 같이 “항미원조”의 영웅주의를 고취하는 관점에서 주로 기억된다.

창 박사는 BBC와의 인터뷰에서 6·25전쟁 후 2년 동안 미군 1만2300명과 최소 9만 명의 중국 인민지원군이 “협상하며 싸우는 과정”에서 목숨을 잃었고, 최소 14만 명의 북한 주민이 공습으로 사망했으며, 1만4000여명의 중국인 포로가 대만으로 갔다는 분석을 전했다. 그러나 미국은 “전쟁 포로”를 둘러싸고 협상하는 가운데 전쟁이 1년 반 이상 늘어지면서 막대한 사상자가 발생했다는 역사를 직시하길 꺼렸다는 것이다.

그는 중국군 포로의 대만행을 막기 위해 중국군 6명, 북한군 10명, 인원 미상의 한국군이 사망했다고 말했다. 지난 70년 동안 미국·중국·대만·남한·북한은 이런 충격적인 사망자에 대해 논의한 적이 없다. 창 박사는 “이것이 한국전쟁 후반부의 본질이었다. 포로를 둘러싼 싸움이 잔인하고 무의미한, 막대한 희생을 초래했다”고 말했다.

그는 역사 연구자의 관점에서 6·25전쟁이 미래 세대에 남기는 교훈은 어떤 공식 발표나 담론도 맹목적으로 받아들이지 말고 경계해야 한다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또한, “우리는 원본 기록물을 찾고, 관련자를 인터뷰하고, 평범한 사람들의 관점에서 역사를 재구성하고 재조명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한국에서 전사한 중국군 유해가 중국에 반환됐다

EPA
한국전쟁이 끝난 지 60여 년이 지난 2016년, 한국에서 전사한 중국군 유해 36구가 중국으로 반환됐다

중국인 포로의 귀향 여정

중국에서 6·25전쟁 포로에 대한 각종 기록은 공식적으로나 대중적으로나 항상 금기시되어 왔다. 그러나 중국 인민해방군 출신 작가 유 진은 중국 전역을 돌아다니며 수십 명의 포로들을 직접 인터뷰했고 1988년 중국 본토에서 탐사 기록 ‘불운’을 발표했다. 이를 통해 6·25전쟁 포로들의 개인적 기억은 물론 포로수용소에서 벌어진 반공 진영과 친공 진영 사이의 온갖 갈등과 피의 투쟁이 처음으로 대중에게 공개됐다.

창 박사는 BBC와의 인터뷰에서 자신이 대만과 중국의 전쟁 포로를 수년간 직접 만나보고 많은 역사적 자료를 분석한 결과, “반공 포로”가 초반에 부산 및 거제도의 포로수용소를 장악한 것 같다고 말했다. 이때 폭력 행사와 이데올로기 주입을 자행하고 다른 포로를 엄격히 통제했다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1952년 4~5월에 포로의 송환 의사를 확인한 “심사” 과정에서 대부분은 본토 송환에 반대했다.

그런 상황에서도 중국행을 선택한 포로들은 귀향 후 많은 고통을 겪었다. ‘불운’에 등장하는 중국인 포로 장제시의 진술에 의하면, 포로수용소에서 미국과 국민당 비밀 요원에 맞서 싸우겠다고 저항하며 조국행을 결심한 병사들은 귀향 후 좋은 대우를 받지 못했다. 심지어 비겁하게 죽음에 굴복했다며 “신생 중국의 수치”로 여겨지기도 했다.

일부는 공산당에서 제명됐고, 일부는 문화대혁명과 같은 이후 정쟁에서 비판받았다. 많은 병사들은 전쟁이 남긴 심리적 트라우마와 정치적 비난을 감당한 끝에 정신질환을 앓았다. 중국으로 돌아온 또 다른 전쟁 포로 장샤오첸은 포로수용소에서는 전범 취급을 받고 본토에서는 “반군” 취급을 받으며 각계각층의 차별에 직면했다고 유 작가에게 털어놓았다.

또한 인민해방군 출신의 중국계 미국 작가 하 진은 6·25전쟁에 참전한 아버지를 추모하며 20년 전 영문 소설 ‘전쟁 쓰레기’를 저술했다. 그는 이후 자서전에서 “어렸을 때 한국전쟁에서 돌아온 전쟁 포로들을 만났다. 그들은 국경 근처 농장에서 고된 노동에 시달렸고 심지어 그 자녀들까지 괴롭힘당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회고했다. 입대 후 하 진은 지린성 중-소 접경지역에 배치됐다. 그는 당시 모두가 죽음을 각오하고 있었지만, 살아서 귀향하면 “사회적 쓰레기”로 낙인찍혀 “가족에게 짐이 될까 봐” 생포되는 것이 두려웠다고 말했다.

CP-2022-0043@fastviewkore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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